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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29일 카메룬의 야운데에서 개최된 세계무역기구(WTO) 제14차 각료회의(MC14)는 다자무역 체제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표면적으로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구조적 한계와 방향 전환이 동시에 드러났다.
결론부터 말하면 WTO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포괄적 다자합의 체제로 작동하지 않으며, 선택적 참여와 부분적 규범이 병존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번 회의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전자상거래 무관세 모라토리엄 연장 실패였다. 1998년 이후 전자적 전송물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말자는 이 원칙은 디지털 경제의 글로벌 공공재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일부 개도국의 반대로 모라토리엄 연장이 무산되면서 디지털 무역의 기본 질서가 흔들리게 됐다. 이는 향후 디지털 경제에서 규범 경쟁과 블록화가 더욱 심화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60여 개국이 참여한 전자상거래 협정이 별도로 진전을 보인 점은 의미심장하다.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끼리 규범을 만들어가는 ‘복수국 협정(plurilateral)’이 사실상 WTO의 새로운 작동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산보조금 협상은 제한적이지만 긍정적인 진전을 이뤘다. 불법·비보고·비규제(IUU) 어업을 억제하는 규율이 강화되고 후속 협상이 이어지게 된 점은 환경과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과잉 어획을 유발하는 보조금의 전면 금지라는 핵심 쟁점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았다. 농업 협상 역시 기존의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기대를 모았던 투자원활화협정(IFDA)은 120개국 이상이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국가, 인도의 반대로 WTO 체제 내 편입이 무산됐다. 컨센서스 원칙이 더 이상 합의를 보장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제도 발전을 가로막는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가장 큰 화두였던 WTO 개혁이 사실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분쟁 해결 제도의 핵심인 상소 기구는 여전히 기능이 정지된 상태이고, 규범 형성과 협상 기능 역시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 회의는 WTO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 역할과 방식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다자주의는 명목상 유지되고 있으나 더 이상 단일한 규범 체계를 만들어내는 중심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은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 중요한 전략적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은 더 이상 WTO 다자 체제에만 의존할 수 없음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복수국 간 협정이 확산하는 환경에서는 유사 입장국들과 선택적 연대를 통해 규범 형성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 무역, 공급망, 환경 등 신 통상 의제에서 선도적 역할을 확보하지 못하면 규범 수용자의 위치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디지털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전자상거래 무관세 원칙이 흔들리고 있으므로 주요 교역 상대국들과의 양자 및 지역 협정을 통해 관련 규범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WTO 개혁 논의에서도 한국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 간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제도적 중재자이자 규범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은 단순한 외교적 위상을 넘어 한국 경제의 구조적 안정성과 직결되는 과제다.
돌이켜보면 WTO 각료회의는 한때 세계화에 대한 갈등이 가장 격렬하게 분출되던 현장이었다. 1999년 시애틀 WTO 각료회의가 수만 명의 항의 시위 속에 무산됐고, 2003년 칸쿤 WTO 각료회의에서는 시위 도중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2005년 홍콩 WTO 각료회의에선 한국 농민들이 바다 위에서 격렬한 항의를 벌였다. 당시 WTO는 그만큼 세계 경제 질서의 중심에 있었고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번 각료회의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관심은 WTO 바깥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변화는 쇠락하는 다자무역 체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WTO가 여전히 필요하지만 더 이상 세계 경제통상 질서를 규정하는 유일한 무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이제 한국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과거의 질서에 기대기보다 새로운 질서 형성의 한 축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 본 글은 4월 16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