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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두 국가관계’로서의 남북관계 규정(2023년 12월), “적의 수도와 군사력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는 완비된 태세” 공언(지난 18일 초대형방사포 실험) 등 최근 김정은의 각종 성명이나 언급에서는 우리에 대한 적대감이 물씬 묻어난다. ‘샛별 여장군’ 김주애를 앞세운 4대 혈연세습에도 집착하고 있고 국제제재와 경제난국에도 그럭저럭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런 징후들을 김정은과 북한 체제의 건재와 연결하고 우리 정부의 통일·대북 정책이 한반도 위기를 증폭하고 전쟁을 부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결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제재를 우회·회피할 다양한 수단들이 있으므로 북한에 대한 압박은 소용이 없다는 목소리들도 나온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북한의 각종 행태는 북한 정권의 초조함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아직 10대 초반에 불과한 김주애를 각종 행사에 동반하면서 후계자 이미지를 심는 것은 김정은의 ‘수령’으로서의 기반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됐을 수도 있다. 후계자는 그에 맞는 연륜과 경험을 갖춰야 하고 최고지도자 부재 시 언제든 그 책임을 떠맡을 수 있어야 하지만, 김주애가 당장 이런 역할을 하기 힘들다는 것은 후계자론에 무게를 두는 이들도 공감할 것이다.

김정은의 대남 적대의식은 ‘민족해방’과 ‘우리 민족끼리’를 내걸었던 선대(先代)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부정과도 연결될 수 있다. 김정은은 1월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평양 남쪽에 ‘꼴불견’으로 남아있는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철거하는 등의 대책도 실행해 “공화국의 민족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조국통일3대헌장’은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의 남북관계와 통일에 대한 사상의 상징이다. 문제는 3대 혈연세습을 통해 권좌에 오른 김정은의 정통성에 있어 최대 자산은 바로 김일성 가계라는 사실이며, 그는 자신도 수습하기 어려운 정치적 도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핵 개발에 집착하고 대남 적대시를 위해 선대마저 부정하는 김정은의 정책이 북한 주민의 납득이나 순응을 불러올 수 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최근 통일부가 탈북민 6351명 대상 인식조사를 바탕으로 발간한 ‘북한 경제·사회 실태보고서’는 탈북민들이 북한에서 생활하던 당시 북한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고 간부의 수탈과 뇌물의 성행을 절감했으며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 교육에 대한 혐오를 느꼈음을 잘 보여준다. 많은 탈북민들이 ‘3대 세습’에 냉소적이었으며 점점 더 많은 외부 정보를 접하면서 점진적이지만 의식이 변화되고 있었음을 증언하기도 한다.

북한 체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북한판 MZ세대’라 할 수 있는 20대와 30대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조사 대상이 탈북민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북한 주민의 정치의식이나 체제에 대한 충성도가 예전 같지 않음을 암시한다. 왜 김정은이 ‘적대적 두 국가관계’론을 이야기하면서 ‘자유민주주의’ 기반 통일에 대한 극단적 거부감을 표출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으로부터의 현실적 위협을 무시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라거나 북한을 노골적으로 흔들고 적대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북한의 불안 징후 역시 제대로 평가해야 ‘비핵화 중간단계론’ 혹은 ‘미·북 핵군축협상론’이 제기되는 동맹국 미국의 동요를 방지할 수 있다. 김정은의 호언장담 이상으로 북한 주민의 의식변화 가능성에 주목해야 북한이 한사코 조장하려 하는 ‘한반도 위기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 본 글은 3월 25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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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현
차두현

외교안보센터

차두현 박사는 북한 문제 전문가로서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 정치·군사, 한·미 동맹관계, 국가위기관리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실적을 쌓아왔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2005~2006), 대통령실 위기정보상황팀장(2008), 한국국방연구원 북한연구실장(2009)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의 교류·협력 이사를 지냈으며(2011~2014) 경기도 외교정책자문관(2015~2018),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2015~2017),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2017~2019)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객원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국제관계분야의 다양한 부문에 대한 연구보고서 및 저서 100여건이 있으며, 정부 여러 부처에 자문을 제공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