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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은 정상회담을 통해 미중 전략 경쟁이 직접 충돌 수준으로 격화되는 것을 방지하기로 합의했다. 이후에도 미국과 중국은 서로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행보를 이어갔지만, 극단적 무역분쟁이나 공급망 분리(decoupling), 그리고 대만해협 위기 등 군사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국가 간 고도의 상호 의존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환태평양 국가들의 경제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1989년 발족한 APEC의 상징성을 잘 나타낸 사례였다. 10월 31일~11월 1일로 예정된 경주 APEC 정상회의가 강대국 간 각축의 완화와 지역 및 세계의 안정을 다짐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미중 전략 경쟁과 치열한 기싸움
올해 1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직후부터 미중 간에는 치열한 관세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5월 들어 미국과 중국이 관세 부과 공방을 90일간 유예하고 상호 관세율을 획기적으로 낮추기로 합의한 데 이어, 8월 이러한 휴전 상태가 다시 90일 연장됨으로써 10월 말의 APEC 회의를 기점으로 양자 간 모종의 합의가 도출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했다. 그러나 10월 9일 중국 정부가 희토류 및 배터리 등 주요 소재 및 기술에 대한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유예가 종료되는 11월 1일부터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10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나섬으로써 미중 간 대립은 다시 격화됐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중국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면 세계는 결국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 중국은 대화의 여지는 열려 있지만 자신들의 조치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맞섰다.
미중 간 관세전쟁으로 나타난 전략 경쟁이 단기간 내에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고, 현재 진행되는 공방은 기싸움의 성격이 강하다. 2018~2020년 진행된 제1차 무역전쟁을 통해 양측이 확인한 것은 이미 상당 수준 진행된 상호 의존으로 인해 완전한 단절에는 한계가 있고, 미국과 중국 양측 모두 상대를 완전히 무릎 꿇릴 만한 결정적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미중 간의 전략 경쟁이 적당한 상호 영향권의 분배, 그리고 국제적 분업체계의 복원과 같은 타협책을 찾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와 시진핑 집권 3기 체제하에서는 더욱 그렇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많은 이들이 ‘고립주의’로 묘사하지만, 이는 미국 패권 혹은 지도적 위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더는 ‘세계경찰’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뿐,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포기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해 온 정치·경제적 국제질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미국이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바라는 것은 이러한 질서와 규칙 내에서 미국은 예외적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다. 동맹과 우방국들에 대해서까지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국제질서 유지에 대한 부담 분담 압력을 가하면서 미국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지위에 다른 세력이 도전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2000년 ‘하트-러드맨 이사회’(The US Commission on National Security, Hart-Rudman Committee)를 비롯한 여러 범정부 단체들이 21세기에도 미국의 사활적 이익으로 지목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위상을 뒷받침하는 미국의 헌법 질서 및 여타 핵심적 강점(교육, 산업, 과학·기술)의 유지”였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에 충실한 자기 특유의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각에서 이러한 미국의 우월적 지위에 도전하는 대표 세력이 바로 중국이다. 러시아 같은 경우 경제 역량이나 발전 잠재력이 미국을 넘어서기에는 한계가 있고, 그 영향권 역시 유라시아 일부로 국한될 수 있다. 또한 러시아를 끌어들여 G8 체제를 부활한다면 냉전시대 미중 핑퐁외교와는 반대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는 계산도 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셔티브를 통해 인도-태평양 지역을 넘어 유럽과 중동·아프리카 지역으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 베이징은 자신들의 야심을 실현할 만한 경제력과 시장 장악력, 부존자원, 주요 핵심기술 추격 능력, 그리고 국제기구에서의 발언권까지 갖고 있다. 중국을 기존 국제질서를 전복하려는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중국 체제 문제를 가장 먼저 거론한 게 바로 트럼프 1기 행정부다.
시진핑 입장에서도 미중 전략 경쟁에서 후퇴나 양보는 선택하기 힘들다. 경제성장의 둔화와 이로 인한 국내의 불안과 불만을 고려할 때, 이러한 선택은 시진핑의 권력 기반 더 나아가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급망이나 무역 부분에서의 양보는 결국 중국 굴기(屈起)의 핵심 요소였던 경제력 약화로 이어질 위험성이 크다. 더구나 트럼프 1기 행정부하에서의 줄다리기 경험, 2010년대부터 이어져 온 과학기술과 군사 능력의 추격 추세 역시 이제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려가 결국 미중 관세전쟁에서 강 대 강 대응을 이끌었고, 9월 ‘전승절’ 행사에서 사실상 반미·반서방 연대의 중심에 서겠다고 천명한 동력이 됐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중국은 이번 APEC에서 ‘표정 관리’ 수준의 결과에 만족할 공산이 크다. 이면에 내재한 상호 불신과 대결 심리는 APEC 이후에도 쉽게 해소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新냉전도 다극화도 아닌, ‘홉스적 세계’ 가능성
미중 전략 경쟁 본격화 이후 많은 이들이 세계가 진영 중심의 신냉전 및 양극화 체제로 들어서는 것 아닌가 하는 논쟁을 계속해 왔다. 러시아는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자신들도 지분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계속 던져왔고, 이러한 구상이 성공을 거둔다면 그 결과는 다극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세계는 양극화나 다극화 못지않게 무극화(無極化)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다. 무극화는 ‘세력의 화합’이라는 긍정적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홉스(Thomas Hobbes)가 지적한 약육강식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식 세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표방하고 있으나, 현행 정책이 이를 실현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그렇게 ‘위대해진’ 미국의 위상을 다른 국가들이 인정할지도 의문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얻을지 모르지만, 중동 및 기타 지역에서 영향력이 축소될 위험에 처해 있고, 중국 역시 국내 상황과 시진핑 체제의 불투명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으며, 대만 문제에 대해서도 강성 일변도의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시진핑이 ‘전승절’ 열병식에서 주장한 ‘평화’를 내세운 반미·반서방 연대가 여타 국가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을지는 의문이다. 그동안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 사이에서 선별적 협력을 추구해 온 인도의 모디 총리조차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는 참석했지만, 열병식 사열대에 시진핑과 함께 서는 것을 피했다.
신뢰할 만한 국제질서 주도국이 없는 상황에서 혼란이 불러올 가장 큰 특징은 강대국 일방주의와 강대국 간 거래 위주 국제 문제 해결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동맹·우방국들에 대해서도 거래의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강대국 간에는 항상 타협이 가능한 여지를 남겼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추구하면서 침공을 당한 우방을 보호하기보다 방기했다는 비판을 초래했다. 중국 역시 올해 8월 스카버러 암초 인근에서 나타난 필리핀 경비정 위협 사건에서 나타난 것처럼 타국에 대한 압력과 위협을 계속하며 중국의 정책 노선에 부합하지 않는 국가들을 은근히 압박하는 일방주의의 전형을 보였다. 러시아는 강대국 일방주의가 극단적으로 나타날 경우 타국에 대한 주권 침해와 침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강대국 일방주의는 자연스럽게 조정자의 부재로 이어진다. 국제연합(UN)은 국제질서의 중심축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강대국 정치의 통로가 돼버린 지 오래고, 중견국 역시 국제관계에서 과거와 같은 무게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집단적 발언권 강화를 위한 연대 역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다.
쉽지 않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 그리고 한국의 고민
경주 APEC 정상회의를 통해 외형적으로는 국제적 상호 의존과 공동 번영의 정신을 다시 강조한다 하더라도, 세계적 혼란의 시대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정책 방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남북 관계만을 개선하면 지역이나 국제 차원의 이슈 해결도 더 쉬워질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에서 벗어나 한반도를 뛰어넘어 지역과 국제사회의 눈높이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시각을 강화해야 한다. 경주 APEC을 계기로 전격적인 북·미 협상(정상회담) 등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결정적 전환점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일부의 기대가 존재하지만, 철저히 세계적 전략 경쟁 관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석하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여타 강대국의 시각에서 여전히 남북 관계의 진전이나 한반도 평화는 부차적 문제에 불과하다. 오히려 강대국 간 거래로 북·미 협상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 약화, 북한 핵능력의 기정사실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강화 등 부정적 대차대조표를 우리에게 던져둘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 강대국 간 거래의 관행을 오히려 활용하는 방안 역시 강구해야 하는데, 결국 신뢰성이 입증된 파트너와 협력 강화를 의미한다. 이재명 대통령도 8월 미국 방문 기간 중 이제는 더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는 기계적 균형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토로했다. 트럼프 행정부 역시 일정 시점에서는 정책 조정이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파트너 및 동맹과 협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려면 확실한 거래가 가능한 강대국 하나를 분명히 확보해 놓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결코 굴욕적인 타협이 아니다.
셋째, 단순한 자주나 굴종, 혹은 평화와 전쟁의 이분법을 벗어나 무엇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루어낸 우리의 정체성과 부합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지역 및 국제적 차원의 위상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일본, EU 국가 등 우리와 유사입장국(like-minded countries)과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이를 통해 ‘적대적 두 국가 관계’의 완고한 틀 속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변화를 점진적이지만 끈기 있게 이끌어내야 한다.
* 본 글은 10월 29일자 신동아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부원장, 수석연구위원, 센터장
차두현 부원장은 북한 문제 전문가로서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 정치·군사, 한·미 동맹관계, 국가위기관리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실적을 쌓아왔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2005~2006), 대통령실 위기정보상황팀장(2008), 한국국방연구원 북한연구실장(2009)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의 교류·협력 이사를 지냈으며(2011~2014) 경기도 외교정책자문관(2015~2018),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2015~2017),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2017~2019)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겸 수석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객원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국제관계분야의 다양한 부문에 대한 연구보고서 및 저서 100여건이 있으며, 정부 여러 부처에 자문을 제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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