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비핵화 외교를 저해하지 않는 수준으로 내년도 독수리훈련을 축소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적대국의 핵 포기를 설득하기 위해 동맹과의 연합훈련을 축소하거나 중단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비핵화를 명목으로 한 훈련 축소는 연합훈련에 대한 미국 조야의 기본 입장과도 배치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국방 전략을 검토하기 위해 미 의회가 구성한 위원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연합훈련이 동맹에 대한 안보공약을 강화하고 적대국의 도발 의지를 꺾으며 유사시 전쟁 수행 능력을 보장한다며 오히려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수리훈련 축소는 북한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미국이 취한 안전보장 조치의 하나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연합훈련을 값비싼 전쟁 게임으로 비하하며 중단하겠다고 했고, 마이크 폼페오 국무장관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역대 정부가 고려한 적이 없는 ‘전례 없는(unique)’ 안전보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도 미·북 대화 진전에 맞춰 한반도 군사 태세에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이 동맹의 안보를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작금의 사태는 북한의 한·미 동맹 이간 전략이 먹혀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독수리훈련 축소는 북핵을 막는 데 실패한 비핵화 외교의 부작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는 증거다. 북한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면 핵을 포기할 것으로 믿고 시작한 외교 협상은 시간이 갈수록 북핵 능력이 고도화하고 보상 규모만 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초기에 정치·경제 분야에 머물던 보상이 핵 개발이 가속화하자 금기시됐던 군사 분야로까지 확대됐다. 남북관계를 개선해 비핵화를 촉진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논리도 제네바 기본합의, 9·19 공동선언 등 과거 합의에 적용했지만 실패했던 논리다.
이제, 안전보장 요구를 들어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전제가 타당한 것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신년사에서 ‘평화 수호의 강력한 보검’이라고 자랑한 핵을 손에 쥔 김정은에게 핵보다 더 확실한 안전보장 수단이 있을까? 부르는 게 값이 돼 버린 핵을 쉽게 포기하겠는가? 김일성의 유훈대로 미국의 존재를 한반도에서 말끔히 청소하는 것 외에 김정은이 만족할 만한 가격은 없을 것이다.
군사 분야 합의도 북핵 폐기에 기여할 수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평화 분위기를 인위적으로 띄우고 성급하게 추진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큰 해를 초래할 수 있다. 1992년 남북 군사협상에서 타결하지 못했던 네 가지 사항 가운데 우리의 요구인 수도권 안전보장을 빼고 북한의 3대 요구 사항만 수용된 것은 문제다. 북핵 폐기의 기대가 약해진 가운데 정부 주도의 무리한 평화 만들기는 국민을 안심시키는 게 아니라, 안보 불안을 가중시킬 것이다. 북한 땅에 한 발의 핵탄두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 한 긴장 완화를 명분 삼은 어떤 조치도 북핵으로 난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최근 논란이 됐던 ‘삭간몰’ 미사일 기지 해프닝도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부풀려진 국민적 기대가 현실과 동떨어진 게 드러나면서 빚어진 일이다. 국가안보 정책은 상대에 대한 선의나 일방적인 기대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축적된 경험과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가 핵을 먼저 포기하면 북한도 따를 것이라는 선의가 짓밟혀 북한의 핵 독점 상황을 초래한 비핵화 외교의 실패를 재래식 군사 분야에서 되풀이해선 안 된다.
* 본 글은 11월 27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