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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자유, 주권, 상호존중 등 익숙했던 가치들이 부정당하는 현상을 목격해 왔다. 국제질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을 통해 서반구에 힘을 집중하고, 인도·태평양이나 유럽 지역에서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팽창과 타협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면서 더욱 짙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런 격변 속에서는 한·미동맹 못지않게 다른 주변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실용적이므로 우리의 가치나 지향을 너무 뚜렷이 드러내지 않는 ‘균형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기존 국제질서의 단순한 소비자에 불과했고, 누가 새로운 국제질서를 주도하든 우리의 이익만을 취하면 그만인 것일까. 질서의 혼란 과정에서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하면 우리의 이익은 보장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20세기에 들어 우리에게 이식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우리에게 체화된 권력분립, 대의민주주의, 개인 권리와 인권에 대한 존중 등의 덕목이 희석된 세계에 우리는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자신들이 만들려는 세계가 더 다자적이고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측들의 논거에서는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 사상가인 알렉산드르 두긴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더 큰 영향권 안에 포함되어야 하는 ‘변경(border land)’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근대 주권의 원칙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한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했다. 중국은 ‘중국몽(中国夢)’을 통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룰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남중국해, 동중국해, 우리의 서해 등 곳곳에서 보여주는 행태는 그들의 부흥이 다른 국가들에 대한 존중과 평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앞의 의문에 대한 자문자답은 우리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변화하고 있는(더 정확히는 변화하고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힘의 균형을 받아들이고 그에 순응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하고픈 이들도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현실주의라기보다는 기회주의에 가깝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와 정체성을 외면하면 할수록 미래는 더 불안하고 불투명해질 것이고, 이는 오히려 비현실주의적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방향을 놓고 유럽연합(EU) 국가들과 미국 간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국가별 대응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호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포괄적인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중 비교적 작은 나라인 발틱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현행 국제질서에 대해 유럽도 지분과 책임성(accountability)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강대국 정치와 빈부격차 등 국제질서에는 비판의 소지도 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이상적 가치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것 때문이지, 질서를 대체하려는 측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로 향하는 실용외교’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흔들리는 국제질서에 대한 우리의 책임의식도 표명되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 근현대사는 지금의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독립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향한 고난과 열망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위기의 시대에 가치를 공유하는 유사입장국(like-minded countries)과의 연대와 결속, 그리고 흔들리는 동맹을 각성시키기 위한 중견국 한국의 노력은 오히려 더 강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 본 글은 12월 15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부원장, 수석연구위원, 센터장
차두현 부원장은 북한 문제 전문가로서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 정치·군사, 한·미 동맹관계, 국가위기관리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실적을 쌓아왔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2005~2006), 대통령실 위기정보상황팀장(2008), 한국국방연구원 북한연구실장(2009)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의 교류·협력 이사를 지냈으며(2011~2014) 경기도 외교정책자문관(2015~2018),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2015~2017),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2017~2019)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겸 수석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객원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국제관계분야의 다양한 부문에 대한 연구보고서 및 저서 100여건이 있으며, 정부 여러 부처에 자문을 제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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