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미국민 안전 우선’ 발언은 북한의 지연전술에 지친 미국의 속내를 보여준다. 시작할 때만 해도 1년 안에 비핵화를 완성한다며 핵무기와 핵물질을 북한으로부터 우선 빼내는 ‘초기적재(front loading)’ 방식을 언급했던 미국이 이제는 영변에 대한 철저한 신고·검증마저 양보하며 핵 동결과 장거리 미사일(ICBM) 폐기로 우선순위를 바꾸려는 모습이다. ‘실패한 협상’을 미국 본토 위협이 사라진 ‘성공한 거래’로 바꾸기 위한 외교적 포석(布石)이다.
김정은 정권은 알았을 것이다. 잇단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의 결과로 강도 높은 경제 제재를 받고 있지만, 대화로 방향을 전환하면 자신들에 대한 압박은 서서히 풀릴 거란 것을. 협상 초기에는 곧 비핵화가 될 것처럼 기대치를 높여 놓은 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버티면 성과에 쫓기는 미국 행정부가 자신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을. 한국 정부는 이 과정에서 제재 해제를 원하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미국에 잘 전달할 것을. 마침내 그 순간이 가시권에 접어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몰랐을 것이다. 북한이 말한 ‘완전한 비핵화’ 개념이 그들이 생각했던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의 ‘북한 비핵화’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북한이 보유한 무기급 핵물질의 총량을 추적당할 수 있는 시료 채취를 포함한 검증 방식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도움이 될 것 같았던 중국이 결국은 북한의 후원자가 돼 협상을 방해할 것을. 철저한 준비가 없던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결과 미국은 잘못된 협상의 덫에 빠졌고, 새해 벽두부터 폼페이오 장관은 미국 이익 중심의 ‘플랜 B’를 시사하고 있다.
지난해 내내 강조하던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 얘기가 요즘 잦아든 걸 보면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의도를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알면서도 ‘남북 간에 신뢰 구축이 이뤄지면 북한 핵은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하다. 북한에 핵이 있는 한 언제든 김정은 정권의 결심에 따라 한국의 평화와 번영이 위태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을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했던 김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은 없다. 북한 비핵화의 요체는 북한이 무기급 핵물질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다. 시료 채취를 포함한 제대로 된 신고·검증이 담보되지 않는 협상은 실패다. 제재가 해제되면 마지막 남은 대북 협상력을 상실한다. 함부로 제재 완화를 추진해선 안 된다. 미국이 자국 중심의 협상을 한다면 우리도 국익 중심의 대응을 해야 한다. 단, 한·미 동맹이 약해지면 북한만 득을 본다. 주한미군 없이도 미국의 안보는 튼튼하겠지만, 주한미군 없는 한국의 안보는 현시점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에 핵 보유와 정권교체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는 일은 어려워졌다. 반면, 핵 보유와 경제 성장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 ‘시간을 두고 경제 제재를 유지하며 북한의 변화를 견인’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초기 접근은 틀리지 않았다. 서두르지만 않으면 된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는 핵 동결이나 ICBM이 아닌 북한의 철저한 신고·검증과 교환해야 한다. 신뢰 구축은 좋은 일이지만 평화 따로 비핵화 따로일 수는 없다. 비핵화를 통한 평화만이 지속 가능한 진짜 평화다. 몰랐다면 무능하고, 알았다면 가짜 평화의 모래성을 쌓는 위험한 행동은 이제 멈춰야 한다.
* 본 글은 1월 15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