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브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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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아세안안보포럼 (ASEAN Regional Forum, ARF)이 며칠 전 막을 내렸다. 그 어느 해 ARF 보다 어수선한 회의였다. 회의 직전인 7월 북한이 두 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ICBM) 실험을 했고 그에 따라 회의 기간 내내, 그리고 그 이후까지 여진이 계속됐다. 미국과 북한 사이 서로 위협하는 설전이 지속되었다. ARF를 주도하는 동남아 국가들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중국해 문제는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렸다. 오바마의 아시아 피봇 정책 (pivot to Asia)이 트럼프 (Donald Trump) 당선으로 막을 내린 후 처음 지역 다자안보 무대에 나온 미국의 존재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 아시아 정책, 특히 대 동남아 정책의 취약성을 엿 볼 수 있다.

이번 ARF 회의에서는 북한 문제가 남중국해나 다른 지역 안보 문제보다 전면에 등장했다. 북한 문제의 국제화가 심화되었다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장성명에 나타나듯 북한 문제에 관한 합의 도출 내지 공동 행동은 쉽지 않다. ARF의 특성상 안보 문제를 논의할 수는 있어도 강력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동남아 국가 관계는 2016년 ARF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동남아와 중국 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회복되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이 갈수록 아세안 내, 그리고 ARF 내에서 지역 안보문제에 관한 합의는 어려워지고 서로 다른 입장들을 회의를 통해 개진하고 의장성명은 이를 단순 나열하는데 그친다. 충돌하는 사안에 대해 어떤 의견도 배척하지 않지만 동시에 어떤 의견에도 전적으로 편승하지 않는 아세안 대외관계 특성이 점점 두드러진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ARF 그리고 보다 좁게 아세안에 대한 한국의 접근을 돌아봐야 한다. ARF와 아세안을 통해 우리 의사만 관철시키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아세안 안보 문제나 ARF에서 다루는 지역 전반의 안보 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 우리가 아세안이나 ARF의 안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그들도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 아세안으로부터 안보 문제에 관한 일정한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동남아비핵지대 (Southeast Asian Nuclear Weapon Free Zone, SEANWFZ) 조약과 같은 아세안의 경험에서 한반도 비핵지대화로 가는 아이디어를 찾고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 갈등하던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은 아세안 형성의 경험에서 동북아 협력의 단초를 찾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ARF에 즈음 해서만 우리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동남아 국가들을 찾을 것이 아니라 평소 아세안 국가와 안보 관련 접촉면을 넓혀야 한다. 2017년 ARF에서 확인된 중-아세안 관계 반전은 지난 1년간 중국의 동남아 개별 국가 밀착이 만들어낸 결과다.

 

한반도 문제: 결론 없는 압박과 타협

7월 초부터 시작된 일련의 북한 ICBM 발사로 인해 올해 ARF는 남중국해 문제 보다 북한 문제가 더 큰 이슈가 되었다. ARF 시작 전부터 대부분의 언론은 올해 ARF에서 북한 문제와 남중국해 문제가 최고의 이슈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ARF를 전후로 북한과 미국간의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강력한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7월 4일 첫 번째, 그리고 7월 28일 북한의 두 번째 미사일 발사에 이어 7월 30일 미국은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 (strategic patience)는 끝났다고 선언 했다. ARF 직전에 열린 아세안외교장관회의 (ASEAN Ministers’ Meeting, AMM)는 미국 서부 해안에서 북한 ICBM에 맞대응 하는 미국의 ICBM 발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어 AMM으로부터 ARF가 종료된 8일까지 북한과 미국 사이 긴장은 높아만 갔다. 8월 5일에는 UN 안보리의 대북 추가 제재 안이 발표되었다. 8월 7일에는 UN 추가 제재에 대해서 북한이 수 천 배의 복수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마침내 ARF 마지막 날인 8월 8일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fire and fury) 발언이 나왔다. 그리고 ARF가 종료된 다음날인 9일 북한이 ICBM으로 괌 (Guam) 인근을 타격하겠다는 발언을 하면서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북한 문제: 총론의 합의, 각론의 이견

ARF 회의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 열린 아세안외교장관회의 (ASEAN Ministerial Meeting, AMM)에서도 북한 ICBM 발사와 그에 따른 긴장 고조에 대해서 ARF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가장 먼저 아세안 외교장관들이 AMM 의장성명을 통해서 아세안의 입장을 밝혔다.1 아세안 장관들은 1) 이전 북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에 더해 7월 4일과 28일 북한 ICBM 발사로 인해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2) 이런 긴장 고조가 지역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고 이에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북한이 UN 안보리 결의안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며, 3) 평화적 한반도 비핵화와 긴장완화를 위한 대화 재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한편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에 나타난 한반도 항구적 평화 정착과 이를 위한 남북 관계 개선 의지에도 지지를 보냈다.2

북한의 ICBM 발사와 그에 따른 긴장국면은 ARF에도 영향을 주었고 이번 ARF 의장성명은 이를 반영한 듯 과거에 비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언급이 크게 늘어 났다. 의장 성명 제 9항에 포함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언급을 보면 먼저 아세안외교장관 회의에 등장했던 표현들이 거의 그대로 포함되었는데, 북한 ICBM 발사가 지역 긴장을 높였고, 북한은 UN 안보리 결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특히 7월 4일과 28일이라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날짜가 다시 한번 명확하게 언급되었다. 이 부분까지는 별 이견없이 북한을 제외한 참가국가들 사이에 동의가 일어난 부분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에 의한 위협이나 평화협정 등 북한의 의도를 담은 표현은 명시되지 않았다.

보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 뒤에 따라 나오는 추가적인 부분이다. 여기서부터 “일부 외교장관들은” (some ministers)이라는 표현과 함께 매우 다양한 북한-한반도 문제 관련 언급이 병렬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우선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와 “자제 촉구 및 긴장완화를 위한 대화에 필요한 조건”이다.3 전자의 경우 북한 핵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진 국가들의 견해로 해석이 되고 뒷부분의 경우 중국 및 보다 중립적 국가들의 견해로 해석된다. 여기까지 나타난 내용은 이전 ARF 의장성명에도 종종 포함되었던 부분으로 크게 새로운 부분은 아니다. 뒤이어 몇몇 외교장관의 의견이 더 소개되는데, 인도적 문제에 대한 우려를 언급하며 북한에 의한 납치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북한의 인도적 문제에 대한 우려는 이전 ARF 의장성명에도 있었던 부분이지만 납치자 문제의 경우 좀 색다른 것으로 아마도 일본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의 의사가 반영된 부분도 보인다. 즉, 일부 외교장관들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항구적 평화 (permanent peace) 건설에 대한 지지를 언급했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는 문재인 정부 베를린 구상의 평화체제 건설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남북간 대화를 촉구하는 내용이 ARF 의장성명에 자주 포함되기는 했지만 이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남북한에 주문하는 내용이었던 반면 이번 의장성명에 나타난 표현은 ‘support’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문재인 정부의 구상에 대한 찬성을 명확히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4 다만 이런 문재인 정부의 구상에 대한 찬성이 ARF 회원국 전체의 동의가 아닌 “일부 외교장관” (some ministers)의 지지로 표시된 점은 아쉽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전체 동의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북한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구상에 대한 찬성 및 지지의 내용이 포함된 것은 성과라 할 수 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른바 “쌍중단, 쌍궤병행” (double freeze and simultaneous progress), 그리고 “단계적” (phase-by-phase) 접근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이 최근에 들고 나온 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군사훈련을 함께 중단하고,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협정을 함께 진행하자는 주장과 한국과 미국이 주장하는 단계적 접근이 함께 언급된 것이다. 양측의 서로 다른 견해와 해법이 강하게 부딪혔던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앞선 문장들과 달리 이 부분에서는 “참석자의 주의를 끌었다” (The participants’ attention were called to two proposals)라는 표현이 쓰인 점으로 볼 때 회의에서는 양측의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해서 참가 국가들이 어느 한쪽 편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듯하다.

이상의 검토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간단한 합의 사항을 언급한 이후 참가 국가들의 의견을 병렬적으로 반영한 부분이다. 비핵화에 관한 촉구, 남북대화를 위한 조건 형성, 납북자 문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까지 언급되고 마지막에는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접근법까지 줄줄이 나열되고 있다. 합의에 기반한 것은 아니며 마치 소수의견을 덧붙이는 것처럼 일부 장관들의 의견, 혹은 지지라는 형태로 표현되어 서로 상충되는 의견들을 모두 명시했다.

과거 아세안의 문서들은 모호한 형태로 기술되더라도 가급적이면 합의를 이루려 노력하고 이렇게 합의된 사항들을 담았다. 최근 아세안 관련 문서는 서로 합의되지 못한 사항들을 버리거나 굳이 합의를 하려고 끝까지 노력하지 않고 병렬적으로 담아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충돌하는 주요 의견을 일부 장관들의 의견으로 모두 나열한다. 이런 접근법은 갈등을 적당히 봉합하는 매우 편리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반면 ARF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을 증가시킨다. ARF는 창립 목적상 지역 안보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기구는 아니다.5 ARF의 목적은 지역 국가들이 안보 이슈를 논의하고 인식의 차이를 좁히며 나아가 일정한 합의와 동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세안 주도의 안보 협력이 충돌하는 견해들을 그냥 단순히 담아내는 방향으로 간다면 ARF나 아세안 주도 다자 안보 협력 무용론도 나올 수 있다.

 

미국의 아세안-북한 관계 압박과 아세안의 대응

트럼프 행정부가 등장한 이후 미국은 가장 중요한 안보 문제로 북한 문제를 종종 언급하고 있다. 북한 문제를 핵심 안보 이슈로 삼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북한 사이 긴장 고조 역시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미국의 북한 문제 접근은 직접 북한을 대상으로 한 것만 아니라 미국-동남아 관계에서도 펼쳐진다. 동남아 국가들에 북한과 관계를 재고하도록 하여 북한을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동남아에서 북한의 경제적 활동을 차단하여 대 북한 경제제재 효과성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미국의 주문은 구체적으로 동남아 국가 내 북한 공관 축소, 북한 노동자 철수 요구 등 형태를 띠고 있다.6 특히 지난 2월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것을 계기로 동남아 국가와 북한 사이 관계가 재 조명되면서 미국의 대 동남아 압박이 중요 정책 사안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올해 ARF를 전후로 이런 미국의 대 동남아 압박이 상당 부분 확인되었다. ARF를 계기로 필리핀을 방문한 틸러슨 (Rex Tillerson) 미국 국무장관은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잇달아 방문했다. 특히 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틸러슨은 태국 정부에 대 북한 압박을 주문했다. 태국 정부가 나서서 북한 기업들이 태국에서 활동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문이었다.7 이런 미국의 압박은 간접적으로 싱가포르에도 해당된다. 싱가포르 역시 동남아에서 북한 기업들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국가다. 싱가포르와 태국은 북한의 무역 대상국 중 10위 안에 드는 국가들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ARF도 문제 삼고 있다. 즉, 북한을 회원국으로 가지고 있는 ARF에 대한 문제 제기다. 북한을 국제무대에서 고립시키려는 전략이다. 미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아세안이 주도하는 ARF에서 북한을 자격정지 시키거나 퇴출 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아세안 국가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미국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 대행 써튼 (Susan Thorton)은 ARF 직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ARF 회원국들과 “분쟁 방지와 예방외교를 목적으로 하는 이 기구 (ARF)에서 한 회원국을 자격정지 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논의하고 있다고 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 회원국은 크게 의심할 여지 없이 북한을 지칭한다.8

이런 미국의 노력은 큰 결실을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과 아세안 10개국은 모두 국교를 맺고 있다. 국가에 따라서 보다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지만, 어떤 아세안 국가도 추가적으로 북한과 외교적 마찰을 빚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부 UN 안보리 경제 제재에 어긋나는 부분에서는 동남아 국가들이 북한 기업이나 북한의 경제적 활동에 대한 차단을 할 수 있지만 그 이상 외교 관계 악화를 감수하면서 까지 동남아 국가들이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동남아 국가들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악화시키거나 국교 단절까지 가는 경우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이란 변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근거가 있든 없든 북한에 대한 압박, 관계 조정을 시행할 때 중국으로부터 불이익이 올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세안은 ARF에서 북한의 자격을 정지하거나 퇴출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다. 아세안 의장국으로 올해 ARF 의장을 맡고 있는 필리핀 외교장관 카예타노 (Alan Cayetano)는 기자회견을 통해 ARF가 “현재로서는 특정 국가를 대화에서 배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미국의 제안을 간단히 일축했다. 이어 그는 ARF는 북한이 UN 안보리 결의안을 준수해야 한다는 강력한 입장을 이미 밝힌 바 있다고 하면서 아세안은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는 “피스메이커”를 자청한 바 있고 북한에 “대화의 기회를 제안”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9 ARF의 현재 규정 상 회원국 자격정지나 퇴출은 불가능하다. 대신 아세안은 자신의 방식, 즉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 촉진이란 방식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대 동남아 압박에서 크게 성공적이지 못한 것 처럼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동남아에 압력을 넣는 방법은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아세안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반대 방향, 즉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 내기 위한 설득을 아세안에게 주문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남중국해 해빙 무드와 아세안 분열

2017년 ARF에서 남중국해 문제는 예년에 비해 덜 주목 받았다. 북한 ICBM 도발로 북한 문제에 큰 관심이 쏠렸다. 무엇보다 최근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중국과 동남아 국가간 일종의 해빙 무드가 형성되었다.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나 동남아 방면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된 정책이 없는 것도 한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2017년 ARF에서 남중국해 문제, 보다 확대해서 중국-아세안 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세가지 사항이 있다. 남중국해 문제를 다루는 행동규약 (code of conduct in South China Sea, COC)을 위한 기본협정 (framework agreement) 합의, 전반적 중-아세안 관계 개선 분위기와 여전한 아세안 내 의견 불일치다.

 

남중국해 행동규약 기본협정 합의

이번 ARF 기간 동안 중국과 아세안 국가 외교장관들은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이 남중국해 문제 관리를 위한 COC 기본협정 (Framework Agreement for Code of Conduct)에 합의를 보았다고 밝혔다. 중국은 물론이고 아세안 국가들도 이 기본협정 합의가 큰 진전이라는데 입을 모았다. 아직 남중국해 문제 해결에 희망을 갖기에는 세가지 부분에서 이르다. 첫 번째로 이번에 합의된 기본 협정은 COC 자체도 아니고 COC 논의와 합의를 위한 기본적인 절차와 형식에 합의한 것이다. 즉 이번 합의가 남중국해 문제 해결에 관한 합의는 아니며, 단지 COC로 가는 절차에 대한 합의일 뿐이다. 더 나아가 COC 자체가 조속히 마무리 된다고 해도 COC가 남중국해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인 아니다. 다만 남중국해에서 긴장과 충돌을 다룰 기본적인 규칙을 제공할 뿐이다. 이번에 합의된 기본협정이나 COC, DOC 모두 문제의 근원인 남중국해에서 영토 분쟁 해결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

두 번째로 이렇게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남중국해에서 갈등관리 방법인 COC를 도출하기 위한 합의를 내는데 걸린 시간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즉, 2002년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이 남중국해에서 당사국 행동선언 (Declaration on the Conduct of the Parties in the South China Sea, DOC)에 합의 한 직후 법적으로 더 구속력 있는 COC 논의를 시작한지 15년 만에 겨우 이를 위한 기본협정에 합의했을 뿐이다. 아세안과 중국은 이 기본협정을 바탕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COC를 논의할 차례인데, 이 과정 역시 쉽지 않다.

COC의 구속력도 문제가 된다. 기본협정을 넘어서 COC에 합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COC에 의해서 분쟁 당사국들이 얼마나 구속될지 의문이다. 국제법적 효력을 가지더라도 이를 준수할 정치적 의지가 없다면 큰 의미가 없다. 만약 중국과 아세안 국가들이 남중국해 문제 해결 및 관리를 위한 정치적 의지가 있었다면 DOC, COC 등 새로운 규약을 만들 이유도 없다. 이미 서명된 아세안우호협력조약 (ASEAN 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TAC)으로 이 지역에서 무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한 분쟁 해결은 충분하다.

세 번째 COC를 위한 기본협정으로 이르는 과정에서 중국의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COC 합의를 위한 기본 협정에 양측이 합의했다고 언급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계속 외세의 배제를 주장했다. 예를 들면 지난 2017년 6월 싱가포르 외교장관 비비안 발라크리시난 (Vivian Balakrishnan)과 중국 외교부장 왕이 (Wang Yi)가 한 기자회견에서 왕이는 남중국해 문제 해법을 이야기 하면서 “상호신뢰를 증진하고, 협력을 심화하며, 지역 내외의 간섭, 특히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고, 관련 국가들이 충분히 준비를 하면 적당한 시기에 COC 문안에 관한 심도 있는 협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10

왕이 부장은 ARF 회의에서 아세안 외교장관들과 만난 후, “남중국해 상황이 안정적이고, 전제조건으로 외부 세력의 방해가 없다면, 11월 정상회의에서 COC 협의 공식 시작 선언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고 했다.11 지난 6월과 8월 ARF에서 나온 왕이 외교부장의 발언을 보면 외부의 간섭, 방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여기서 외부 세력이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몇 년간 남중국해를 둘러싼 갈등에서 외부세력으로 부를 만한 국가들은 영토를 주장하지 않지만 남중국해 문제에 개입을 하고 있는 국가로 추정되며, 미국, 일본, 인도, 그리고 나아가 2016년 중국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국제중재법정까지도 포함된다. 즉, 현재 중국의 태도는 아세안이 원하는 COC 관련 논의 시작 전제조건으로 외부의 남중국해 문제 개입, 특히 미국의 남중국해 문제 개입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려 한다.

 

중-아세안 관계 회복과 아세안의 분열상

2009년 이후로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자기주장 강화로 인해 동남아 국가, 특히 남중국해에서 영토를 주장하는 국가들과 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런 관계 악화는 국제법적으로 중국의 9단선 주장을 무력화 시킨 2016년 7월 국제중재법정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PCA) 결정에 즈음해 가장 악화되었다. 그러나 지난 1년여 기간 동안 중국과 동남아 국가 관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개별 동남아 국가의 정치적 상황, 중국의 매력공세 (charm offensive) 재개, 아세안 차원에서 남중국해 문제를 조용히 관리할 필요성, 그리고 미국의 상대적 무관심이 만들어 낸 결과다.

동남아 국가 중에서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지속적으로 중국에 우호적 태도를 취했다. 남중국해 영토를 주장하는 국가도 아니고 중국이 제공하는 경제적 유인에 큰 매력을 느낀 탓이다. 태국은 2014년 군부 쿠데타 이후 아직 민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군부 쿠데타에 대한 전임 오바마 정부의 비판으로 인해 미국의 동맹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몇 년 전부터 상당한 친중 노선을 걸어왔다. 전통적으로 친중적 국가로 분류되어 왔던 미얀마는 2011년 정치개혁 이후 미국과 가까운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아웅산 수찌(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민정이 들어선 이후 소수민족 인권 문제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미온적 태도에 비판적인 서방국가와 거리가 멀어졌다. 반면 미얀마 경제성장을 위해 중국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는 태도가 크게 늘어났다.12

보다 중요한 변화는 동남아 내 중추 국가 (pivotal state)에서 일어났다.13 대표적인 국가가 필리핀이다. 중국의 9단선 문제를 국제법정으로 끌고 갔던 필리핀은 두테르테 (Rodrigo Duterte)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급속히 중국 쪽으로 기울었다.14 이에 대한 화답으로 중국 정부는 240억 달러에 달하는 대 필리핀 경제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15 말레이시아는 나집 라작 (Najib Razak) 총리가 관련된 부패 문제가 2016년 초 미국 법원에서 문제가 되면서 서서히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섰다.16 2016년 하반기 중국은 나집 총리의 중국 방문 시 230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말레이시아 경제협력안을 발표했다. 여기에 중국은 130억 달러를 들여 말레이시아를 동서로 잇는 철도를 건설하고 있다.17 중국과 필리핀, 말레이시아 양자 관계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좋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조코 위도도 (Joko Widodo) 대통령의 해양 허브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인도네시아 역시 아직 큰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중국 혹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 반면 싱가포르는 2016년 하반기 이후에도 중국과 거리를 두어 왔다. AIIB나 일대일로 (Belt and Road Initiative, BRI)로 인한 경제적 기회가 기대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략적 위협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2017년 초 대만과 합동군사훈련을 마치고 귀환길에 홍콩에 들렸던 싱가포르 군용물자들이 중국 당국에 의해서 억류된 적이 있을 정도로 중국과 싱가포르 관계는 좋지 않았다. 중국정부는 싱가포르 리센룽 (Lee Hsien Loong) 총리를 일대일로 정상회의에 초청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중-싱가포르 관계도 회복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ARF 회의에서 중국이 중-아세안 대화 조정국(coordinator)인 싱가포르의 “긍정적이고 건설적 역할”에 대해서 크게 추켜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18

2016년 7월 이후로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 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된 것은 남중국해 문제로 인해 악화된 중국과 관계를 더 이상 어렵게 해서는 곤란하다는 개별 국가들의 판단과 일부 국가들이 미국 혹은 서방 국가와 국내 정치 문제로 불편해진 탓이 크다. 여기에 중국의 경제적 지원 유혹도 크게 작용을 했다. 한편 오바마 정부의 피봇 정책이 보여주었던 미국의 대 동남아 관심은 트럼프 정부 하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상 트럼프 정부는 대 동남아 정책이라고 부를 만할 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 동남아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은 듯 하다. 미국, 적어도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에 대한 확신 혹은 신뢰가 낮아진 상황 속에 많은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실익을 추구하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 동남아 국가들 전반에서 대 중국 접근이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아세안 단결성 (ASEAN Unity) 유지를 위한 아세안 차원의 전략적 합의에 기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아세안 국가들은 역내 전략적 문제, 특히 남중국해 문제에 관해서 내적 분열상을 노정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영토를 주장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간 이견이 있고, 영토를 주장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도 영토-전략적 고려, 중국으로부터 잠재적 경제 이익, 국내적 문제 등으로 인해 미묘한 입장이 갈리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내부적 입장 차이가 2012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있었던 AMM 이후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자주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ARF 직전 열린 AMM에서도 또 한번 이런 내적 차이가 밖으로 드러났다. 아세안 회원국 외교장관들은 AMM 이후 의장성명 (chairman’s communique)을 발표하기 위한 조율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합의가 쉽지 않았다. 베트남은 의장성명에 중국에 의한 남중국해 간척 문제, 남중국해 군사화 문제를 명확히 의장 성명에 언급하기를 원했다. 반면 의장국인 필리핀을 비롯한 다른 아세안 국가들은 남중국해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는데 부담을 느꼈다. 중국을 의식한 것이다.19 베트남의 이런 대 중국 태도로 인해 결국 ARF 회의 기간 중 계획되었던 중-베트남 외교장관 회의가 갑작스럽게 취소되었다.20

이런 입장 차이가 쉽게 조율되지 못했고 결국 아세안 외교장관회의는 회의 종료 직후 의장성명을 발표하는데 실패했다. 그럼으로써 다시 한번 아세안 내 분열상을 밖으로 비치게 되었다.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AMM 이후 이어진 아세안 확대외교장관회의 (ASEAN Post-Ministerial Meeting, ASEAN PMC), 아세안+3 외교장관회의, EAS 외교장관회의, 그리고 ARF까지 모두 종료되고 나서야 합의된 성명을 내놓았다. 이 최종 문서에서는 중국이라는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 않은 채 남중국해에서 간척사업과 군사화에 대한 우려만 담았다. 가까스로 합의된 문건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향후에도 특히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아세안은 지속적으로 내부 분열과 갈등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이 지속적으로 강대국 앞에 분열상을 노출할 것인지, 아니면 내부 이견을 봉합하고 단일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인지에 따라서 아세안이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무게와 위치가 달라질 것이다.

 

결론

매년 ARF가 개최될 즈음만 되면 한국 정부나 언론들은 온통 한반도 문제에만 집중해왔다. 늘 한반도 문제가 ARF 의장성명에 어떻게 다루어질 것인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다. 한반도 문제가 ARF의 핵심적이고 중심적 의제가 되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참가 국가들, 그리고 언론들은 한반도 문제 보다 남중국해 문제, 미-중간 전략 경쟁 문제에 보다 관심을 가졌다. ARF 회의 아젠다 역시 그런 주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남중국해, 강대국 전략 경쟁이란 큰 그림은 옆으로 밀어 놓고 한반도 문제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매우 한국적 현상이다. 다만, 2017년 ARF의 경우 회의 직전 북한의 ICBM 발사, 미국의 북한 문제 관심, 그에 따른 북-미 긴장 고조라는 특수 상황에 따라 한반도 문제가 의제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 되었다.

북한, 한반도 문제 관련 긴장 국면과 대결적 양상이 전개되면서 상대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베를린 구상과 새로운 대북 정책 구상은 관심을 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AMM, ARF 모두 의장성명에서 베를린 구상의 주요 내용, 즉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문제가 언급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이상 지역 국가들이 베를린 구상에 대해 관심을 보일 여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향후 ARF에서 새로운 대북 접근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 일차적으로 지역 국가들이 북한 문제 관련 과거 한국 정부의 일방 요청에 대해서 느꼈던 한반도 문제 피로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더 나아가 북한에 대한 압박과 비난 보다 한반도 평화와 대화라는 부분이 ARF 뿐만 아니라 아세안 지역에서 훨씬 지지를 확보하기 쉽다. 필리핀 외교장관이 언급한 아세안의 피스메이커 역할, 북한을 대화로 끌어내는 아세안의 역할 등은 바로 이런 한국의 새로운 접근법과 조응 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의 도발로 당장 대화가 어렵더라도 강온 양면 전략을 유지해야 한다. 미국과 공조로 북한 도발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하는 동시에 아세안을 대북 유화적 메시지를 보내는 채널로 활용해야 한다.

남중국해에서 긴장관계에 있었던 동남아 국가들과 중국은 지난 1년 사이 급격히 관계를 회복했다. 신밀월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데탕트라 부를 만 하다. 이에 따라 효과는 의문스럽지만 중국과 아세안간 COC 관련 논의도 어느 정도 진전이 기대된다. 중국의 대 아세안 매력 공세와 미국의 상대적 무관심이 만난 결과다. 그러나 아세안 국가의 중국에 대한 이런 태도는 항구적인 것도 장기적인 것도 아니다. 불과 1~2년 전 아세안-미국 관계를 보면 아세안의 대 강대국 전략이 얼마나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뀌는지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얼마나 큰지, 중국의 대 아세안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에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라는 근본적인 안보와 주권 문제를 넘지 못한다면 중국과 아세안 간 신뢰관계 구축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들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About Experts

이재현
이재현

지역연구센터 ; 출판홍보실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외교통상부 산하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며, 비전통 안보와 인간 안보, 오세아니아와 서남아 지역에 대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Transnational Natural Disasters and Environmental Issues in East Asia: Current Situation and the Way Forwards in the perspective of Regional Cooperation" (2011), “전환기 아세안의 생존전략: 현실주의와 제도주의의 중층적 적용과 그 한계“ (2012), 『동아시아공동체: 동향과 전망』(공저, 아산정책연구원, 2014), “미-중-동남아의 남중국해 삼국지”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