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출간물
이변은 없었다. 2월 17일 제네바에서 열린 미국과 이란 간 2차 핵협상이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란에 협상 조건으로 핵·탄도미사일 프로그램과 역내 무장 대리세력 지원 중단을 요구했으나 반미·반이스라엘 이슬람혁명 사상 확산을 위해 핵개발도 불사해 온 이란 강경파 지배연합은 응하지 않았다. 협상을 타결해 보려는 온건파의 부단한 노력에도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 이란 최고종교지도자와 측근은 체제 수호 의지를 굽히지 않은 채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현재 중동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미 항모와 미사일 장착 구축함 3척이 전개돼 있고 이들이 탑재한 항공 전력은 90여 대에 이른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최대급 핵추진 항공모함인 제럴드 포드함의 추가 배치까지 공식화하고 협상 결렬 후 열흘 내 진전이 없으면 대이란 군사 대응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크고 아름다운 함대'를 앞세워 최대 화력의 압박에 나선 계기는 1월 초 이란 당국의 반체제 시위 유혈 진압이었다.
2025년 12월 말 테헤란 전통시장에서 촉발된 민생고 시위는 31개 주 전역으로 번지며 다양한 사회 계층이 가세한 대규모 반체제 저항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시위대는 '독재자 하메네이에게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전례 없는 수위로 체제 자체를 부정했고 강경파는 무차별 진압이라는 초강수로 대응했다. 시위는 발발 3주 만에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사망자 수가 최대 3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대 발포를 '레드라인' 위반으로 간주해 무력 응징을 공언하면서도 핵협상을 통한 외교적 해법 역시 지켜보겠다고 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강경파와 핵심 안보 자산을 겨냥한 군사 옵션에 나설 가능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미국을 둘러싼 대내외 환경 또한 이러한 단기 정밀 타격 작전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모습이다. 우선 이란 당국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저격수와 기관단총까지 동원해 살상극을 벌이자 유럽 주요국과 국제기구들은 책임 규명과 추가 제재를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 1월 29일 유럽연합은 이란 강경파의 핵심 조직이자 유혈 진압에 앞장선 혁명수비대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아울러 이란 정권 엘리트 내부에서는 학살에 가까운 폭력을 자행한 하메네이 체제를 두고 불신과 회의, 이탈이 감지되고 있다. 더욱이 작년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이란의 군사 인프라는 물론 대리조직 연대인 '저항의 축'도 크게 약화했다.
나아가 트럼프 2기 정부는 1월 초 베네수엘라 개입 성공을 발판 삼아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주도의 개입주의 노선에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니콜라스 마두로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전격 체포 이후 중동의 반미 산유국인 이란의 정권 교체 가능성도 자연스레 부상해왔다. 제재를 우회한 이란산 석유가 중국으로 계속 유입되는 현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매우 불편하다. 동시에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러시아·중국제 방공망을 무력화한 전례는 유사한 체계를 운용 중인 이란 역시 중·러 연대로 안전 보장이 어렵다는 걸 시사한다.
무엇보다 미국이 이스라엘과 공조해 시아파 맹주 이란의 수뇌부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경우 중동 안보 구도의 근본적 재편을 촉발할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양 축으로 중동 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구상을 실현하고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어느 미국 행정부도 이루지 못한 외교안보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겐 외면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절묘한 역사적 기회의 창이 열리는 셈이다.
* 본 글은 2월 25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수석연구위원, 센터장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자 지역연구센터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 법무부, 국방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주의와 독재,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대표 저서로 중동정치를 비교분석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 (Palgrave Macmillan 2013), 논문으로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정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전망” (아산이슈브리프 2022),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
view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