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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트럼프 행정부의 귀환과 미국의 對중동 정책

2024년 미 대선 캠페인 기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대중에게 피로도가 높은 중동 전쟁 대신 인플레이션과 불법 이민 등 조 바이든 정부의 실패를 부각할 수 있는 국내 문제에 집중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만의 색깔이 강렬했던 1기의 중동 정책을 통해 가늠해 보자면 집권 2기 역시 역내 동맹 우방국과 국제 사회가 아닌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내 지지층 결집을 목표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배타적이고 국수적인 민족주의를 선동할 것이다. 나아가 2기 정부는 입법·사법·행정부까지 장악하고 당선인의 코드에 맞는 충성파로만 내각을 채울 것이라고 선언한 터라 더 강력해진 ‘트럼피즘’을 선보일 것이다. 이란의 핵개발과 역내 프록시 재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아랍 걸프 산유국과의 안보 협력, 미국의 탈중동 정책 등을 둘러싸고 동맹 강화·인권 민주주의가 아닌 거래식 외교·신고립주의·보호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것이고 역내 질서는 요동칠 것이다. 특히 대이란 초강경 압박에 나서면서 폭탄선언에 가까운 충동적인 결정과 후속 방안 없는 기존 정책의 폐기가 이어질 것이고 중동 내 여러 나라는 또다시 혼란스러울 것이다.

 

2024년 미 대선에서의 중동 이슈와 아랍계·무슬림 유권자

 
2024년 미 대선에서 중동 이슈는 인플레이션, 불법 이민, 낙태권, 경제·일자리, 기후 변화, 미국 민주주의, 총기 규제, 범죄율 등 국내 문제에 밀렸다. 미 유권자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 견제 등 대외 이슈보다 국내 문제를 중요하게 봤다. 트럼프 후보도 대선 캠페인에서 중동 이슈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면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전화 한 통으로 전쟁을 당장 끝낼 수도 있다고 했다. 공화당 공식 선거 공약집도 ‘중동 평화를 가져올 것’, ‘이스라엘과 함께할 것’ 등 지극히 원론적 내용을 담았다. 대신 트럼프 후보는 대중에게 피로도가 높은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 전쟁이 아닌 인플레이션, 불법 이민 등 바이든 정부의 실패를 부각할 수 있는 문제에 집중했다.

그럼에도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애리조나 등 경합주 내 아랍계·무슬림 유권자는 바이든 정부의 이스라엘 지원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휴전 실패를 강하게 비난했기에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던 이들은 2024년 초부터 ‘#바이든을 버려라(#Abandon Biden)’ 캠페인을 벌였고 민주당 경선에서도 불신임 투표 운동을 이어갔다. 아랍계·무슬림 유권자는 미국 전체 인구의 약 2.2%로 소수임에도 주요 경합주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어 이들의 표심이 큰 주목을 받았다. 아랍계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미시간주에서 민주당에 크게 실망한 아랍계·무슬림 유권자가 이슬람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고 집권 시절 무슬림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반(反)이민 행정 명령을 발동했던 트럼프 공화당 후보 대신 ‘제 3후보’인 녹색당 질 스타인을 지지하면서 트럼프 승리에 일조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는 디어본 카운티 개표 결과에서 일부 사실로 드러났다. 트럼프 후보는 미시간주에서 1%도 안 되는 차이로 승리했는데, 해리스 후보로선 아랍계·무슬림 유권자의 이탈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1 하지만 트럼프 후보는 이들 경합주에서 초박빙이 아닌 대승을 거뒀다. 민주당의 패배를 아랍계·무슬림 유권자의 중동 이슈 투표 탓만으로 돌리기에는 해리스와 트럼프 후보의 표차가 지나치게 크다.

 

트럼프 2.0 시대와 중동 정책: 충동적이고 노골적인 미국 우선주의

 
역사적으로 미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나온 후보자의 중동 관련 공약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지역 정세의 특성상 취임 후 실제 정책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재임 시절 급변하는 역내 안보 상황에 따라 빠르게 변모하곤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인권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소위 세계의 ‘외톨이(pariah)’로 불렀으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사우디아라비아에 원유 증산과 대러 제재 동참을 부탁하고 갑작스럽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2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돌변에 냉담하게 반응하며 러시아·중국과 밀착했고 바이든 정부는 그런 사우디아라비아의 마음을 돌리려고 중동을 떠난다던 정책도 뒤집고 역내 안정에 끝까지 헌신하겠다고 발표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대선 캠페인에서 이라크에 주둔하던 ‘우리의 아들과 딸’을 데려오겠다고 공약했고 2011년 이를 실천했으나 2014년 급작스레 등장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 ISIS에 맞서 국제 연합 전선을 조직하면서 이라크에 다시 미군을 파병했다.

2025년 1월에 출범할 제2기 트럼프 정부의 중동 정책은 역내 정세의 흐름에 맞춰 모양을 갖춰갈 것이다. 트럼프 후보가 이번 캠페인에서 명확한 중동 공약을 발표하지 않았기에 더 그렇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미 2017~2021년에 자신만의 색깔이 확실한 중동 정책을 편 경험이 있기에 이를 통해 집권 2기 그림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트럼프 1기 정부의 정책으로 중동에는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동 외교 안보 정책에서 역내 동맹 우방국과 국제 사회가 아닌 개인의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내 지지층 결집을 위해 미국 우선주의를 선동했다.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은 전례 없는 포퓰리스트 지도자의 등장이라는 돌발 변수를 제어하지 못했다. 트럼프 2기 정부도 중동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국수적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강조할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란의 핵개발과 역내 프록시 재건, 아랍 걸프 산유국과의 군사 협력, 미국의 탈중동 정책 등을 둘러싸고 폭탄선언에 가까운 충동적인 결정, 지불 능력을 중시하는 동맹관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 후속 방안 없는 기존 정책의 폐기가 이어질 것이며 이러한 좌충우돌 외교 기행으로 중동 내 여러 나라는 또다시 혼란스러울 것이고 역내 질서는 요동칠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둘러싸고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강경 우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그의 안보 포퓰리즘 정책을 편파적으로 지지한다. 이번 대선 TV 토론에서도 “해리스가 당선되면 이스라엘이 사라질 것”이라면서 네타냐후 총리와 극우 정치인의 사임을 압박하는 민주당을 비판했다. 선거 캠페인 기간이던 지난 7월 트럼프 후보는 네타냐후 총리와의 통화에서 “자신의 취임식이 될 2025년 1월 20일 전까지 전쟁을 끝내라”라고 주문한 만큼 신속한 종전을 추진할 것이다. 이후 가자지구 재건과 관련해 이스라엘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아랍 걸프 산유국에게 재정 지원을 요구할 것이며 가자지구의 인도주의 지원이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역량 강화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인 2018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옮겨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위반했고, 2019년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공식 인정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497호를 위반했다. 또한 워싱턴 주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대표부와 팔레스타인 주재 미 영사관을 폐쇄했고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기구 전체 기금의 30%에 달하던 지원금을 중단했다.

 

이란의 핵개발과 역내 대리 조직 재건 및 육성

 
이란의 핵개발과 역내 프록시 육성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최대 압박 접근법을 선호한다. 더구나 이번 선거 캠페인 기간 트럼프 후보를 겨냥한 이란 혁명 수비대의 암살 모의가 발각되고 이란 해커들이 트럼프 후보의 자료를 해킹해 민주당 선거 캠프 관계자에게 보낸 것으로 드러나면서 트럼프 당선인의 대이란 압박 수위는 더 높아질 것이다. 현재 이란은 그 어느 때보다 핵무기 능력에 가까워졌다고 알려진 만큼 트럼프 2기 정부는 외교적 방법이 아닌 고강도 제재와 군사 행동을 통해 이를 저지하려 들 것이다. IAEA의 2024년 5월 보고서에 따르면, 이란의 농축 농도 60%의 우라늄 비축량이 142㎏이고 이론적으로 핵무기 3개를 제조할 수 있다.3

2018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주요 6개국과 이란이 어렵게 타결한 다자 간 이란 핵 합의를 전격 파기하고 고강도 제재를 시행했다. IAEA가 이란의 핵 합의 준수를 확인했음에도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맺어진 ‘나쁜’ 합의라며 구체적 대안도 없이 독단적으로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의 일방적 파기에도 영국·프랑스·독일은 이란과 사업을 이어가는 자국 기업에 계속된 지원을 약속했으나 ‘세컨더리 보이콧’으로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2020년에는 이란 군부의 최고 실세이자 레바논·가자지구·시리아·이라크·예멘 등에서 프록시 육성에 매진해 온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 수비대 사령관을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드론 공격으로 암살했다.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깜짝 결정으로 알려진 이 작전 이후 이란 내 온건 개혁파 입지가 극도로 축소하고 강경 보수파가 득세하면서 이란의 군사 모험주의는 더욱 거세졌다. 그래도 트럼프 후보는 이번 대선 캠페인 기간 이란과 거래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며 즉흥적인 협상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했다.

 

아랍 걸프 산유국과의 군사 협력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아랍 걸프 산유국과의 군사 협력을 향한 트럼프 당선인의 입장은 매우 우호적이다. 이들 산유국은 미국과의 무기 거래 및 방산 협력에서 지불 능력에 근거한 거래주의 방식에 큰 불편 없이 호응하며 트럼프 당선인은 이들 국가에 인권과 민주주의 원칙을 압박하지 않을 것이다. 2017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가 사우디아라비아였을 만큼 이들 사이의 관계는 돈독하다. 201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보국 요원들이 이스탄불 주재 자국 총영사관에서 반정부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를 잔혹하게 살해하자 국제 사회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을 거세게 비난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사업과 거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며 미 의회의 사우디아라비아 무기 금수와 제재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트럼프 패밀리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사적 친분에도 양국 사이가 늘 좋지는 않았다. 2019년 이란의 프록시인 예멘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시설을 미사일과 드론으로 대거 공격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바람에도 트럼프 정부는 우방국을 위해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당시 후티 반군의 공격은 1991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쿠웨이트의 정유 시설을 공격한 이래 국제 원유 시장을 마비시킨 가장 큰 도발이었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아랍 에미리트와 카타르 등 걸프 산유국은 트럼프 정부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기고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 외교 다변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미국의 탈중동 정책

 
트럼프 당선인은 역내 안보 상황이나 동맹 우방국이 처한 군사 위협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미국의 탈중동 정책을 밀어붙일 것이다. 2025년에 이라크 주둔 2,500여 명, 시리아 주둔 900여 명 미군의 철수가 신속히 이뤄질 것이고 철군 후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이란 혁명 수비대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대될 것이다. 2019년 트럼프 전 대통령은 돈이 많이 든다며 시리아 주둔 미군 병력을 대폭 철수하고 반(反)ISIS 국제 연합 전선에서 핵심 지상군으로 싸운 쿠르드계 시리아 민병대인 인민 수비대 지원을 중단했다. 철군과 지원 중단이 이뤄진 지 사흘 만에 튀르키예군이 시리아 국경을 넘어 미국의 우방 인민 수비대를 공격했으나 트럼프 정부는 방관했다. 오히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비용 지급을 약속했다며 사우디아라비아에 추가 파병과 첨단 무기 배치 계획을 발표했다. 또 2020년에는 우방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배제한 채 탈레반과 평화 협정을 맺고 철군을 준비했으며, 이는 탈레반이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재집권하는 데 결정적 기회로 작용했다. 더불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시절 중동의 권위주의 리더와 기이한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21세기 술탄이라고 불리는 레젭 타입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을 자신의 ‘터프 가이’ 친구라며 치켜세웠고 G7 회의장에서 이집트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추락시킨 압델 파타 엘 시시 이집트 대통령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재자’로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2019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가족이 연루된 튀르키예 국영 은행 할크방크에 대한 미 검찰의 이란 돈세탁 공모 혐의 기소를 보류했고 튀르키예의 러시아제 S-400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 도입에 대한 의회의 초당적인 제재 요구 역시 막았다.

 

중동의 다층적 딜레마와 ‘트럼피즘’의 미래

 
그렇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중동 정책의 업적은 있다. 바로 기념비적인 아랍·이스라엘 데탕트를 가져온 아브라함 협정 체결 과정에서 성공적인 중재 역할을 한 것이다. 2020년 수니파 아랍 국가 아랍 에미리트와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이 국교 수립에 깜짝 합의한 후 곧 바레인까지 참여해 백악관에서 역사적인 협정식을 개최했다. 아브라함 협정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백악관 선임 고문이던 재러드 쿠슈너가 설계했고 구시대적인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연대의 메커니즘으로 평가받는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중동의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는 구상이라며 환영했고 바이든 민주당 후임 정부도 협정에 대한 강한 지지를 밝혔다. 트럼프 당선인은 아브라함 협정을 자랑스러운 치적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번에도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관계 정상화의 성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설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2기 정부는 입법·사법·행정부까지 장악하고 당선인의 코드에 맞는 충성파로만 내각을 채울 것이라고 선언한 터라 더 강력해진 ‘트럼피즘’을 선보일 것이다. 현재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여러 딜레마에 빠져있다. 최고 우방국이자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이스라엘·이란의 전면전 가능성은 제거해야 하고, 가자지구와 레바논 남부에서 민간인을 보호하면서도 그곳에 깊숙이 뿌리내린 급진 이란 프록시 조직을 궤멸해야 하며, 중국을 직접 견제하기 위해 중동을 빠져나와 인도·태평양 지역에 힘을 집중하면서도 실망한 중동 동맹 우방국이 중국의 편에 서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해야 한다. 이렇듯 복잡미묘한 과제에 대해 트럼프 당선인과 2기 엘리트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신 트럼프 2기 정부는 이란의 핵개발과 프록시 재건 및 팽창주의를 막기 위해 고강도 제재와 군사적 위협으로 대이란 초강경 압박에 나설 것이다. 이란의 강경파 지배 연합을 향한 압박 정책은 이스라엘 내 극우 및 강경 우파 엘리트의 입지를 더 강화할 것이다. 또한 아랍 걸프 산유국과는 철저한 거래주의 방식으로 메가 안보 딜을 맺는 한편 지불 능력이 낮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철군을 신속히 강행해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를 밀어붙일 것이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Hamed Aleaziz, 2024, “For Many Arab Americans in Dearborn, Trump Made the Case for Their Votes,” The New York Times, November 06; Barney Henderson, 2024, “Jill Stein Wins 22% of Vote in Dearborn as Gaza Stings Harris,” Newsweek, November 06; “Michigan Presidential Election Results,” The New York Times, November 05, 2024.
  • 2. David E. Sanger, 2021, “Candidate Biden Called Saudi Arabia a ‘Pariah.’ He Now Has to Deal With It.,” The New York Times, February 24; Peter Baker and Ben Hubbard, 2022, “Biden to Travel to Saudi Arabia, Ending Its ‘Pariah’ Status,” The New York Times, June 2.
  • 3. Stephanie Liechtenstein, 2024, “Iran further increases its stockpile of uranium enriched to near weapons-grade levels, watchdog says,” AP, May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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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의 등장과 동남아: 탈관여를 넘어 신뢰 추락으로 가는가?

2024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는 트럼프(Donald Trump) 공화당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바이든(Joe Biden) 행정부의 대 동남아 정책이나 동남아 관여가 동남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에 비해서 바이든 행정부는 적어도 동남아에 대한 ‘립 서비스’ 정도는 했었다. 트럼프 2기에 들어 그의 1기 정책 노선이 더욱 강화된다면 이런 최소한의 립 서비스 마저 사라질 것이다. 바이든에서 트럼프로 정책 노선이 급격히 바뀌면서 몇몇 국가는 미국과 양자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겪을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도 트럼프 행정부의 재등장은 동남아 국가 전반의 우려를 자아내기 충분하다. 중국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동남아 국가에게 짧은 기회가 될 수는 있지만 이런 기회의 창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 경제 정책은 보호주의의 강화로 이어지면서 동남아를 포함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경제 질서 약화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반대급부로 중국 등 수정주의 노선을 택한 국가들의 동남아 진출은 강화될 수도 있다. 중국, 러시아 등이 미국이 비워 놓은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 동남아 접근을 강화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동남아 국가들 내에서도 미국에 실망한 목소리는 자율성 극대화라는 ‘헤징’ 전략의 강화로 나타날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남아에 대한 무관심은 동남아 정책 부재를 넘어선 파장을 가져올 수 있다. 트럼프의 재당선으로 인해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확신,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향후에 미국이 이 지역에 관여하고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동남아 지역의 기대는 최하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동남아 국가들은 지역에서 지역 중견국들과 연대의 움직임을 강화할 수도 있다. 이런 동남아 국가들의 움직임은 한국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2024년 아세안과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를 수립한 한국은 이어지는 행동계획을 통해 아세안과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동남아에 대한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무관심

 
동남아뿐만 아니라 인도-태평양 지역 전체로 트럼프의 귀환은 2017년 미국 대외정책의 급격한 전환, 리플래시(reflash)를 의미한다. 적어도 선거 과정에서 드러났던 정책적 입장은 정확하게 이를 지향하고 있다. 다만 차이는 2기 트럼프 행정부는 1기에서 얻은 경험치를 바탕으로 처음부터 더욱 확신을 가지고 강력하게 대외정책 방향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1기 트럼프 대외 정책은 적어도 아시아 방면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중국 때리기였다. 여기에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가 겹쳐졌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 방향, 즉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글로벌 공동체가 미국에 대해 가졌던 기대를 충족시키는 정책과 같은 추상적인 목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중국을 직접 압박하고 이 압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파트너 국가들을 동원했다.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미국의 헤게모니와 리더십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위해 지출했던 비용들은 빠르게 삭감했다. 오히려 America First를 위해 리쇼어링(re-shoring)을 강조하면서 적극적 보호주의 방향으로 옮겨갔다. 이런 트럼프 정책에서 개발 도상국 모임이자 미중 사이에서 헤징 전략을 취하는 동남아, 아세안은 완전히 관심 밖이었다.

이런 미국의 대동남아 정책 소홀로 인해 ISEAS에서 행한 여론 조사가 보여주듯 미국에 대한 동남아 국가의 신뢰는 트럼프 행정부 기간 내내 감소해왔다.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트럼프 1기인 2018년, 2019년, 그리고 마지막 해인 2020년 각각 7.9%, 7.9%, 7.4%를 기록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영향력도 30.5%, 26.7%, 30.4%를 기록했다. 이런 수치가 바이든 행정부 들어 경제적 영향력에서 10%를 넘어섰고, 정치적 영향력에서도 약간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중 둘을 놓고 비교한 선호도에서도 2019년 말 미국은 53%를 기록해 46%인 중국에 약간 앞섰다. 2020년 말 바이든 행정부 등장을 목전에 두고 미국에 대한 선호는 61%까지 올랐다.1

 

트럼프 2기: 동남아에 대한 무관심 지속

 
트럼프 2기에서도 동남아에 대한 정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구체적으로 동남아 국가에 확신을 주는 관여 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행동 없이 립 서비스만으로 동남아 국가들에 관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면 트럼프 행정부에 들어와서는 이런 립 서비스마저 사라질 것으로 보이고 그 속도와 규모는 1기 트럼프 행정부를 넘어설 것이다. 이미 1기 트럼프 행정부의 국내 정책, 대외 정책이 2기에 들어서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더욱이 1기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2기에서는 정권 초기부터 자신의 정책 아젠다를 강하게 추진할 가능성이 높고, 이를 추진할 고위직을 모두 자신에게 충성할 인물로 채울 것으로 예상된다. 상, 하원을 모두 공화당이 장악하는 상황은 이런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추진에 탄력을 더할 것으로 보인다.

군사외교적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남중국해에 관여할 가능성이 있지만 미국의 구체적 이익, 즉 중국을 강하게 압박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필리핀과 같은 국가들이 바이든 행정부의 남중국해 문제에서 필리핀 안보에 대한 공약을 트럼프 행정부가 이어가기를 바란다면 필연적으로 큰 비용을 지출해야 할 것이다. 다른 동남아 국가, 아세안 전반적으로 미국이 동남아 지역에 관여해 중국과 힘의 균형을 이루는 안보, 전략적 아키텍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를 기대한다면 동남아 국가들도 그에 걸맞은 비용을 치르라는 압박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다자적으로 아세안이 주도하는 지역 협력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더욱 줄어들 것이며 이제 트럼프는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큰 이변이 없는 한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 주도 다자 협력체에 대한 미국의 이런 태도는 세 가지 정도의 함의를 가진다. 첫 번째, 지금까지 미국이 보였던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에 대한 지지는 이제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번째, 미국의 불성실한 지역 다자 협력 참여는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 협력에 대한 지역 국가들의 관심을 줄이고 그에 따라 이 다자 협력 제도가 가지는 전략적 무게를 크게 줄일 것이다. 세 번째로 이런 미국의 부재는 상대적으로 중국이 지역 다자 협력에 보이는 관심 혹은 지역 다자 협력을 주도하는 힘을 증가시키고 이는 전반적으로 지역에서 중국이 미국에 대해 전략적 우위를 확보할 가능성을 높인다.

 

이해 관계가 갈리는 개별 국가 양자 관계

 
개별 국가를 놓고 보면 필리핀이 가장 잃을 것이 많다. 바이든 대통령과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Jr.) 대통령 사이에 남중국해 문제, 안보 문제를 놓고 만들어졌던 협력 관계가 트럼프 행정부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필리핀이 현재의 안보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갑작스럽게 현상 변경을 가져올 만큼 공세를 높이든지, 아니면 필리핀이 미국의 협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반면 새로 등장한 쁘라보워(Proabowo Subianto)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과거 두테르테(Rodrigo Duterte) 전 필리핀 대통령이 트럼프와 보였던 관계와 유사한 관계 설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쁘라보워의 파퓰리스트적인 성향과 트럼프의 성향이 마치 트럼프-두테르테가 가졌던 관계와 유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유사한 성향이 특별히 두 국가 사이 관계나 협력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 듯하다. 일례로 두테르테 하의 필리핀과 트럼프 하의 미국 사이 긴밀한 전략적 협력 혹은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중요한 양보 혹은 이익을 얻어냈다는 증거는 없다.

반면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는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에 따라 동남아 지역과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 힘의 균형이 붕괴되는 점에 대해 크게 우려할 수 있다. 두 국가는 모두 동남아 지역에서 강대국 힘의 균형에 민감한 국가들이다. 강대국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 동남아의 작은 국가들에게 일종의 전략적, 경제적 안전판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미국의 동남아에 대한 관여 축소, 관심 하락은 미중 사이 힘의 균형에 심각한 균열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반면 말레이시아는 헤징 전략에 충실한 대외 정책을 펴는 국가로 특히 2022년 현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말레이시아 총리 집권 이후 이런 다변화, 헤징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중국, 러시아와 거리를 좁히고 2024년에는 브릭스(BRICS)에도 가입을 했다. 이런 말레이시아가 트럼프 2기 첫해인 2025년 아세안 의장국을 맡게 된다. 의장국이 가진 권한이 제한적이라고 해도 말레이시아의 대외 정책 성향과 트럼프의 탈동남아 전략이 맞물리면 아세안 전반을 미국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동남아에 무관심한 트럼프 행정부를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 국가도 있다. 이미 중국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는 국가들은 대체로 미국의 관여 수준이 낮아질수록 한쪽 방향에서 오는 압력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국의 탈관여의 최대 수혜자는 미얀마 군부일 수도 있다. 2021년 쿠데타로 아웅산 수치(Aung Saan Suu Kyi)의 민간 정부를 뒤엎은 미얀마 군부는 그 이후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 하에 있다. 트럼프의 집권으로 이런 제재가 해제될 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주요 대외 정책 아젠다에서 미얀마의 순위가 크게 낮아지고 관심도 덩달아 낮아질 가능성은 크다.

 

동남아에 대한 경제적 압박도 증가할 전망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 경제적으로 경쟁하는 데 따른 국제 경제 질서의 혼란이 가져올 비용을 동남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트럼프가 집권하는 한 미국에게 지역 경제 질서 안정을 위한 리더십은 기대하기 어렵고 그나마 있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IPEF)도 형해화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IPEF는 조약에 기반해 있지 않기 때문에 행정부의 결정으로 쉽게 되돌릴 수 있다. 물론 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동남아 국가들이 기대했던 미국의 환태평양경제협정 (Trans-Pacific Partnership, TPP)로 복귀는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의 보호주의가 강화되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국가를 포함한 개발 도상국의 미국 시장 접근은 시간이 가면서 어려워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반적으로 동남아, 인태 지역에서 미국의 퇴각은 지역 경제 질서, 특히 무역 질서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지금까지 유지했던 자유 무역과 시장경제에 관한 미국의 리더십이 퇴조하면서 그 빈자리를 중국이 메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다시 한번 더욱 강력한 경제적 각자도생의 시기가 오는 것이다. 중국과 디커플링의 추구는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등 중국을 대신해 미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제조업 부문을 가진 국가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미국 시장 접근에 수반되는 미국 시장에서 무역 흑자는 다시 이들 국가에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압박이 침투하는 통로로 작용할 것이다. 중국에 대한 관세 인상의 반대 급부로 동남아 국가들의 대미 수출이 증가하고, 그 결과 동남아 일부 국가의 무역 흑자가 늘어난다면, 급격한 관세 인상을 통한 경제적 압박은 동남아 국가를 향할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1기 트럼프 행정부에서 중국, 그리고 미국과 이웃한 국가에 집중되었던 무역 압력은 이제 동남아, 인태 지역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미국의 보호주의는 사기업에도 영향을 미쳐, 미국의 대동남아 투자를 유지했던 미국 사기업 투자도 위축시킬 가능성이 크다.

경제적 충격파는 미국과 동남아 국가 양자 경제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장기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충격은 미국의 국내 경제 정책이 간접적으로 동남아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보복관세는 미국 시장 내 상품 가격 인상을 가져오고, 불법 이민 단속은 미국 노동력 시장에서 값싼 노동력을 몰아냄으로써 전반적인 임금 상승을 가져올 수 있다. 이 두 가지 변화는 모두 미국의 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될 수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2022-23년 글로벌 경제가 경험했던 익숙한 상황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다시 미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금리 인상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은 개발 도상국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동남아에서 달러가 이탈하고, 동남아 국가의 외채 상환 및 이자 부담은 크게 증가할 것이다. 동남아로 향했던 해외 투자도 미국으로 모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동남아 국가의 경제 성장과 안정에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책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신뢰 자체가 문제

 
호주의 로위 연구소(Lowy Institute)는 미국 대선 직후 “미국이 트럼프를 한번 더 위대하게(America Makes Trump great, again)”라는 제목의 칼럼을 펴냈다.2 트럼프의 선거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를 패러디한 제목으로 상당한 풍자이면서, 조롱인 동시에 실망, 특히 트럼프를 다시 선택한 미국에 대한 실망을 드러내는 제목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근본적으로 우려되는 것은 임기 4년짜리 미국 대통령의 구체적인 대 동남아 정책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도 4년 후에 임기를 마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진짜 문제는 트럼프 2기를 가능하게 했던 미국이라는 국가, 제도에 대한 동남아를 포함한 글로벌 차원의 신뢰, 확신이다. 핵심은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의해 직접적으로 손해, 불이익을 얻을 것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확신이 이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역 국가들은 개별 차원이든 아세안 차원이든 이제 미국 없는 동남아, 중국과 균형을 맞출 강대국이 없는 인태 지역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지역 국가들이 이를 현실로 인식한다면 향후 미국이 다시 절치부심해 노력한다고 해도 한번 사라진 미국의 리더십을 다시 회복하기에는 엄청난 자원과 노력, 시간이 소요될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회복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한때 미국은 글로벌 차원과 지역의 공공재를 공급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국가였다. 미국의 대외 정책과 외부로 드러나는 행태에서 일부 문제는 있지만 선의의 헤게모니 파워(benign hegemonic power)라는 미국에 대한 묘사에 그래도 동의할 수 있었다. 미국은 글로벌 차원의 공공재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리더십을 확보했다. 냉전 직후 정점에 달했던 미국의 힘은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를 변곡점으로 급속히 쇠퇴하는 듯했다. 그 끝자락에 트럼프의 등장이 있었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제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글로벌 차원의 리더십에 우선시하고 모든 면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동등한’ 경쟁을 하는 지구상의 많은 ‘평범한’ 국가 중 하나로 변모하고 있다. 적어도 동남아에 비치는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은 그렇다.

 

트럼프 2기는 한-아세안 관계 강화를 위한 기회

 
적어도 동남아 지역에서 트럼프 1기, 바이든 행정부를 지나며 지속적으로 약화된 미국에 대한 확신은 트럼프 2기에 들어 그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다. 미국의 대 동남아 관여가 약해진다면 그 반대급부로 중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해질 수 있다. 이런 상황 전개는 아세안을 포함한 지역의 중견 국가와 세력들이 지역 질서의 약화, 특히 규칙 기반 질서의 약화를 방지하는 연대를 만들어야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할 수 있다. 미국의 관여가 약화된다고 해도 수정주의 세력의 도전을 막고 기존의 질서를 강화하는 지역 국가와 세력 간 연대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아세안 입장에서는 한국과 같은 지역 중견국과 협력, 연대를 강화할 필요성이 증가한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역 중견 세력과 연대를 통해 지역 규칙 기반 질서를 강화하는 보루를 만들어야 한다. 아세안도 이런 연대할 세력 중 하나다. 한국은 2024년 아세안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관계(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 CSP)를 만들었다. 2025년에는 그 이행을 위한 행동계획(Plan of Action)도 만들 예정이다. 한-아세안 CSP의 행동계획은 미국 대선 이후 펼쳐지는 환경 변화와 그에 따른 한 단계 높은 협력의 필요성을 잘 담아내야 한다. 특히 한국과 아세안 국가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지역의 규칙 기반 질서, 자유무역 등 지역 경제 질서의 강화 등에 대해 의견을 모으고 함께 협력할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아세안은 아세안 주도의 다자 협력을 다시 전면에 내세워 아세안 중심성 강화와 인도 태평양에 대한 아세안의 관점(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 AOIP) 중심 협력을 지속하는 이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한국은 아세안을 활용해 대 강대국 레버리지를 강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또한 한국은 글로벌 중견국이면서 동시에 지역에서 중견국 이상의 무게를 가지는 위상에 걸맞은 대외 정책 다변화도 꾀해야 한다. 한국이 전략적으로 지역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거듭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에 편향된 대외 정책을 넘어서 더 다변화된 외교 정책을 가지고 지역 내에서 한국의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세계일보] 日은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쳤다

사도광산 추도식 ‘반쪽’… 日, 의미 퇴색시켜
한국, 선의 기대 말고 대일외교 되돌아봐야

 
4개월여를 기다린 사도광산 추도식이 반쪽짜리로 끝났다. 일본 측이 개최한 추도식은 한국이 불참하며 빈자리로 남았고, 한국은 별도의 추도식을 개최했다. 추도식 전날 한국의 갑작스러운 불참 결정은 외교적으로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지만, 일본 정부를 대표해서 온 정무관의 ‘추도사’도 아닌 ‘인사 발언’의 내용은 추도식의 의미를 퇴색시켰고, 그저 겉치레에 불과했다.

추도식에 대한 논의는 지난 7월, 한국이 일본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동의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강제동원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었기에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일본이 사도광산 전체 역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당시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전시실 등 추도시설을 설치하고, 매년 추도식을 개최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추도식은 그 부족함을 채우고, 사도광산의 명과 암을 모두 보여주며 일본의 마음을 담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4개월여 만에 개최된 일본의 추도식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정무관의 과거 발언과 행동은 추도식을 대하는 일본의 진의를 의심케 하였고, 추도사도 아닌 정무관의 ‘인사 발언’에는 정작 가장 위로받고 슬픔을 나누었어야 할 유족들과 희생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이들을 기리는 발언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국은 “양측이 이견 조정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치 않아 양국이 수용 가능한 합의에 이르기 어려웠다”며 지난 4개월간의 시간이 무색한 입장을 내놓았고, 일본은 “정중히 의사소통해 왔으나, 한국이 불참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 의문이 제기된다. 한국은 왜 만족할 만한 합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추도식 개최라는 결론을 내렸는가? 일본은 조건부 동의를 한 한국에 최선을 다했는가? 근본적으로 일본은 추도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추도식이 한·일 관계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인가? 심지어 현지의 분위기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할 주한일본대사관은 추도식 직전 유감을 표명하며, 이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들었다. 한편, 일본 교도통신은 이쿠이나 정무관의 과거 야스쿠니신사 참배 보도가 오보였음을 인정하는 기사를 내며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모습이었지만, 일본은 한국의 불참 결정이 단지 정무관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했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새이다.

사실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 조짐은 이미 군데군데서 나타나고 있었다. 니가타현 지사는 “사도광산 추도식이 세계유산 등재를 보고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추도식의 의미를 변질시켰고, 이와야 외무상은 “지자체와 민간단체로 구성된 실행위원회가 개최하는 행사로 알고 있다”며 정부의 관여를 최소화했다.

말 한마디로도 크게 요동칠 수 있는 게 한·일 관계이다. 그 말이 가져올 파장을 일본은 정말 몰랐던 것인가. 내년 한·일 수교 60주년을 앞둔 상황에서 이번 ‘사도광산 추도식’에 임하는 일본의 실망스러운 자세는 여태까지 한·일 관계를 어렵게 끝고 온 사람들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라도 한국의 대일외교 자세와 일본의 대한국외교 자세를 되돌아볼 때이다. 한국은 일본이 알 거라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임했던 것은 아닌가, 그들의 선의에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나.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미 다 끝난 문제라고 생각하고 진지한 반성과 성찰 없이 한국에만 맡겨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이번 추도식에서 드러났다.

일본에서는 종종 지난해 우리 정부의 결단을 높게 평가하며, 우리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말들이 들려오곤 한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의 관계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가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함께 손을 잡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교의 기본은 상대국과 상대 국민의 마음을 얻어 자국의 이익을 보다 높이는 데 있다. 일본은 한국의 마음을 얻고 있는가. 일본은 한국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일본은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쳤고, 일본의 성의에 기대했던 한국은 또 한 번 실망했다. 우리의 대일외교전략의 점검, 그리고 일본의 전향적 자세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부디 이번 사태가 현재의 불안정한 양국 관계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길 바란다.

 
* 본 글은 11월 27일자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매일경제] 돌아온 트럼프, 위기의 중동

트럼프 1기 시절 중동정책은
좌충우돌 외교안보기행 넘쳐
현재 정책도 딜레마 연속인데
정작 트럼프는 별 관심 없어
중동 내 혼란 더욱 커질 우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돌아왔다. 트럼프 1기 시절 중동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지불 능력만을 중시하는 동맹관, 폭탄선언에 가까운 충동적 결정, 후속 조치도 없는 기존 정책 폐기의 연속이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위반, 이란 핵 다자 합의 전격 파기, 이란 혁명수비대 최고 사령관 암살, 우방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배제한 탈레반과의 단독 평화협정 체결, 압둘팟타흐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등 권위주의 리더와 기이한 친분 과시를 비롯해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좌충우돌 외교안보 기행이 넘쳤다.

그런 트럼프 후보가 이번 대선 캠페인에서 중동 이슈를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면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전화 한 통으로 전쟁을 당장 끝낼 수도 있다고 호언장담만 할 뿐이었다. 공화당 공식 공약집도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 평화를 추구할 것’ 등 지극히 원론적 내용을 담았다. 트럼프 후보는 대중에게 피로도가 높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대신 인플레이션, 불법 이민 등 조 바이든 정부의 실패를 부각할 수 있는 국내 문제에 집중했다.

사실 미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나온 후보자의 중동 관련 공약은 당선인의 임기가 시작되면 크게 바뀌곤 해서 미리 치밀하게 준비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지역 정세 특성상 취임 이후 역내 상황이 급변하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인권·민주주의의 가치를 부르짖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수준 이하의 ‘왕따’로 불렀으나 재임 시절엔 호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원유 증산과 대러 제재 동참을 부탁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돌변에 차갑게 반응했고 바이든 정부는 탈중동 선언도 뒤집고 역내 안정에 헌신하겠다고 매달렸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08년 대선 캠페인에서 이라크 주둔 ‘우리 아들과 딸’을 당장 데려오겠다고 공약했고 2011년 이를 실천했으나 2014년 급작스레 등장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ISIS에 맞서 다시 이라크 파병을 강행했다.

트럼프 2기의 중동 정책은 역내 변화에 맞춰 모양을 갖춰갈 것이다. 트럼프 후보가 이번 캠페인에서 명확한 중동 공약을 내놓지 않았기에 더 그렇다. 그래도 트럼프만의 색깔이 확연했던 1기 정책을 통해 집권 2기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의 동맹 우방국과 국제사회가 아닌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국내 지지층 결집을 목표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국수적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선동했다. 2기 정부는 입법·사법·행정부까지 장악하고 당선인의 코드에 맞는 충성파로만 내각을 채울 것이라고 선언한 터라 더 강력해진 ‘트럼피즘’을 선보일 것이다. 이란의 핵개발과 역내 프록시 육성,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아랍 걸프 산유국과의 안보협력, 미국의 탈중동 정책 등을 둘러싸고 거래식 외교·신고립주의·보호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것이고 역내 질서는 요동칠 것이다.

현재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여러 딜레마에 빠져 있다. 최고 우방국이자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도우면서도 이스라엘·이란의 전면전 가능성은 없애야 하고, 가자지구와 레바논 남부에서 민간인을 보호하면서도 거기에 뿌리내린 급진 이란 프록시 조직을 소탕해야 하고, 중국을 직접 견제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지역에 힘을 집중하면서도 실망한 중동 동맹 우방국이 중국 편에 서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해야 한다. 이토록 복잡미묘한 과제에 대해 트럼프 당선인과 2기 엘리트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 본 글은 11월 26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