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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없는 세계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트럼프 2기 정부는 11월 말 국가안보전략서(National Security Strategy·이하 NSS)를 발표하며 향후 미국이 어떤 세계관을 바탕으로 행동할지, 명확히 밝혔다. 이 문서의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다. 미국은 더 이상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공재 제공국’이 아니며, 국제 문제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세계의 경찰보다 미국 우선주의가 중요
냉전 이후 외교 엘리트가 전 세계를 상시 지배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이라 자임했지만, 이제는 오직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활동에만 관심을 두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 이익을 중심으로 행동하며, 동맹 역시 미국 부담을 덜어주는 도구가 돼야 한다. 이 변화는 오랫동안 안보를 한미 동맹에 의존해 온 한국에는 본질적이고도 구조적인 도전이다.
트럼프 2기 정부가 시작되면서 미국이 자국 이익을 우선하는 현실주의적 전략으로 전환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미국의 제조업 기반은 약화했고, 국가 부채는 사상 최대 수준에 도달했다. 특히 중동 지역에서 20년이나 대테러 전쟁을 벌이면서 미국은 국력을 심각하게 소진하고 많은 전사자를 기록했다. 국내 정치 분열과 내부적 피로감은 ‘왜 미국이 세계의 경찰로 남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미국 사회의 주류 의제로 끌어올렸다. 트럼프는 바로 이 정서를 정치 의제로 바꿨다.
하늘을 짊어지는 벌을 받았던 ‘아틀라스’ 처럼 미국이 더 이상 세계 안보를 떠받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한국과 일본 같은 부유한 동맹국이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미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는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고 산업 역량을 잠식하는 중국에 대응하여 제조업 기반을 다짐으로써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트럼프는 말한다. NSS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계관이 일시적인 정치 레토릭이 아니라 미국 전략의 근간이 됐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먼로주의 귀환
이 전략의 핵심 배경은 ‘현대판 먼로주의’ 다. 많은 이가 먼로주의를 고립주의와 혼동하지만, 원래 먼로주의란 혼란스러운 구유럽으로부터 신대륙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 전략이었다. 유럽이 구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라틴아메리카 재식민화를 시도하자,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은 1823년 의회 연두교서를 통해 유럽 개입을 봉쇄하며 서반구에 대한 독자적 영향력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오늘의 미국도 같다. 트럼프 시각에서 유럽은 다자주의와 다문화주의에 매몰돼 경제적 활력을 잃고, 저출산과 이민 문제로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문명적 말살’ 사례로 보인다. 트럼프에게 유럽은 DEI(다양성·형평성· 포용성)에 매몰된 민주당처럼 보일 뿐이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유럽이 자력으로 안보를 책임지지 못한 채 미국에 안보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는 불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NSS는 유럽과 전략적 디커플링을 암시하고 있다.
중동과 아프리카도 더 이상 미국에 전략적 최우선 지역이 아니다. 셰일 혁명을 바탕으로 한 에너지 독립,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재편된 글로벌 공급망 구조, 중동 지역 내 국가 간 역학 변화 등이 겹치면서 미국이 개입할 이유는 더 줄었다. 미국은 더 이상 중동의 세력 균형을 책임지는 국가가 아니다. NSS는 이 지역을 ‘우선적 개입 지역’에서 사실상 제외했다.
반면 미국이 가장 관심을 두는 지역은 서반구다.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중국· 러시아 같은 역외 세력 진입으로부터 차단하는 데 전략적 자원을 집중할 것임을 밝혔다. 이는 단순한 지역적 우선순위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전략 중심축이 ‘자국 인접 안정화’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미국이 유럽·중동·아프리카에서는 비용 대비 분명한 이익이 있을 때만 선택적 개입을 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인·태 지역에서의 방향성
그렇다면 인도·태평양(이하 인·태) 지역은 어떻게 되는 가. NSS의 문장이 길지 않지만, 의미는 분명하다. 미국에 인·태 전략의 목적은 단 하나, 중국 부상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론은 조 바이든 시절과 크게 다르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강조하며 대만 유사시 개입 의지를 반복적으로 천명했다.
반면 트럼프는 중국을 ‘경제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군사적 억제의 최전선을 한국과 일본에 맡기려 한다. 미국은 인·태 지역에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겠다고 하지만, 그 유지 비용을 한국과 일본이 상당 부분 떠안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숨기지 않는다. 중국의 군사 위협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제1도련선에서 막도록 하는 것이 인·태 전략의 핵심이다. 따라서 NSS에는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한일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미국이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원잠) 보유 가능성을 사실상 용인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원잠은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필요한 장기적 핵심 전력이며, 한국의 원잠 보유는 미 해군 부담을 일정 부분 분산하는 효과가 있다. 미국이 갑자기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해 원잠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전진 방어 거점’으로서 한국을 활용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북한이다. NSS에서 북핵 억제, 비핵화, 위협 평가 등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미국의 전략적 관심이 중국에 집중되면서, 북한은 중국 전략의 하위 항목으로 밀린 셈이다. 이는 한국으로서는 심각한 신호다. 미국이 동맹 방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핵 억제의 책임을 우리가 스스로 지라는 메시지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선택은?
한국은 핵 억제력을 가진 나라가 아니다. 결국 미국의 확장 억제와 동맹 구조에 기대야 하는데, 미국이 점점 책임을 줄이겠다는 상황에서 한국의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북·중·러 삼각 연대가 강화되는 현재의 전략 환경 속에서 북핵억제는 명백히 중국 억제의 필수 요소다. 따라서 한국은 우선 미국의 정책 방향성에 더욱 큰 영향을 미쳐야 한다. 북핵 억제가 한반도 문제뿐만 아니라 미·중 전략 경쟁의 핵심 요소임을 미국에 강하게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향후 발표될 미 국방 전략, 합참 군사전략에 북한 억제를 명시적으로 포함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비관할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번 NSS는 한국에 새로운 전략적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다. 미국이 유럽과 중동의 부담을 떼어내고 인·태로 중심을 옮긴 것은 이 지역에서 한국과 일본 역할을 전제로 한 결정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국을 단순한 주변국이 아닌 주요 전략 플레이어로 인정한 셈이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하면, 미국은 한국을 지역 열강의 말석으로 포함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역할을 기회로 만들 준비가 돼 있느냐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미국이 물러나는 공간을 능동적으로 채워야 한다. 우리 안보를 스스로 설계하고, 동맹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며, 필요한 능력을 과감하게 갖춰야 한다. 동맹을 기대는 대상이 아니라 활용하는 대상으로 바꿔야 한다. 북·중·러가 함께 움직이는 전략 환경 속에서, 이제 한국은 단순한 변수나 피해자가 아니라 행위자가 돼야 한다.
NSS가 보여준 세계는 냉혹하다. 그러나 그 냉혹함 속에는 새로운 전략적 기회가 있다. 선택과 행동은 이제 우리 몫이다.
* 본 글은 12월 15일자 이코노미조선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연구위원, 실장
양욱 박사는 군사전략과 무기체계 전문가로서 20여년간 방산업계와 민간군사기업 등에서 활동해왔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군사기업 중 하나였던 인텔엣지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운용했다. 회사를 떠난 이후에는 TV와 뉴스매체를 통해 다양한 군사이슈와 국제분쟁 등을 해설해왔으며, 무기체계와 군사사에 관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국방대학교에서 군사전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국방안보포럼의 연구위원이자 WMD 센터장으로 북한의 군사전략과 WMD 무기체계를 분석해왔고,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국가안보실, 국방부, 합참, 방사청, 육/해/공군 등의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해왔다. 현재는 북한의 군사동향과 현대전쟁에 관한 연구를 계속 중으로, 한남대학교 국방전략대학원,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군사혁신론과 현대전쟁연구 등을 강의하며 각 군과 정부에 자문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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