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유럽 순방 이후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감이 더 떨어졌다. 남·북 및 미·북 정상회담이란 대형 이벤트에 가려 있던 국민의 회의감이 유럽 순방을 계기로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유럽 정상들은 비핵화를 촉진하기 위해 대북 제재를 완화하자는 문 대통령의 호소를 냉정하게 거절하고, 핵을 포함한 대량파괴무기(WMD)의 완전한 비핵화(CVID)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라는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했다. 남북관계에 매몰된 나머지, 북한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시선을 간과한 ‘외교 실패’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남북대화를 시작하면서 쾌도난마 식으로 북핵 문제를 일괄 타결하겠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외교장관이 신고와 검증을 앞세우면 협상이 실패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후퇴했다. 이 발언은 CVID가 불가능함을 시인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최대압박 정책으로 핵을 포함한 WMD를 최단기간에 폐기시키겠다던 미국도 시간과의 싸움은 않겠다며 물러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차 미·북 정상회담을 미루는 것은, 싱가포르 회담처럼 실패할 경우에 치러야 할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은 과거와 달리 ‘톱다운(top-down)’ 방식이어서 효과적이라는 설명도 빛바랜 자기변명일 뿐이다.
대북 제재 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은 물론 미국과의 마찰까지 무릅쓰고 남북관계를 밀어붙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우선, 비핵화를 촉진하기 위해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는 정부의 논리가 새로운 것도 아니다. 1990년대 초 북핵 문제가 시작된 이후 한·미 양국이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에 경수로를 포함한 다양한 당근을 제공하며 핵 포기를 설득했던 비핵화 외교정책이 바로 이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 정책이 북한의 핵 개발을 막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가 최대압박이란 채찍을 들고 북핵 폐기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북핵 폐기와 관계없이 진행될 기미를 보이자 미국의 걱정도 커지고 있다. 워싱턴의 우려가 한국에 대한 불신으로 번질 경우 발생할 한·미 동맹의 파열음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자국에 직접위협을 가하는 적대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동맹에 대해 미국은 근본적인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한·미 관계 훼손을 감수하면서까지 남북관계에 집착한다면 북한의 한·미 동맹 와해 전술에 말려든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 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란 강한 확신을 가진 듯하다. 그러나 이런 확신에 기초한 정책은 기반이 매우 취약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핵보유국으로 남겠다는 김정은의 말 한마디에 대북정책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지금까지 김정은은 물론 북한의 고위 당국자 누구도 핵을 포기하고 NPT에 비핵국가로 복귀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평양 정상회담 이후 문 대통령만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북한의 사기극에 대한민국이 속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불행한 일이다. 정부는 김정은이 정권을 잡은 후 했던 공식·비공식 발언과 북한의 주요 문건을 다시 정밀하게 분석해서 김정은의 핵 포기 가능성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길 권한다. 그 결과에 따라 대북 정책을 원점(原點)에서 재검토 해야 한다. 이를 계기로 김정은의 의도와 전략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새롭게 이룰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는 값진 경험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 본 글은 10월 24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