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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제는 한국판 '할슈타인 독트린'이 필요하다

작성자
심상민
조회
41
작성일
26-01-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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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기본은 선린과 협력을 위한 대화와 협상이다. 하지만 때로는 단호한 경고 메시지 표명도 필요하다. 북·중·러 권위주의 연대가 강화되는 안보 환경 속에서 남북 분단을 이용해 이익만 챙기려는 국가들에는 한국판 ’할슈타인 독트린’의 적용을 고려해야 한다.

 

1955년 서독이 채택한 이 독트린은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단절한다는 선언이었다.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부가 서독임을 분명히 하는 전략이었다. 이 독트린은 논쟁적이었고 완벽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중립을 가장한 기회주의적 외교에 일침을 가하는 효과가 있었다. 동서독 간 확실한 국력 격차를 바탕으로 추진되면서 다른 국가들의 선택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한국도 과거 ‘할슈타인 독트린’과 유사한 정책을 채택했지만 1973년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통해 이를 철회하고 남북 동시 수교를 수용했다. 데탕트 흐름과 남북 간 경제력 역전을 바탕으로 한 이 선택은 한반도 긴장 관리 차원에서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북한은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여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게다가 핵보유국을 자처하며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뿐 아니라 전술핵을 앞세워 한국을 핵 인질 상태로 만들고 있다. 핵을 통해 ‘영토완정(領土完整)’을 이루겠다는 김정은 정권의 야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북한 정권에 정치적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남북 동시 수교국은 한국으로부터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도 북한 정권에 정치적 정당성을 제공해주고 있다. 2025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행사에 대표단을 보낸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는 우리의 공적개발원조(ODA) 수혜국이자 수백억 달러 규모의 교역 상대국이다. 이들은 핵무기와 인권 탄압, 국제 규범 위반으로 점철된 정권에 정치외교적 산소를 공급하고 전형적 ‘양다리 외교’를 펼치고 있다. 특히 KF-21 차세대 전투기 공동 개발 사업 파트너인 인도네시아가 북한과 기술 협력 양해각서에 서명한 것은 명백한 안보 리스크다.

 

사정이 이렇다면 남북 동시 수교를 전제로 한 기존 외교 정책은 재고돼야 한다. 우리는 한동안 남북 동시 수교국의 선택은 주권 사항이라며 수수방관해 왔다. 그러나 이들이 핵무장을 기정사실화하고 한국을 적대시하는 북한 정권과 정치적으로 연대하거나 협력한다면 묵과할 수 없다. 북한의 노골적 후원자인 러시아와 중국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행사할 외교 수단이 있는 국가들에는 확고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이런 메시지의 간명한 표현이 한국판 ‘할슈타인 독트린’이다. 남북 동시 수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협력의 기조는 유지하되, 정치적·군사적 함의가 있는 사안에서 이중적·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국가들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묻는 외교다. 한국과의 시장·자본·기술·안보 협력이 결코 ‘공짜 점심’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외교적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인식되면 국제적 약탈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는 올바른 원칙 위에서만 작동한다. 우리가 기여한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비하이자 자해행위다. 남북 분단을 이용하고 핵심 안보 이익을 훼손하는 국가들에 대해 단호히 “No”라고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판 ‘할슈타인 독트린’이 필요한 이유다.

 

 

* 본 글은 111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심상민

선임연구위원

심상민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서울대학교 사법학과를 나왔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서 국제법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한국 전력산업에서의 기후변화 법-정책 문제를 연구주제로 하여 법학박사학위(JSD)를 취득하였고, 미국 환경법연구소(ELI) 방문연구원,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조교수,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카이스트 녹색성장지속가능대학원 초빙교수를 역임하였다. 국제법 강의 외에 다양한 국제법 이슈에 관해 연구 및 정부 자문을 행하고 있으며, 특히 핵비확산·북핵 문제, 해양법, 북한인권, 국가책임, 기후변화, 그리고 비전통안보 현안(환경, 에너지, 경제, 인간안보)을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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