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말이 있다. 중국 송나라 양공(襄公)이 초나라의 침략을 물리칠 기회가 있었는데, 강을 건너는 적을 치는 것은 당당하지 않다고 기다렸다가 크게 패한 것을 빗댄 말이다. 제 분수도 모르면서 남을 동정하는 어리석은 인정(人情)을 일컫는다.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북·미·중 간 여러 차례의 정상회담이 끝났지만, 지금까지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말과 글로만 ‘완전한 비핵화’라는 모호한 표현이 남았을 뿐이고 행동 차원에서는 이미 효용가치가 떨어진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가 전부다. 그런데도 중국은 제재 해제를 거론한다. 북한 관광 재개 등 독자 제재의 일부는 이미 허물고 있다. 중국의 관심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에 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진짜 문제는 국내 일각의 목소리다.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을 발표한 지 며칠 되지도 않는데, 벌써 대북 제재 완화론이 나온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기대감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북한 주민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인도(人道) 차원의 바람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는 그만큼 강력한 대북 제재를 낳았고 북한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그 덕에 북한이 비핵화 대화에 나온 것이고,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제재 해제를 최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실질적으로 이행하기 전에는 제재를 해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은 변해 왔다. 일괄타결 주장에서 단계적 접근을 수용한 듯 보이고, 한·미 연합군사훈련도 먼저 중단했다. 마지막 보루인 제재에 대한 입장도 변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바로 이 점을 북한은 파고들 것이다.
협상의 목표는 상황에 따라 늘 변한다. 처음에는 어려운 처지를 피하기 위해 비핵화를 수용하려 했다 해도 상황이 유리하게 조성되면 딴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북한은 핵물질을 협상의 마지막 단계까지 보유하면서 여차하면 다시 핵무기를 만들 여지를 남겨둘 것이다.
그러다가 협상이 유리하게 진행되면 미국과 적당히 타협하려 들 것이다.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기하면서 양보를 받거나 버티기를 할 것이다. 핵무기의 일부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핵무기를 모두 포기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며 제재를 해제 받고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굳히려 할 것이다. 실제로 인도, 파키스탄 등도 제재가 해제된 시점부터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이러한 북한의 변심을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제재다. 대북 제재가 풀릴 경우 추가 비핵화 조치를 요구할 협상의 지렛대를 잃게 된다. 그 후의 협상은 북한의 선의(善意)에 의존하게 될 뿐이다. 한·미 동맹 없이는 북한 핵 위협을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를 고려할 때 더욱 신중해야 한다. 물론 제재 해제는 아직도 극히 소수의 목소리다. 하지만 최근의 정책 형성 과정을 보면 안심할 수만은 없다. 처음엔 일부의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문제가 제기되지만 다음엔 여론의 이름으로 미국에 메시지가 전달되고, 결과적으론 미국이 자국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선택하는 잘못된 관행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오판과 전략 수정을 막고 미국에 확고한 의사를 전하기 위해서도 정부는 제재를 함부로 해제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송양지인은 우리에게 옛날 말이 아니다.
* 본 글은 06월 21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