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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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고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하여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국제 질서가 ‘리셋’되기 시작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미국과 영국은 지난 200년간 자유주의 국제 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를 주창하고 지탱해왔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181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100년 동안 세계최강의 경제력과 해군력을 바탕으로 자유무역질서를 지탱했다. 영국이 제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힘을 소진하자 세계 질서의 주도권이 전후 유일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는 자연스럽게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제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원조인 영국과 전후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해온 미국이 동시에 이 질서를 거부하고 나섰다. 미국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당연시 하고 그 속에서 막대한 혜택을 누려온 우리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거부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의 유권자들은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더 이상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을 격퇴하고 전후에는 소련과 대치하면서 냉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미국만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냉전 중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을 주도하여 서유럽의 안보를 책임짐으로써 자유주의 국제 체제의 극단적인 실험인 유럽연합의 태동을 가능케 하였다. 소련의 핵 위협에도 유럽연합이 군비를 대폭 줄이고 국경을 허물고 화폐를 통합하고 인구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이 NATO를 통하여 유럽에 투사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과 일본,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 등이 경제 발전에 전념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통하여 안보를 보장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역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과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소련과 분쟁 중이던 중국의 편을 들어주면서 미국이 중국의 안보를 보장해주었기에 가능했다. 동시에 미국은 자국의 시장을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에 개방함으로써 이들이 경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유일초강대국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화폐는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었고 미군은 전 세계의 전략적 요충지에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제도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는 가장 이상적인 보편타당한 체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의 유권자들은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미국이 누리고있는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가 미국민의 삶에 과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자유무역질서는 일본과 한국, 대만, 중국 등에는 경제 발전을 가져다 주었지만 이들 국가들의 산업화는 곧 미국 산업의 경쟁력을 무너뜨렸고 미국 제조업의 공동화를 가져왔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전자제품, 자동차, 중국의 값싼 소비재들이 미국 시장을 점거함으로써 미국민들은 이들 나라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하였다. 특히 중국은 미국이 지탱해온 자유무역질서에 편승하여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다. 2015년 중국은 약 6,001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반면 같은 해에 미국은 5천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산업 기반이 무너지고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기록하는 가운데서도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 왔다. 미국의 2015년 국방예산은 5,975억 달러였다. 이는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일본, 영국, 인도, 프랑스, 일본, 독일, 한국, 브라질, 호주 등 상위 2~12위 국가들의 국방 예산과 맞먹는 액수다. NATO와 한미동맹, 미일동맹을 유지하는 데 드는 미국의 국방 예산에 비해 동맹국들의 국방비는 형편없이 적다는 것이 트럼프와 그를 지지한 미국민들의 생각이다. 그리고 미국 산업의 공동화, 만성적인 무역적자, 막대한 군사비의 지출의 결과는 2015년 현재 18조 달러에 달하는 국가 부채였다. 이는 중국의 국가 부채의 4배가 넘는 액수다.

이뿐이 아니다. 미국이 만든 자유주의 국제 질서 덕분에 급성장한 경제를 바탕으로 중국은 미국이 만든 국제 질서에 도전하면서 남중국해, 동중국해 등지에서 무력시위를 일삼고 북한의 핵개발을 용인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로의 회귀’를 외치면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주창하였지만 중국의 부상을 막고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TPP는 또 하나의 자유무역체제로써 미국 산업의 공동화를 가져온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미중 간의 무역협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트럼프는 오히려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미국민들은 열린 국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판단하에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대한 ‘리셋’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국제 질서의 ‘리셋’에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 속에서 번영을 누려온 수 많은 나라가 트럼프와 브렉시트가 상징하는 국제 질서의 궤도 수정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긴장하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는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대항해오던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중국에 시장을 개방하고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적극 돕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을 자유주의 국제 체제에 적극 합류시켰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제 이러한 정책이 미국의 국익을 해치고 있다는 인식하에 하나씩 뒤집기 시작했다. 중국의 환율이 너무 낮다고 하고 중국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을 공언하고 차이잉원 대만총통의 축하 전화를 받으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이 미국에 무슨 이익이 되었는지 노골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통상, 외교, 군사 모든 방면에 걸쳐서 미중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이유다.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무력으로 합병하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유럽에서 NATO와 EU가 건설해온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선거기간 내내 푸틴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으며 당선 후에는 푸틴과 오랫동안 거래를 해 왔고 그의 절친으로 알려진 렉스 틸러슨(Rex Tillerson) 엑손 회장을 국무장관에 임명하는 등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이는 트럼프가 러시아와 화해함으로써 중-러 간의 밀월관계를 깨뜨리고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이 긴장하고 있는 이유다. 동시에 트럼프가 러시아보다는 중국의 도전을 훨씬 더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중 간의 충돌이 필연적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중동에서도 트럼프는 기존의 질서를 흔들고 있다. 이란과 핵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기존의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스라엘 중심의 대중동 정책에서 탈피하려던 오바마의 정책을 다시 되돌리고 있다. 시리아의 내전, IS 문제에 대한 오바마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트럼프가 어떤 적극적인 정책을 펼 것인지, 또 그것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인지 모두 긴장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자가 시도하는 리셋은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국제 질서를 건설하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기존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어느 부분을 손질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신장시키는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사실이다. 겉보기에 미국의 부담이 커 보이는 주한 미군 주둔 분담금 같은 경우에도 미국이 같은 규모의 부대를 미국 본토에 유지하거나 주한 미군 없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자 한다면 그 비용이 훨씬 더 든다. 이는 이미 미국의 싱크탱크들의 연구가 증명하고 있다. 기존의 자유무역협정들을 폐기하거나 재협상하는 것이 과연 미국의 국익 증진에 기여할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트럼프가 보다 미국에게 유리한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리셋을 시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것이 성공하고 어느 것이 실패하여 혼란만 가중시킬 것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기존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가할 것만큼은 확실하다.

아산정책연구원은 본 보고서를 통하여 미국의 ‘리셋’이 어떻게 전개되고 전 세계의 각 지역에, 그리고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예측해 봤다. 예측 불가능한 ‘리셋’의 국면에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조금이나마 비출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함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