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는 2024년 아시아전략TF(Asia Strategy Taskforce)를 신설하고 한국을 우선 협력 대상국 중 하나로 선정했다. 유럽의회 의원은 한국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공급망실사법 등에서 협력하는 데 큰 관심이 있다.” 

2025년 10월 14일(현지시각) 브뤼셀 유럽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세자르 루에나(César Luena) 유럽의회 의원은 유럽과 한국의 협력에 대해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브뤼셀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였다. “한국과 유럽이 지금 다시 손잡을 때가 왔다.” 미국이 공세적 관세정책으로 회귀하고, 중국이 여기에 거칠게 대응하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유럽은 ‘신뢰할 수 있는 경제 파트너’를 찾고 있다. 바로 한국이다.

한국과 유럽, 보완적 파트너이자 동반자로

유럽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약 20년 전인 2006년 자유무역협정(FTA) 대상국으로 한국을 처음 고려한 후 지금 한국을 바라보는 유럽연합(EU)의 시선은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무역과 투자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그리고 안보 영역을 넘어 양자적 협력과 다자 차원에서 협력 파트너로 유럽에서 한국의 위상은 공고해지고 있다.

EU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7.5%, 인구 4억5000만 명을 거느린 거대한 경제권이다. 하지만 대외 의존도가 60%를 넘는 구조적 약점을 안고 있다. 한국은 세계 13위 경제 대국이자 기술혁신 1위 국가지만,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하며 수출의 25%가 반도체 한 품목에 집중되어 있어 역시나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 첨단 기술과 경제 안보가 경제 발전에 핵심적인 요소가 된 지금, 이 두 개방경제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보완적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어느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야 할까.

녹색 기술 협력, 산업 전환 동반자로

EU와 한국의 공통된 화두는 ‘탈탄소와 기술 주권’이다. EU는 2035년 내연기관 퇴출을, 한국도 2018년 대비 2030년 탄소 배출량 40% 감축이라는 매우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EU는 중후장대 산업의 감축 속도가 여전히 더디고, 빠른 신재생에너지로 전환이 오히려 에너지 안보에 위협을 가져온다는 반성도 있다. 한국은 여전히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2024년 기준 93%에 달한다.

이 간극을 메우는 하나의 중요한 해법은 ‘공동의 녹색 가치 사슬(Green Value Chain)’ 을 구축하는 것이다. 예컨대 양국 간에 청정 수소 인증제를 공동으로 구축한다.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호주에서 그린 암모니아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EU는 CBAM으로 저탄소 수소 수입을 확대하고 있다. 만약 양측이 공동 인증 체계를 만들어 수소와 암모니아의 탄소 집약도를 상호 인정한다면, 녹색 가치 사슬 구축의 선두에 설 것이다.

또 철강 분야에서는 차세대 철강으로 빠른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녹색철강라벨(Green Steel Label)’을 선제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 볼 수 있다. 한국과 독일 그리고 스웨덴의 철강 관련 회사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수소환원철 공정에 대해 공동의 청정 철강 인증 체계를 구축하고, 공공 조달에서 우대하는 조치를 취하면 탈탄소 산업의 시장 기반이 빠르게 생길 것이다.

아울러 탄소 저장을 확대하기 위해 북해와 동해에서 탄소 포집·저장(CCS) 협력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동해가스전에서 이산화탄소(CO₂) 저장 실증을 진행 중이며 EU는 북해 지역에 대규모 CCS 허브를 조성하고 있다. 양측이 공동 연구, 인증과 운송 규범을 정립하면, CCS는 탄소 감축의 실질적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런 협력은 단순한 기술 교류가 아니라, 산업 전환의 제도적 연합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디지털과 과학 혁신, 신뢰 기반 기술 동맹으로 자리 잡아야

세계경제의 30% 이상이 디지털 영역에서 창출되고 있다. 한국은 GDP의 35%, EU는 약 20%가 디지털 경제에서 나온다. 그러나 아직 양측 사이에는 포괄적 디지털 무역협정도, 데이터 자유 이동 체계도 완성되지 않았다. 디지털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한·EU 디지털 거버넌스 대화체’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 기존 협의체를 고위급으로 격상시켜 인공지능(AI), 사이버 보안, 데이터 윤리까지 포괄하도록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AI 윤리와 감독의 공동 기준을 정해야 한다. EU의 ‘AI Act’와 한국의 ‘AI 윤리헌장’을 연계해 위험 분류, 투명성, 감독 기구 등을 공동 설계하면 신뢰 기반 AI의 글로벌 표준을 선도할 수 있다. 또 데이터 흐름의 상호 인정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의 개인정보보호법과 EU의 일반 개인정보보호법(GDPR) 간 상호 적합성을 유지하면서 데이터의 교차 이전을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공동 연구도 중요하다. EU의 955억유로(약 158조원) 규모의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 프로그램에 한국이 2025년부터 연합 참여국으로 합류함에따라 공동 연구와 스타트업 공동 펀드 조성이 가능해졌다. 기존 차세대 반도체 공동 연구를 넘어서 양자 기술, 기후 테크, 헬스 테크 분야에서도 공동 펀드를 조성하면, 한국과 EU는 미·중 경쟁 사이에서 규범형 혁신 동맹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인적·글로벌 연대,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 토대 마련해야

EU와 한국은 모두 급속한 고령화와 인력 부족이라는 구조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EU는 2030년까지 2000만 명의 숙련 노동자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되고 한국은 생산 가능 인구가 2050년까지 35%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순환형 인재 이동(Circular Mobility)이 필요하다. 핵심 과학 분야 인재의 상호 인력 교류를 체계화하는 한·EU 스킬 모빌리티 파트너십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또한 학위나 자격에 대한 상호 인정과 청년 순환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 예컨대 독일의 ‘Make it in Germany’와 한국의 ‘K-Move’를 연계해 양측 청년이 상호 근무, 재교육 및 재귀환을 경험하도록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적 교류는 단순한 노동 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연대의 경제적 구현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EU의 ‘Global Gateway’와 한국의 ‘글로벌 사우스 전략’을 연계해 아세안·아프리카 공동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양측의 협력은 삼각 협력의 모델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과 EU 협력은 지금이 적기

한국과 EU의 관계는 이제 새로운 도약의 문턱에 있다. 2011년 7월 발효한 FTA로 시작된 첫 번째 단계가 교역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기술, 녹색, 인재 중심의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전환할 때다. EU의 규범적 리더십과 한국의 기술혁신 역량이 결합할 때 우리는 보호주의와 기술 패권의 양극화를 넘어서는 제삼의 축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분절화되는 시대, 신뢰를 자산으로 삼는 국가만이 미래를 선도할 수 있다. 한·EU 협력은 그 첫 번째 시험대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지금이 바로 적기다.  

* 본 글은 이코노미조선 609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