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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카산드라 신드롬
운명에 체념하지 말고 모두 제 목소리 내야 우리의 번영 지킬 수 있어

목마(木馬)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 이야기엔 카산드라 공주가 등장한다. 그 미모에 반한 아폴론 신(神)은 미래를 보는 예지력을 공주에게 주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유혹을 거부하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게 하는 저주를 내렸다. 전쟁이 난다는 예언도, 목마가 재앙을 가져온다는 경고도 트로이 왕은 믿지 않았다. 진실을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 ‘카산드라 신드롬’의 어원이다. 최근 우리가 처한 상황 같아서 걱정이 크다.

북한의 핵 능력과 첨단 재래식 군사력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다. 그런데 한·미 동맹은 서로 다른 곳을 본다. 국내 정치만 생각하는 트럼프 행정부 탓도 있지만, 당사자인 한국 정부가 침묵으로 일관하니 미국은 마음의 빚도 없는 것 같다. 우방이던 일본과는 예고된 역사 문제를 못 풀어 대치 중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이때다 하며 방공식별구역과 영공을 넘나든다.

더 씁쓸한 것은 한국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한때 우리 국방력을 두려워했던 북한은 ‘겁먹은 개’라며 조롱한다. 한강의 기적을 부러워했던 중국은 노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고 있다. 한국과의 동맹을 자랑했던 미국도 방위비 분담금 받는 일이 월세 받는 것보다 쉽다고 얕본다.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되고 있다.

그간 경고음이 없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넘치도록 많았다. 북한의 행보가 핵 보유 전술일 수 있기에 정상회담 이전에 비핵화 개념을 확인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라고 통탄했다. ‘냉면 목구멍’ 망언도 따끔하게 꾸짖어야 재발을 막는다고 제언했다. 하지만 듣지 않았다. 김정은의 ‘전략적 결단’이란 말로 희망을 현실로 포장했다. 다른 견해를 무시하고 심지어 비난했다. 그 결과를 보라. 북한은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 없이 고립에서 벗어났다. 새벽잠을 깨울 일 없게 한다던 말이 무색하게 펑펑 미사일을 쏘아댄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를 모욕하고 있다.

주변국 외교도 마찬가지다. 미·중 경쟁 격화와 자국 이기주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와 인권에 기반한 원칙 있는 대외정책과 한·미 동맹 강화를 호소했다. 하지만 외면했다. 중국의 압박에 밀려 ‘사드(THAAD) 추가 배치 불가, 미국 미사일 방어 가입 불가,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라는 3불(不) 입장을 밝혔다. 부당한 외압에 주권마저 포기한 흔들리는 나라가 되었다. 동맹국의 ‘인도·태평양전략’ 지지에는 2년 가까운 시간을 끌며 불만을 낳았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중국은 우리를 더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북·중·러 협력은 복원 조짐이 보인다. 한·미 동맹은 뭐 하나 나아진 게 없다. 대북 정책이나 주변국 외교 모두 카산드라가 울고 갈 일이다.

다가올 앞날은 더 녹록지 않다. 강대국 간 경쟁은 한층 거칠어지며 줄 서기를 강요할 것이다. 북한은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핵 보유를 공고히 할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를 미국에서 떼어내기 위해 협박과 회유를 반복할 것이다. 일본은 전쟁 가능한 나라로 변모하며 협력과 대결 중 택일을 강요할 것이다. 자칫 외교 대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

이제라도 고치면 그나마 나아질 텐데, 다른 견해를 듣지 않는 불통의 관행이 뿌리 깊다.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서인지, 국내 정치적 셈법 때문인지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의 비핵화 결단을 확신한다던 사람들은 교묘히 말을 바꾸며 자리를 보전한다. 다른 길을 가는 북한을 두고 여전히 평화경제니 통일이니 말의 성찬뿐이다. 사고의 중심에는 북한만 있고 주변 정세의 지각변동에는 무감각한 외톨이가 되고 있다. ‘북한 위협과 주변국 위험을 직시하고, 튼튼한 안보로부터 외교적 기회를 모색하자’는 걱정의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고 있다.

누가 뭐래도 피땀 흘려 어렵게 일군 평화와 번영이다. 끝내 듣지 않겠다면 이젠 쟁취해야 한다. 그리스 서사시 속의 카산드라는 주어진 운명에 체념했지만, 이제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오늘의 그녀는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속임수를 드러내고 잘못된 선택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 우리 미래를 위한 답이 있다.

모두가 카산드라가 되어야 한다. 자기가 위치한 바로 그곳에서부터 목소리를 내야 한다. 트로이의 비극은 카산드라 탓이 아니다. 왕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가 트로이일 수는 없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 본 글은 8월 19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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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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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