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한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2022년 12월 말 발표되었다. 보수 성향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태 전략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그 방향도 미국의 인태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다봤다. 12월 28일 발표된 실제 내용은 이런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유, 평화, 번영의 인태 지역이라는 슬로건 아래 태평양에서 인도양을 포괄해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지역 범위를 설정했다. 규범과 규칙, 법치주의, 인권, 비확산, 포괄 안보, 경제안보 등 새 정부에서 강조했던 항목이 중점 추진 과제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미, 중 택일의 한국 인태 전략 담론
현실적으로 한국 내 인태 전략 담론은 미국과 중국 사이 전략 경쟁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한국의 대외정책은 지난 20여년간 미국과 함께 할 것인가 아니면 기존 미국 의존적 방향에서 중국 쪽으로 선회할 것인가라는 두가지 선택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한국이 인태 전략을 택할 것인지, 택한다면 어떤 지향성을 가진 전략을 취할 것인지 역시 이런 양 갈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첫번째 선택은 미국의 인태 전략과 철저히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여기서 더 확장해 인태 전략 담론을 주도하는 미국, 일본, 호주, 인도라는 4자안보대화(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QUAD)의 인태 전략과 함께 하는 것이 첫번째 선택이다. 한반도 분단 상황, 여기에 기반한 안보 담론은 철저하게 이 방향을 선호한다. 한미 동맹을 핵심으로 한 이 생각은 폭넓게 공유되다 못해 이제는 한국을 둘러싼 주변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한반도 상황 관리를 위한 수단이었던 한미 동맹이 이제 그 자체가 목적인 듯한 착각도 일으킨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주장도 최근에는 안보없이 경제적 번영이 없다는 주장, 경제도 안보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경제안보 담론 앞에 무력해지는 듯하다.
이 연장선 상에서 인태 전략이라는 명칭은 물론 내용에서도 미국의 인태 전략에 발을 맞출 때 한국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주장이 현 정부 인태 전략에 자리 잡고 있다. 건국 이후 냉전을 지나 지금까지 미국에 의해 쓰여지고 유지된 현존 지역 질서가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낸 바탕이라는 주장이다. 나아가 미래에도 이 현존 질서(existing order)가 한국의 이익에 가장 바람직하다는 과거 경험에 기반한 주장은 미국과 함께 하는 한국의 인태 전략에 무게를 더한다. 새로운 시도나 변화된 환경을 능동적으로 끌어안기 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기반해 안주하는 매우 보수적 전략이다.
두번째 선택은 앞선 주장의 안티 테제다. 간단히 요약하면 한국의 인태 전략은 그 명칭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미국 편향적이라는 주장이다. 대략 2000년대 초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급부상하는 중국이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쇠락하는 미국의 대안이 될 것이라는 더 강력한 주장이 존재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의 대외적 행태, 특히 사드(THAAD) 배치 이후 한국에 대한 경제적 위협, 그에 따른 한국 내 중국에 대한 재인식으로 인해 중국을 대안으로 보는 입장은 많이 약화되었다. 한 예로 아산정책연구원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5년 10점 만점에 5.5까지 올라갔던 중국에 대한 우호적 감정은 2017년 3.2까지 하락했고, 그 후로 2022년까지 3점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달걀을 나누어 담아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중국적 질서에 대한 큰 의문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인태 전략을 비롯한 대외정책에서 지나치게 미국 편향으로 갈 때 경제적 이익의 상실, 중국의 직접적 압력 등 위협 요소가 많다. 중국을 통해 북한에 대한 일정한 레버리지를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현실적으로 중국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나빠진 감정, 국제사회가 중국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때문에 미국에서 벗어나 중국과 함께 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서 미국과 협력이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속도와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한국 내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가진다.
▶강대국에 의존하는 비현실적 현실주의
한국의 인태 전략, 더 나아가 한국의 대외 전략이 미국과 함께 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중국을 긍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 모두 냉정한 현실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 현실주의적(realist) 생각들이다. 두 입장 모두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충실하다.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과 중국에 한국의 미래 이익과 생존을 결부시킨다. 결국에는 누가 힘을 가졌는가, 누가 힘을 가질 것인가가 중요하고 한국의 미래는 궁극적으로 이기는 편에 올라 탈 때 보장된다는 주장이다. 매 순간의 선택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현실에서 당장의 생존을 위해 강대국에 대한 의존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주장한다. 피부에 와 닿는 주장이며 이런 주장은 불안감을 극대화해 지지 기반을 확대한다.
미국의 힘과 리더십이 크게 축소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중국에 맞서는 미국은 인태 지역에서 지역 국가들의 협력을 구하지 못하면 미국 주도의 현존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 냉전시기 미국은 글로벌 안보, 경제 공공재를 공급하고 리더십을 획득했다. 지금의 미국은 그런 안보, 경제적 공공재를 더 이상 공급하기 어렵다. 중국이라는 부상하는 강대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리더십을 행사하고 질서를 만들기에 중국의 주장을 지지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국가가 많지 않다. 심각한 신뢰의 문제도 안고 있다.
반면 과거 주어진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던 중견국, 약소국들의 힘은 크게 성장했다. 어느 국가도 강대국의 일방적인 지시, 강요, 리더십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 보인다. 반면 강대국들은 이들 중소국가의 지지와 협조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중소국가들의 대 강대국 협상력이 매우 커진 것이 현실이다. 새로 등장하는 글로벌, 지역 질서가 이런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경우 기형적일 수 밖에 없고 지속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두번째로 강대국들이 결정하는 질서가 지역 및 글로벌 중소국가의 이익을 보장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점도 비현실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향후 세계질서는 미-중 경쟁의 결과로 쓰여질 것이라고 한다. 결국 미국 혹은 중국 중 한 강대국이 승리할 것이고 승리한 강대국에 의해 질서가 쓰일 것이다. 대안적으로는 미-중 경쟁의 결과 강대국 타협이 일어나고 그 타협의 결과가 새로운 질서를 형성할 것이라 한다. 따라서 경쟁하는 강대국 중 누가 승자가 될 것인지 미리 점치고 그에 편승할 때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전략이 나온다. 미국으로 갈 것인가 중국으로 갈 것인가의 담론은 이런 전략적 사고를 반영한다.
문제는 이런 현실주의 사고방식과 전략은 한국과 같은 중소국가의 미래 이익과 생존을 힘의 논리를 앞세운 이기적 강대국이 쓰는 세계 질서에 맡겨 놓는다는 모순이다. 강대국이 쓰는 혹은 강대국의 타협이 쓰는 미래 세계 질서는 강대국의 이익을 반영한다. 냉전시기 인태 지역 국가들의 성장을 가져왔던 미국 주도의 질서도 일차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지역 국가들은 이 질서가 가져온 부수적 효과로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향후 강대국이 쓰는 질서로 인해 부수적으로 혹은 우연의 결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국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근본 의도는 철저하게 강대국 이익 우선이다.
▶한국의 위상과 이익을 반영한 인태 전략
한국 내 인태 전략 주류 담론을 양분하고 있는 주장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나오는 세번째 주장도 있다. 한국의 대외정책, 인태 정책을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틀을 넘어 생각하려는 입장이다. 아직은 앞선 두가지 주장에 비해 작은 목소리지만 향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감안할 때 충분히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생각이다. 이런 주장은 앞서 강대국 의존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 위에 한국의 인태 전략에 관한 세가지 추가적인 생각이 덧붙여져 형성된다.
첫번째, 선진국 단계에 이른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와 지역사회의 기대를 반영하는 인태 전략이 필요하다. 세계경제 10위, 군사력 6위, 가장 앞선 혁신 능력과 ICT를 포함한 선도적 과학기술, 대단한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한국의 국격과 국력을 한껏 높였다. 국민들의 자부심도 높아졌다. 이런 변화된 위상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국은 스스로 중견국을 넘어 선도국가, 선진국으로 생각하는 단계에 달했다. 이런 변화에는 반드시 한국에 대한 기대가 뒤따른다. 한국의 국격과 국력에 맞는 인태 지역, 글로벌 사회에 대한 공헌과 기여가 뒤따라야 한다.
단순히 개발 원조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하고 인도적 지원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한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대외정책은 오랫동안 한반도, 북한 문제라는 담론에 갇혀 동북아를 벗어나지 못했다. 커진 덩치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한국을 한반도, 동북아에 가둬버렸다. 김대중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제외하고 동북아, 한반도에 국한되었던 한국의 지역적 상상력을 다시 확장해야 한다. 한국을 포함하는 인태 지역의 다양한 안보와 번영의 문제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역할을 해야 한다. 나아가 정치안보, 경제, 사회문화를 포괄하는 전반적인 지역 질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한국 만의 비전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인태 전략은 이런 고민의 결과를 반영해야 한다.
두번째,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도 생각해봐야 한다. 자율성 확대는 국제사회에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한국이 전략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자율적 공간 확대를 의미한다. 한국 자체 능력 확대도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비슷한 입장의 많은 국가와 전략적 연대를 강화해 네트워크 파워를 키우는 것이다. 유사한 고민을 가진 국가들을 규합하고 리더십을 발휘해 강대국에 대한 협상력(leverage)을 강화해야 한다. 아세안을 향한 문재인 정부 신남방정책은 이런 전략적 네트워크 강화, 자율적 공간 확대를 위한 작업이었다.
반면 미국 혹은 특정 강대국과 함께 하는 인태 전략은 한국의 자율적 공간을 축소한다. 강대국 변수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강대국과 한국의 전략을 동조화하는 것은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감소시키는 퇴행적 전략이다. 예를 들어 아세안 국가 입장에서 미국과 함께 하는 한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아세안 국가들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과 직접 대화하고 협상하면 된다. 굳이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거래비용을 치를 이유가 없다. 반대로 중국에 의존하는 전략도 한국의 자율성을 제한하기는 마찬가지다. 강대국과 다른 무엇인가를 한국이 인태 지역에 제공할 수 있을 때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극대화되고 자율적 공간은 확대된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서는 안된다. 한국의 국가 이익과 미래 이익은 몸통이고 한국의 인태 전략은 이 몸통에 수반되는 꼬리이다. 한국의 국가 이익과 이를 위해 바람직한 인태지역 질서에 관한 비전이 한국의 인태 전략을 만드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 미국의 인태 전략이 한국의 인태 전략을 형성하거나 반대로 미국의 인태 전략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한국의 인태 전략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강대국의 논리와 전략이 한국의 국가 이익 실현을 위한 전략을 결정하는 셈이다.
개발도상국 시기 안보와 경제성장을 걱정하며 강대국에 보조를 맞춰 생존과 성장을 도모했던 사고방식은 더 이상 선진국 단계에 이른 한국에 적절하지 않다. 이런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한국의 국가 이익도, 한국의 지역 전략도 적절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성장한 국력과 능력, 한반도를 둘러싸고 변화하는 지역 및 글로벌 환경을 감안할 때 한국이 가진 지역에 관한 비전을 투영한 독자적 정책이 필요하다. 한국의 이익, 한국의 지역에 대한 비전과 이를 위해 바람직한 인태 지역 질서라는 몸통이 한국의 인태 전략이라는 꼬리를 흔들어야 한다.
* 본 글은 동아시아재단(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191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