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과정을 지켜보면 국제질서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나 상대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반영되는 ‘세력의 화합(concert of power)’이 아니라 강대국 간 거래의 시대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일방적 침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영토가 강제 병합된 우크라이나 입장보다는 미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의 이익이 우선적인 고려 요소가 되고 있고,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 역시 이들의 거부권에 압도돼 제 역할을 하기 힘든 환경이 됐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한반도에서도 북·러 밀착을 바탕으로 한 북한의 모험주의, 미·북 협상에서의 ‘한국 패싱’, 그리고 한·미동맹의 위기 등이 나타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다음의 세 가지에 주력할 때 자연스럽게 방지할 수 있다.
첫째는 도널드 트럼프 2.0 행정부의 부담 분담이나 거래 위주 동맹 정책이 불러올 수 있는 ‘동맹 무용론’을 경계하고,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비전과 구체적 이행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강대국 간 거래의 시대일수록 어느 한 강대국과의 협력 기반은 존재해야 하고, 우리는 이미 70여년 이상 효용성을 검증한 동맹이라는 자산을 가지고 있다. 한·미동맹의 역사는 동맹 결속이 특정 행정부의 단기적 정책이나 결심으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현재 미국이 원하는 것은 전반적인 동맹의 방기가 아니고 각 동맹국의 가치와 효용성을 확인하는 일이며, 이런 추세는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선 한국이 핵심 동맹국으로 남을 필요가 있다는 확신을 트럼프 행정부에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한·미 간 거래의 대상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활용해야 하는데, 가장 큰 거래는 동맹의 지평을 한반도를 넘어 확장하는 일이다. 이런 요구는 이미 미국에 의해 1990년대부터 제기됐지만 우리는 당면한 북한 위협이나 주변국과의 관계 등을 들어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고 ‘전략동맹’이라는 추상적 용어에 안주해 왔다. 이런 우리의 안이함이 한국을 ‘지켜주고’ 있다는 동맹관을 미국 사회 내에 확산시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현재의 방위비 분담 압력의 원천은 돈을 넘어 지역 및 세계질서 유지에 대한 부담의 분담에 있으므로 이에 대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과 기여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란 점을 부각해야 한다. 또한 트럼프 2.0 행정부도 우리와 협력을 바라는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분야, 미국의 부족한 함정 건조 능력을 보완해줄 한·미 조선 협력, 반도체 기술 및 생산·공급망 등을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AI) 및 우주 관련 첨단기술 협력, 한·미 원자력 협력 등에 대한 우리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우리 자체의 능력을 키우는 일 역시 계속 해나가야 한다. 한·미동맹 차원에서 이미 북한 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한·미 핵·재래전력통합체제(CNI) 구축이 합의됐으므로 전술핵 재배치 등을 통해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을 구체화하는 일과 함께 우리의 재래전력 현대화와 한·미 상호 운용성 증대 추세는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 북한이 북·러 밀착을 활용해 남북 재래 군사력 균형 차원에서 우리의 질적 우위를 따라잡지 못하도록 우리의 중장기 군사력 건설 추세는 차질 없이 유지되거나 오히려 강화돼야 한다.
강대국 간 거래와 일방주의가 난무하는 세상을 헤쳐나가는 최선의 방안은 강하고 거래 가능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면 최악은 어정쩡한 ‘균형’과 상대방의 선의에 기대는 것이고, 우리는 이미 19세기 말의 경험으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었다. 분명한 것은 믿을 만한 파트너와 동맹이 있어야 ‘균형’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 본 글은 3월 3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