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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0일 트럼프 2기가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세계 전략을 펼쳐 왔다. 하나는 미국-유럽을 연결하는 나토 축, 또 하나는 미국과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축이었다. 냉전 때에는 공산주의 세력들을, 냉전 후에는 권위주의 세력들을 유럽과 동아시아 양쪽에서 포위하는 일종의 학익진(鶴翼陣)이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축이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러한 동맹의 축을 이끌며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유지해 온 미국의 리더십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지난 80년간 미국이 리더십을 발휘해온 동안 미국은 손해만 보았고 동맹들은 무임승차하며 이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미국의 단기적 경제 이익 추구에 쏠려있다. 그리고 미국은 중국 억제에만 집중할테니 동맹들은 스스로의 안보를 알아서 챙기라는 생각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3월 29일 발췌해 보도한 미국의 ‘잠정국방전략지침’에도 그 생각이 드러나 있다.
이것은 유럽, 한국, 일본에 큰 충격이다. 유럽의 경우, 국방비를 증액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유럽에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다. 그 후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미국이 유럽의 안보에 더 이상 관심이 없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핵 공유를 고려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유럽이 자체 방어력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브렉시트로 서먹해졌던 영국-프랑스 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졌다. 두 나라가 나토의 개혁과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과 한·일 두 동맹국 간의 관계도 이전보다 불안해졌다. 양국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전략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첫째, 지난 9월 베이징 전승절 행사에서 보았듯이 핵을 가진 북·중·러 세 권위주의 국가 간 협력은 강화되는 추세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일 3자 협력 체제의 필요성에 대해 미온적이다. 확고한 지지 의사도 표명하지 않았다. 수차에 걸친 외교장관회의가 있었고, 전임 바이든 정부 때 합의한 협력 메커니즘이 유지되고는 있지만 그때만큼의 정치적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이 애매모호하게 발을 빼는 자세로 나오면 비핵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핵을 가진 북·중·러의 연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과연 핵우산은 제공해줄까?
둘째, 향후 미·북 간에 협상이 재개된다면 한반도의 긴장 해소를 위해 바람직하다. 그러나 만일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 입장에 서서 비핵화 대신 군비통제 관점에서 접근하고, 단거리나 중거리 미사일 위협은 소홀히 한 채 대륙간탄도미사일 제거에만 집중한다면? 그 경우 한국과 일본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여전히 노출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손 놓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힘을 합쳐 공동으로 대책을 강구해야 할까?
셋째, 지금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은 중국과의 대결 정책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주의자이다. 어느 순간, 대결보다는 대타협의 길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미국 우선주의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동맹의 이익을 희생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과 대타협이 시도된다면 대만의 이익이 희생될 수 있다. ‘잠정국방전략지침’에서 중국이 대륙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겠다고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그것에 상관없이 언제든 중요한 결정을 단독으로 내릴 수 있는 절대 권력자다. 미·중 대타협으로 국제정치가 세력권으로 분할되는 양상이 벌어진다면 한국과 일본의 처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지리적으로 근접한 권위주의 중국의 세력권에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인가?
이런 심각한 전략적 도전 요인들이 한·일 간의 협력 강화를 선택이 아닌 필수로 만들고 있다. 한·일 양국 국민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원한다. 지난해 12월 계엄령 사태 이후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적 지지였다. 그리고 양국은 무역을 중시하기에 항행의 자유와 같은 규범 기반 질서의 유지를 원한다. 만일 대만해협이 봉쇄된다면 양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뜻이 맞는 한·일 양국이 협력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유사한 입장의 국가들을 규합해 연대를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미국의 행보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권위주의 연대에 대처하는 국제적 연대 형성의 길일 것이다. 더 나아가 한·일이 주도하는 아시아판 나토도 가능해질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이유 이외에도 한·일 양국이 협력해야 할 이유는 숱하게 많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에서 보듯 글로벌 공급망 회복력 증강이 시급한 과제다. 반도체, 배터리, AI(인공지능), 바이오 등 핵심 산업 분야에서의 기술 혁신도 양국이 협력하면 더욱 큰 진전이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 대처와 친환경 에너지 전환, 저성장과 인구구조 변화 문제 등도 한·일이 협력해서 풀어나갈 과제들이다.
새로 부임한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한국은 매우 중요한 이웃”이라고 말했다. 다행이다. 한국의 이재명 정부가 그랬듯이, 다카이치 정부도 기시다-이시바 전임 정부들의 한·일 협력 정책 기조를 계승하기 바란다. 그래서 유례없이 불안정한 국제정치 상황의 도전을 양국이 함께 리더십을 발휘하며 돌파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 본 글은 10월 25일자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이사장
윤영관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이자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입니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서울대학교에 임용되기 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3년간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또한 한국미래전략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고, 한반도 평화연구소의 창립 회원이자 이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동아시아 비전그룹 II 공동의장(2011-2012)과 국회의회 외교 자문위원회 위원장(2019-2020)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국제정치경제, 한국 외교정책, 남북관계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