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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재추진 의사 바람직
일본의 소극적 태도에 변화 조짐
시장 확대, 안보동맹 잠재력 기대
정부가 한·일 정상회담에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재추진 의사를 밝힌 것은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다. CPTPP에는 일본·베트남·호주와 영국·캐나다 등 12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지난 정부들도 CPTPP 가입 의사를 밝혔지만, 국내 산업과 농수산업에 끼칠 영향 우려 때문에 가입이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란전쟁에다 보호무역이 강화되고 세계경제가 미·중 진영으로 갈라진 격변의 시대에 중견 무역국인 대한민국이 생존하려면 시장 다변화와 공급망 안정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한 최적의 네트워크가 CPTPP다.
CPTPP는 단순한 대규모 다자 FTA가 아니다. 공급망 협력, 디지털 무역, 국영기업 규율까지 포괄하는 ‘21세기형 통상 규범 체제’다. 가입만으로도 통상 신뢰도가 높아지고, 역내 공급망의 핵심축에 편입되는 효과가 기대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CPTPP에 가입하면 한국 국내총생산(GDP)이 약 0.33~0.35%포인트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연구원은 장기적으로 무역수지가 연평균 1조원 이상 개선될 것으로 예상했다. CPTPP에 가입하면 시장 확대를 넘어 경제안보 기반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CPTPP 가입은 복합적 안보동맹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다. 일본·호주·영국·캐나다 등 미국의 핵심 안보 파트너들이 참여하는 규범 경제권에 들어가는 것은 경제안보 협력을 넘어선 전략적 연대 강화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CPTPP 핵심 공급망 국가로 자리 잡을수록 미국도 한국을 배제하기 어려워지고, 우리 입장에선 대중국 의존 구조를 완화하는 효과도 기대된다. 이러한 다자협력 구도는 한·미 동맹의 결속과 협상력 키우기에도 기여할 것이다.
물론 우려할 대목도 없지 않다. 일본과의 제조업 경쟁 심화, 농축수산물 수입 증가로 인한 농업 피해, 단기 무역수지 악화 가능성이 거론된다. 일본산 자동차 관세 철폐나 농업 생산 감소 전망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CPTPP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산업 경쟁력 격차의 현실이고, 개방을 늦출수록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CPTPP는 위기가 아니라 산업구조 개혁의 촉매가 될 수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이전부터 농업은 줄곧 ‘개방의 희생양’으로 여겨졌다. 이미 시행 중인 농업 보상 정책을 확대해 활용하면 CPTPP 가입이 농정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피해보전직불제는 시장 개방으로 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 하락할 경우 감소분의 일부를 보전함으로써 수입 개방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장치 역할을 한다. 2020년부터 시행 중인 공익직불제는 농업이 환경 보전과 농촌 유지라는 공적 가치를 제공하는 점을 인정하고, 그 기능에 대해 보상하는 제도다. 이는 농사를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 국토 관리와 식량안보라는 공공 서비스로 인정하는 정책적 전환을 의미한다.
여기에 고령 농가 폐업지원 제도를 활용하면 농업 구조 전환의 방향은 더욱 분명해진다. 농지를 떠나는 농가에는 안정적 소득 보전을 지원하고, 남는 농가에는 규모화와 스마트 농업 투자를 통해 경쟁력 제고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정책 수단을 활용한다면 CPTPP는 농업 포기 협정이 아니라 농업의 구조 전환과 경쟁력 강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미 높은 비중으로 진행 중인 공공·군·학교 급식에서 국산 농산물 사용을 확대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CPTPP 가입은 한·일 협력의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다. 그동안 일본은 과거사 갈등을 이유로 한국의 가입에 소극적이었으나 최근 한·일 관계 개선 흐름 속에서 여건이 좋아지고 있다. CPTPP 참여는 한·일 경제협력을 제도화하고, 나아가 한·미·일 협력의 경제적 토대를 공고히 하는 상징성을 지닌다.
러·우전쟁에 이어 이란전쟁까지 터져 지금 세계는 규범과 세력권이 충돌하는 전환기다. 미국은 동맹까지 관세로 압박하고, 중국은 경제력을 지정학적 무기로 사용한다. 개방으로 성장한 한국경제가 보호무역 시대에 다시 번영하려면 더 높은 규범과 더 넓은 시장으로 가야 한다. CPTPP 가입은 선택이 아니라 전략적 필수다.
* 본 글은 4월 9일자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원장
최강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이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국립외교원에서 기획부장과 외교안보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동 연구원에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미주연구부장을 지냈다. 또한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아태안보협력이사회 한국위원회 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한국국방연구원에서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국제군축연구실장,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국방현안팀장 및 한국국방연구 저널 편집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기획부 부장으로서 국가 안보정책 실무를 다루었으며, 4자회담 당시 한국 대표 사절단으로도 참여한 바 있다. 1959년생으로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고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구분야는 군비통제, 위기관리, 북한군사, 다자안보협력, 핵확산방지, 한미동맹 그리고 남북관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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