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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뮌헨에서 확인된 오래된 질서와 유럽의 선택

작성자
김흥종
조회
105
작성일
26-02-1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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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년 전이다. 2025 2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열린 제61차 뮌헨안보회의에서는 당시 취임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의 연설로 인해 유럽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밴스 부통령은 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된 유럽 정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약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설 직후 그는 총선을 불과 열흘 앞둔 독일에서 극우 정당으로 분류되는 독일대안당 대표를 직접 만나 주류 정치 진입을 모색하던 이 정당에 사실상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유럽 지도자들은 충격과 혼란 속에 빠졌다. 이 사건은 20세기를 지배해 온 기존 국제 질서가 마침내 무너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순간이었다.

 

2026 2 14, 다시 뮌헨. 이번에는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같은 연단에 섰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오랜 역사적 유대와 유럽 문명이 미국에 제공한 정치적, 문화적 유산을 강조하며 유럽에 대한 깊은 존중을 표했다. “우리 미국인의 집은 서반구에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유럽의 자식”이라는 그의 발언은 청중의 큰 박수를 받았다.

 

지난 1년 동안 트럼프 2기 행정부를 경험하며 기대 수준이 조정된 탓이었을까. 연설 직후 유럽 지도자들 사이에서 나온 반응은 대체로 “안도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변한 것일까. 그의 발언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공산권의 몰락이라는) 이 승리의 환희는 우리를 위험한 망상으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도달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국가가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리라는 믿음, 무역과 상업이 국가의 역할을 대체할 거라는 믿음, 규칙 기반 세계 질서가 국가 이익을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 국경 없는 세계에서 모두가 세계 시민이 될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이는 인간 본성과 5000년에 걸친 역사적 경험을 무시한 위험한 착각이었습니다.

 

루비오 장관은 지난 80년 동안 서방 세계가 구축해 온 규칙 기반 자유주의 질서, 다자주의, 세계화, 대규모 이민이 오히려 미국과 유럽의 힘을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단언했다. 맹목적인 자유무역과 통제되지 않은 이민을 용인하고, 국제 기구에 주권을 자발적으로 위임했으며, 기후 문제에 대한 이념적 접근에 몰두하는 사이 경쟁국들은 체계적으로 국력을 축적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미국과 유럽이 힘을 합쳐 이러한 전략적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세계관을 명확히 설명하면서 유럽이 강해져야 미국도 강해질 수 있다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 논리도 제시했다. 결국 그가 전달한 메시지는 1년 전 밴스 부통령의 발언이나, 최근 다보스 포럼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입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린란드 문제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대서양 관계의 균열이 우려되던 상황이었기에 그의 연설은 더욱 신중하고 세련된 표현으로 구성돼 있었다. 외교적 수사와 역사적 비유가 어우러진 그의 연설은 형식적으로는 우아하고 절제돼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표현 방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1년을 경험한 유럽 지도자들은 놀랍게도 이제 이러한 메시지를 현실적 전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듯 보였다. 한 미국 언론의 표현처럼 이는 ‘새 병에 담긴 오래된 와인(old wine in a new bottle)’이었지만, 그 와인을 대하는 유럽의 태도는 달라지고 있었다.

 

앞으로 유럽 정치의 향방은 이 메시지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다. 이미 많은 유럽 주류 정당들은 이민 정책에서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전략 산업 보호와 경제 안보를 이유로 보호무역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고 있다. 러시아와의 전쟁 역시 장기 교착 상태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종전을 위한 보다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접근이 힘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유럽 극우 정당들의 정치적 공간을 오히려 좁힐 것이다.

 

루비오 장관의 연설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유럽 지도자들에게 하나의 전략적 질문을 던진 사건이었다. “우리를 비판만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제기한 문제의식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을 것인가.” 그는 대서양 동맹의 미래가 이제 과거의 연속이 아니라 새로운 조건 위에서 재구성되어야 함을 설득하고자 했다. 스스로의 선택을 다시 고민하게 된 유럽은 이제 호응할 것으로 보인다.

 

 

* 본 글은 219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김흥종

객원선임연구위원

김흥종 박사는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협정대책위원회 위원이자,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 겸 대미전략정책본부 경제정책자문팀장이다. 한·러대화(KRD), 법과정책포럼과 금융국제화포럼의 회원이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과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KOPEC) 의장을 지냈다. 또한아시아태평양EU학회(EUSAAP) 회장, 한국EU학회(EUSA-Korea) 회장, 한국APEC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2023년에는 인도 G20 Think20에서 TF 공동의장을 맡았다. 태국개발연구원(TDRI)의 국제자문위원, 세계디지털경제기술정상회의(WDET)의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김 박사의 전문 분야는 세계경제, 통상정책, 경제안보, 지정학 및 지경학, 지역연구 등에 이르며, 오랜 기간 한국 정부의 경제·통상·외교정책 수립 과정에 깊이 관여해 왔다. 주요 활동으로는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 외교부 산하 한중관계미래발전위원회 경제통상분과 위원장, 경제부총리 보좌관, 한-EU FTA 협상자문위원 등을 맡았다. 또한 G20 관련 기획재정부, APEC 및 한국 외교전략 관련 외교부, ASEM 및 브렉시트 대응과 관련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주요 정책 자문을 수행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는 산업통상자원부 정책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김 박사는 WTO, OECD, EU, UN 등 주요 국제기구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왔으며,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의 주요 국제회의 및 민간 포럼에 초청받아 연설을 해왔다. 참여한 주요 포럼에는 미국의 Opinion Leaders Seminar와 한미전략대화, 잘츠부르크 글로벌 세미나(미국/유럽), 중국발전포럼, BOAO 포럼, 인도의 Raisina Dialogue 및 Kautilya 경제포럼, 프랑스의 World Policy Forum, 러시아의 Valdai 포럼, 카타르의 도하포럼, 덴마크의 코펜하겐 민주주의 정상회의, WTO 포럼, EU-아시아 학술회의, 모로코 Atlantic Dialogues, 남아공 Cape Town Conversation, 아르메니아 Yerevan Dialogue, G7 및 G20 연계 Think7/Think20 등이 있다. 김흥종 박사는 UC 버클리에서 풀브라이트 펠로우로 연구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Honorary High Table member로 지냈다. 프랑스 IFRI, 벨기에 VUB, 고려대, 터키의 마르마라대학교 등에서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지금까지 200편 이상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으며, 국내외 언론, 방송, SNS 등을 통해 활발히 발언해 왔다. 서울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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