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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학자나 관료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갈등에 관해 얘기할 때면 해결책은 딱히 없다는 답이 돌아오곤 했다. 고통스럽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이·팔 갈등은 '관리'의 대상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스라엘 주변의 급진 세력이 '(요르단) 강에서 (지중해) 바다까지' 자리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들의 위협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억제하는 게 현실적 목표라는 것이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국제사회의 갈등 '해결' 구호에 지친다고도 덧붙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남쪽의 가자지구와 북쪽의 레바논 접경지대를 장악한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소멸을 노리며, 그 자리에 이슬람 국가 수립을 목표로 평화 협정을 거부해왔다. 특히 하마스는 잊을 만하면 로켓과 미사일로 먼저 도발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압도적인 화력으로 보복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군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채워진 하마스의 무기고를 공습해 위협의 싹을 주기적으로 손질했다. '잔디깎기'라고 알려진 갈등 관리 전략이다. 무력 충돌을 피할 순 없지만 그 강도와 시기만큼은 스스로 조절한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2023년 10월 7일,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남부의 키부츠 여러 곳과 뮤직 페스티벌장을 기습 공격해 1200명을 살해하고 250명을 인질로 잡아갔다. 이처럼 많은 유대인이 한꺼번에 희생된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 처음이었다. 키부츠 주민들은 이스라엘 내에서도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적극 지지하며 가자지구 주민들을 고용해 농장 일을 함께하기도 했다. 학살에 가담한 하마스 대원들은 키부츠 내부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기존의 갈등 '관리' 전략을 전격 폐기했다. 새로운 전략은 적의 완전한 파괴를 통한 갈등의 '제거'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군사력을 약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다시는 재건 자체를 꿈꿀 수 없도록 집요하게 공격했다. 먼저 가자지구에서 제2의 독립전쟁을 선언하고 '철의 검' 작전을 시작으로 하마스의 지휘부·무기고·지하터널망을 타격했다. 이 과정에서 '라벤더'라는 인공지능(AI) 기반 표적 식별 시스템을 활용해 하마스 조직원 3만7000명을 분류했고, 표적이 민간 주거지에 있을 때도 타격을 강행했다. 2024년 9월에는 레바논에서 '새로운 질서' 작전을 벌여 헤즈볼라의 거점 140곳을 벙커버스터 폭탄 등으로 공격해 최고 지도자와 핵심 간부진을 제거했다. 모사드가 주도해 헤즈볼라 대원의 무선 호출기 수천 대를 동시에 폭발시킨 비밀 작전 직후였다.
나아가 이스라엘은 프록시 조직의 배후인 이란 본토에까지 작전 범위를 넓혔다. 올 6월 '일어서는 사자' 작전에서 모사드가 치밀하게 구축한 정보망을 기반으로 공군과 사이버 전력을 결합해 이란군 수뇌부와 핵무기 개발 과학자를 대거 암살하고 핵시설과 탄도미사일 인프라를 파괴했다. 이란과 프록시의 반격은 예상을 훨씬 밑돌았고 이스라엘은 더 질주했다. 가자지구의 인도주의 참사, 레바논 민간인 피해, 이란 공격을 둘러싼 국제법 위반 논란 등 국제사회의 비난과 이스라엘의 평판 추락은 부차적 문제인 듯했다.
최악의 실존적 트라우마를 겪은 이스라엘은 더 이상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를 태세다. 이미 입은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때론 무모하리만치 위험을 감수하는 듯하다. 인간 DNA에 깊이 새겨진 손실 회피 심리가 극단적으로 발현된 것 같다. "신이 우리를 택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특유의 자조 섞인 블랙 유머를 나누던 이스라엘인들조차 지금은 적의 철저한 제거라는 경직되고 끈질긴 목표에서 좀처럼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본 글은 7월 22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수석연구위원, 센터장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자 지역연구센터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 법무부, 국방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주의와 독재,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대표 저서로 중동정치를 비교분석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 (Palgrave Macmillan 2013), 논문으로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정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전망” (아산이슈브리프 2022),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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