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이 10주년을 향해 가고 있지만 혁명의 근원지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화에 실패했다. 이집트는 군부 권위주의로 돌아갔고 시리아, 리비아, 예멘은 독재보다 더 나쁜 내전을 겪고 있다. 전조없이 갑자기 일어난 독재정권 붕괴는 민주주의 안착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민주화 이행에는 전문 직업의식을 보유한 군부와 현실정치 속 협상의 경험이 있는 야권의 존재가 중요했다. 유일하게 민주화에 성공한 튀니지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와 이로 인한 관광업 위축으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새로운 민주정부 구성원은 오랜 재야 생활로 국정운영의 역량이 부족한 반면 혁명에 참여한 시민은 기대와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조급한 불만을 표출해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열린 시스템은 단기 경제부흥에는 취약하나 장기적으로 발전의 선순환을 이끌어 낼 것이다. 한편 최근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에 합의해 아랍의 봄 이후 중동 대내외 오랜 관성을 깨뜨렸다. 10년 전 이들 산유왕정은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을 억압했으나 이후 청년층을 겨냥한 파격적 개혁개방을 실시해왔다. 산유왕정의 개혁정책과 실용주의 외교노선은 아랍의 봄이 가져온 간접적이나마 긍정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아랍의 봄, 미완의 혁명
2010년 12월 튀니지 작은 도시에서 노점상을 하던 청년이 부패 공무원의 횡포에 항의해 분신했다. 이후 전국으로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고 이어 주변 국가로까지 빠르게 확산됐다. 장기 독재정권을 순식간에 흔든 아랍의 봄 혁명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튀니지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민주화 이행에 실패했다. 이집트는 1년 만에 군부 권위주의로 회귀했고 시리아, 리비아, 예멘은 파벌 간 무력충돌로 인해 장기 내전 중이다.
튀니지의 민주화 성공에는 이슬람주의자와 세속주의자 엘리트 간 합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벤 알리(Zine El Abidine Ben Ali) 독재정권 몰락 후 첫 민주선거에서 집권당이 된 엔나흐다는 일방통행의 국정운영으로 유권자의 분노를 샀다. 두 번째 총선에서 세속주의 정당 니다투니스가 집권 이슬람 정당 엔나흐다를 제치고 승리하자 이슬람주의자는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이후 두 정당은 연립정부를 구성해 종교의 자유와 비무슬림 보호를 명시하는 헌법 개정에 합의했다. 두 세력의 타협에는 시민사회의 중재가 큰 역할을 했다. 튀니지 대표 시민단체로 구성된 국민4자대화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세력 모두를 압박해 민주 헌법 제정을 이끌어냈고 이러한 공로로 201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튀니지는 민주화 이후 총선과 대선을 다섯 차례 안정적으로 치르면서 다원주의 제도화를 공고히 하고 있다.
튀니지 벤 알리의 축출 소식이 알려지자 이웃 이집트에서도 독재자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이집트 시민도 곧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으나 이후 결과는 달랐다. 이집트 군부가 과도정부를 이끌면서 신헌법에 권한 보장 조항을 넣으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집트 군부는 집단 체제와 조직력이 막강했기에 군 출신 독재자 무바라크(Hosni Mubarak)의 권력 사유화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튀니지 독재자는 쿠데타에 대한 공포 때문에 군부를 대폭 축소했고 소수 충성파를 모아 비밀경찰을 키웠다. 독재자의 사적 후원망에서 배제된 군부는 조직의 역할을 국방 의무에 한정시켰고 전문 직업주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튀니지 강압기구는 군과 경찰 사이의 갈등으로 응집력이 낮았으나 이집트의 경우 군부의 권력 장악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까닭으로 강압기구 내 알력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차이로 이집트는 튀니지와 달리 군부 권위주의로 회귀했다.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는 독재보다 더 나쁜 무정부 상태와 내전이 지속되고 있다. 이들 세 나라에서 급작스레 일어난 민주화 시위는 독재정권을 송두리째 흔든 후 심각한 권력공백을 가져왔다. 1960년대 특정 정파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 기존 국가운영 기구와 제도 전반을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사적 소유권 대부분을 약탈해 통제 관리했고 외부 세계와 단절해 폐쇄정책을 펼쳤다. 군·경찰·검찰은 독재자의 사유조직으로 전락했고 시민사회는 감시·통제·처벌 시스템 하에서 급진화 됐다. 결국 장기 철권통치가 무너지자 내전이 시작됐고 내전 발발 이후에는 외부 요인이 개입했다.
시리아 내전은 시아파 소수 분파인 알라위파 출신 아사드(Bashar Assad) 세습 독재정권이 아랍의 봄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면서 시작됐다. 국제사회는 수니파 반군을 지원했고 이란과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을 밀었다. 2000년 갑자기 권좌에 오른 바샤르 아사드는 측근 군 고위 장성의 자율권을 보장했고 수니파 엘리트를 포용 결집시켰다. 30년 전 아버지 하페즈 아사드(Hafez Assad)는 쿠데타를 일으킨 후 다수 수니파 엘리트를 끌어안는 다종파 지배연합을 구축했고 아들은 이를 답습했다. 2014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ISIS가 시리아 동부에서 발호하자 반군을 지원하던 미국과 유럽·중동 동맹국은 ISIS 격퇴에 우선순위를 뒀다. 차악의 존재가 된 아사드 정권은 그 틈을 노려 반군 공세 명목 아래 수니파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 2017년과 2018년에 걸쳐 ISIS 패퇴가 선언되자 시리아 내전의 전세는 아사드 정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정권 생존에 파란불이 켜졌다.
리비아의 경우 카다피(Muammar al-Gaddafi) 독재정권이 시위대의 퇴진 요구에 흔들리자 지역과 이념으로 나뉜 수천 여 무장정파가 반군을 자처했다. 이후 내전이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카다피가 막대한 오일머니를 이용해 부족 간 분할통치를 일삼고 최소한의 국가보안기구마저 축소한 결과였다. 같은 부족 출신과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된 카다피의 친위부대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했으나 독재자의 미래가 불안해지자 바로 이탈해버렸다. 내전이 악화되자 유엔안보리는 민간인 보호책임론을 적용해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 설정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국 나토군의 공습 지원으로 반군이 전세를 이끌었고 카다피는 최후를 맞았다. 2012년 첫 민주선거에서 제헌의회가 출범했으나 군벌이 동시다발적으로 할거하면서 혼란이 이어졌다. 2014년부터 2차 내전이라 불리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세력 간 무력충돌이 시작됐고 ISIS까지 부상하면서 상황은 나빠졌다. 서부 트리폴리를 장악한 이슬람주의 정부와 동부 토브룩에 거점을 둔 세속주의 정부가 각각 의회를 조직해 정통성을 주장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터키, 카타르, 이란은 전자를 이집트, UAE, 사우디아라비아는 후자를 지원하고 있다.
예멘 내전 역시 내전 발발 과정이 시리아, 리비아 사례와 매우 닮았다. 살레(Ali Abdullah Saleh) 독재정권이 시위대 항의에 밀려 맥없이 물러난 후 과도정부가 들어섰으나 시아파 후티 반군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내전이 장기화되자 외부세력이 개입했고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띈 대리전으로 변모했다. 사우디가 이끄는 아랍 동맹국은 정부군을, 이란은 후티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현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미국과 영국이 아랍 동맹군의 민간인 오폭을 막도록 군사기술을 지원해왔다.
중동 독재 몰락과 민주주의 안착의 간극
대부분 독재는 특별한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붕괴했다. 공포정치 하에서는 정확한 여론이 존재하기 어렵기에 독재자, 엘리트, 시민 모두 서로의 속마음을 몰랐고 정권의 취약한 토대를 가늠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의 안정은 소수 정권 엘리트의 억압과 통제로 쉽게 유지될 수 있다. 독재정권에게 가장 큰 위협은 겉으로 보이는 안정과 실제의 취약함을 구별하지 못하는 점이다. 시민 역시 몰락 직전의 정권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가늠하지 못했다.1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에 안심하던 독재자는 우연한 기회에 드러난 시민의 거센 분노를 보고 당황했다. 단호했던 독재자는 유화책을 결정하고 이는 곧 정권 붕괴의 촉매제가 됐다. 독재자가 보인 뜻밖의 반응에 엘리트는 불안해했고 시민은 저항의 조직화에 속도를 냈다. 특히 측근 엘리트는 집단적으로 불안감을 드러냈다. 독재자의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모습은 정권의 생존과 직결된다고 판단했기에 이들 엘리트는 정권수호 의지를 빠르게 포기해버렸다. 독재자는 보상과 억압을 통해 엘리트를 관리하고 엘리트는 독재정권의 안정을 믿고 충성에 매진하기 때문이다.
벤 알리, 무바라크, 카다피, 살레 정권은 체제 수호에서 이탈한 측근 엘리트 때문에 무너졌다. 격렬한 반정부 시위 발발 후 우왕좌왕하는 독재자의 변화에 특히 군부가 발 빠른 계산을 시작했다. 튀니지와 이집트 군부는 독재자의 미래가 불확실해지자 재빨리 독자적 결정을 내려 군의 중립화를 선언했다. 이집트 무바라크가 시위대 진압을 위해 군 투입을 뒤늦게 결정했지만 군부는 국민의 합법적 요구를 존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독재자가 민심을 달래려고 자유화를 약속하자 반독재 여론은 더욱 빠르게 퍼졌고 독재자 퇴진에 대한 희망도 높아졌다. 독재자의 강경책 철회와 군부의 중립적 태도로 인해 더욱 다양한 반정부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약속은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마련이고 현실과 기대 사이의 간극이 커져갔다. 좌절한 시위대는 분노를 더욱 강하게 조직화하고 이때 상황이 개선되었으나 저항의 조직화가 더욱 거세지는 역설적 상황이 일어난다. 시위대에게 상승하는 기대와 달리 현실이 제자리 걸음이거나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기존의 불안한 균형은 걷잡을 수없이 흔들렸다.
아랍의 봄 배경으로 알려졌던 민생고, 청년실업, 정부의 무능과 부패, SNS 확산은 혁명의 촉발 요소가 될 수는 있으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 혁명의 근원지 튀니지는 북아프리카에서 부유한 편에 속했으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알제리에서는 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인한 경제·실업난이 심각했다. 휴대폰, 인터넷, 트위터·페이스북 이용률은 혁명이 비켜간 사우디, UAE, 카타르, 쿠웨이트를 포함한 걸프 산유 왕정에서 뚜렷하게 높았다. 나아가 혁명이 일어난 나라 간 SNS 이용률에는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전체 인구 당 휴대폰 및 인터넷 사용자 비율을 보면 튀니지와 이집트는 중동 국가 내에서 중간 등급에 위치하나 시리아, 리비아, 예멘은 낮은 등급을 차지하고 있다. 페이스북 가입자 비율의 경우엔 의미 있는 패턴이 없다.2
극적으로 일어난 아랍의 봄 혁명은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민주화 연착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독재 몰락 이후 민주주의 안착은 각 나라의 고유한 권력구조 동학에 따라 달라진다. 군부·경찰·검찰 강권기구가 전문직업정신을 갖고 있는지, 반정부 조직이 현실정치 속 협상의 경험이 있는 지가 관건이다. 중동 국가 대부분은 여타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직간접 영향 하에서 근대국가의 기초를 다졌고 ‘과대성장 국가, 과소발전 사회’ 구조로 성장했다. 독립국가로 출범한 이후에도 국가 엘리트와 관료는 식민지배 시기의 강압기구와 여러 제도를 소환, 강화했다. 소수 특권층은 이러한 권위주의 정권과 후원관계를 맺고 정권을 지지했다. 식민지배를 겪지 않은 나라에서도 새로운 국가는 근대화와 발전 구호 아래 시민사회를 탄압했다. 이시기 국가 주도의 발전 과정에서 성장한 노동자 계층은 기존 체제를 종종 옹호했고 국가의 우위는 심화됐다. 결국 시민은 정실 자본가나 무능한 어용노조 대신 이슬람식 개혁을 주장하는 조직을 대안세력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재야 불법단체로서 제도권 활동 경험이 없었던 이슬람 정치세력은 현실정치를 풀어나갈 준비가 부족했다. 장기독재 몰락 이후 이집트 첫 민주선거에서 집권당이 된 무슬림형제단은 권위적이고 미숙한 국정 운영으로 유권자를 실망시켰고 구정권 군부에 정치 개입의 빌미를 줬다. 민주화 대신 내전으로 이어진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는 취약한 국가기구와 급진 군벌의 난립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일어났다. 갈등과 분쟁을 효과적으로 조정할 국가기구나 성숙한 시민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튀니지의 경우, 군부가 정치 불개입 직업정신을 지켰고 이슬람 정당이 세속주의 정당과 합의를 결단했기에 유일하게 민주화 이행이 가능했다.
중동 민주화의 한계와 함의
유일하게 민주화 이행에 진입한 튀니지에도 풀어야 할 국내문제는 산적해 있다. 신흥 민주정부는 태생적으로 일사불란한 집행력이나 단기 경제부흥에 취약하다. 새롭게 들어선 정부 구성원 대부분은 오랜 투옥과 망명 시기를 거치면서 현실정치를 경험하지 못했고 국정운영의 역량을 키우지 못했다. 반면 혁명을 이끌고 민주화 과정을 지켜본 시민은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새로운 정부에 각자 지분을 조급히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신흥 민주정부에 대한 업적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1989년 혁명 이후 출범한 동유럽의 여러 신흥 민주정부 역시 경제·행정·안보 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했고 많은 국가에서 두 번째 총선을 통해 과거 사회주의 정당이 압승을 했다. 튀니지의 신흥 민주정부는 이슬람 극단주의 추종세력의 테러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해 치안력 부재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테러로 인한 관광업의 위축은 경제 침체와 실업 증가로 이어졌다.
민주주의란 시민의 대표를 자유롭고 공정하게 뽑는 정치적 원리이지 효율성과 직결된 기제가 아니다. 다만 투명하고 열린 제도는 장기적으로 발전의 선순환을 가져온다. 민주주의 시스템 하에서 개혁정책의 혜택은 법질서에 따라 다양한 구성원에 고르게 배분된다. 2019년 말 튀니지에서 민주화 이후 두 번째 대선과 세번째 총선이 치러졌다. 여느 민주주의 선거와 마찬가지로 튀니지 유권자는 기성 정치인의 무능을 심판했고 안정적 정부 교체를 이뤄냈다. 대선에서 무소속 헌법학자 출신 사이에드(Kais Saied) 후보가 당선됐고 총선에서 집권 여당 엔나흐다가 의석 상당수를 잃어 다수당 자리를 가까스로 유지했다. 새 내각에는 장관 4명, 국무위원 6명이 여성으로 꾸려지면서 최다 여성 각료 기용을 기록했다.
한편 이집트 군부 쿠데타로 들어선 엘 시시(Abdel Fattah el-Sisi)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주의 정부보다는 나은 차악이라는 평가가 있다. 민주선거로 뽑혔으나 무능하고 교조적이었던 이슬람주의 정부로 인해 민생고와 정국 불안정 폐해가 지나치게 컸다는 것이다. 무바라크 장기 독재정권 하에서 오랜 폭압과 경제난에 지쳤던 시민은 확연히 두드러지는 변화를 한껏 기대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시스템은 명령하달 식의 권위주의 체제보다 경기 부흥에 취약했다. 게다가 제도권 활동 경험이 거의 없던 이슬람 정치세력은 타협에 매우 취약했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 포용에 대해 매우 무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가르기 무능 정부에 대한 평가와 처벌은 쿠데타가 아닌 4년 뒤 투표장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약속이다. 그러나 군부는 민주주의 근간인 선거와 법질서를 새로운 규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동에선 아랍의 봄 민주화의 대대적 실패도 모자라 기존 민주주의의 퇴행이 이어졌다.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로 분류되던 터키와 이란에서 역내 혼란이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선거 권위주의가 빠르게 부상하면서다.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터키 대통령은 일인체제 강화를 위해 터키 민족주의와 오스만제국 과거를 소환했다. 이란 보수 지배연합은 역내 시아파 프록시 지원에 대한 국내 저항을 무마하고자 이란 민족주의와 페르시아제국 영광을 섞어 포퓰리즘 선동에 나섰다. 두 나라는 주변국 내전에 적극 개입해 패권 확장에 나섰고 자국 내 반정부 목소리를 반민족주의로 매도해 탄압했다. 강도 높은 공안정치의 시작이 주변국 민주화 실패나 내전 발발 시기와 맞아 떨어졌다.
중동 민주화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시리아·리비아·예멘 내전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역내 대외관계에서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랍의 봄 혁명을 억압했던 걸프 산유왕정이 구시대적 민족주의를 탈피해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에 합의한 것이다. 8월 UAE에 이어 9월 바레인이 새로운 외교노선을 선언했다. 10년 전 민주화 시위가 역내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며 빠르게 확산될 때 사우디, UAE, 바레인을 비롯한 산유왕정은 예외였다. 이들 산유왕정은 온정주의 국가관을 내세워 전폭적 복지공세로 불만을 억눌렀고 일부 동요 움직임을 빠르게 회유했다. 당시 산유왕정의 혁명 길들이기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주변국에서 권위주의 회귀와 내전 장기화가 점차 자리잡자 최근 이들 산유왕정의 체제 내구성이 인정받는 추세다.
나아가 산유왕정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같은 아랍민족 팔레스타인을 무조건 지지해왔던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를 결정했다. 사실 산유왕정은 최근 몇 년간 비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밀접하게 교류해왔다. 이스라엘 스타트업 회사가 UAE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사우디도 UAE를 통해 이스라엘 기업과 협력해왔다. 사우디의 대표적 개혁개방 의제 비전 2030 프로젝트에 이스라엘 출신 자문단이 도움을 주고 있다고도 알려졌다. 개혁정책의 열성 지지세력인 UAE와 사우디 젊은 층에게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는 자국 경제발전을 위한 긍정적 변화 단계다. 안보 측면에서도 이스라엘과 UAE·사우디는 이란이라는 공동의 적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같은 민족일 뿐더러 이스라엘에 비해 약자라는 감성적 이유로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무능과 시민사회 탄압, 전세계에서 쏟아지는 원조금 횡령·비리를 묵인했던 과거와 단절을 결단했다.
또한 이들 산유왕정은 극단주의 테러 위협, 이란의 패권 추구, 장기 저유가 위기에 맞서 대내적으로도 파격적 변신을 시도하는 중이다. 밀실외교에서 벗어나 국제연합전선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첨단산업 육성, 여성인재 등용, 세금 징수와 보조금 폐지로 탈석유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 19 팬데믹 시기 권위주의 감시 체제를 활용해 공격적 방역을 실시하고 정보를 빠르고 투명하게 공개하면서 높은 수준의 국가역량을 선보였다. 산유왕정의 이러한 국내 변화와 함께 최근 단행한 실용주의 외교 행보는 아랍의 봄 이후 중동 대내외 오랜 관성에 긍정적 신호탄이 되고 있다. 중동 민주화의 빠른 성취가 어렵다면 국가역량을 먼저 제고하는 것도 역내 안정과 경제 발전을 위한 대안일 수 있다. ‘아랍 청년 설문조사(Arab Youth Survey)’에 따르면 아랍 젊은이는 2011년 이래 UAE를 가장 살고 싶은 나라 1위로 매년 꼽았다.3 적어도 젊은 세대에서는 걸프 산유왕정이 전력으로 키우는 국가역량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자리잡고 있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장지향, 2018, 『아산 리포트: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서울: 아산정책연구원; Daniel Kahneman and Amos Tversky, 1979, “Prospect Theory An Analysis of Decision under Risk,” Econometrica 47 (2); Timur Kuran, 1995, Private Truths, Public Lies: The Social Consequences of Preference Falsificat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Charles Kurzman, 2004, The Unthinkable Revolution in Ira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Nassim Taleb, 2010, The Black Swan: The Impact of the Highly Improbable, New York: Random House and Penguin.
- 2. 전체 인구 당 휴대폰 보유, 인터넷 사용, 페이스북 가입 비율을 보면 튀니지 128%, 46.2%, 31%, 이집트 114%, 53.2%, 14.5%, 시리아 71%, 28.1%, 자료 없음, 리비아 161%, 21.8%, 13.9%, 예멘 68%, 20%, 자료 없음을 각각 보이고 있다. Clement Henry, 2013, “Political Economies of Transition,” In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 edited by Clement Henry and Ji-Hyang Jang, New York: Palgrave Macmillan
- 3. ASDA’S BCW, 2019, A Call for Reform: Arab Youth Survey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