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평양 방문은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협상안 조율 없이 서로의 입장을 타진했다는데, 지난 8개월간의 만남 동안 아직도 입장 파악을 못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의 큰 진전을 기대하긴 어렵다. 오히려 성과가 필요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철저한 북핵 검증 없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만으로 상황을 봉합할 ‘나쁜 거래’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물론 대화가 진행 중이고, 시간이 있으며, 누군가의 전략적 결단의 기회도 남아 있다. 하지만 결단의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새로운 장을 열 수도 있고, 비핵화의 꿈이 물거품될 수도 있다. 애초 크게 한판 벌이려고 멍석을 깔아놓았는데 어쩌다 보니 남의 놀이터가 된 느낌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식민통치를 겪었고 공산주의의 침략야욕에 잿더미로 변한 국토였지만 반세기 만에 글로벌 무역국가로 성장한 우리다. 북·미대화가 어떻게 흘러가든 결국 우리의 돈으로 문제가 풀리고, 우리의 의지로 이 땅의 평화를 지켜나갈 수 있다. 이에 북·미 양측에 대해 우리의 이익이 반영된 정상회담을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먼저 ‘비핵화 개념’부터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비핵화인지, 아니면 평화체제 구축과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비핵화인지 확인해야 한다. 북한이 끝내 이를 거부한다면 조금 더 기다리면 된다. 북한이 경제성장을 위해 핵을 포기할 때까지 평화롭게 상황을 관리할 힘이 우리에겐 있다.
북한 비핵화 개념이 분명하다면 다음 단계로 로드맵을 요구해야 한다. 전체적인 비핵화 과정과 시간표가 없는 깜깜이 협상을 하다 보면 북한 마음대로 시간이 지연되고 실패의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북한의 특정 핵시설 해체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전체적인 비핵화 설계도다. 설계도가 완성되면 시간표대로 약속을 이행하는 일만 남게 된다. 이 단계를 거치면 불필요한 의심이 사라지고 협상에 대한 지지도 높아질 것이다.
문제는 이번 북·미 정상회담 역시 로드맵이 없는 상황에서 영변핵시설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로드맵과 별개로 영변 핵시설을 철저한 신고·검증을 거쳐 폐기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철저한 검증은 북한이 보유한 핵물질의 총량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 과제다. 북한이 요구하는 참관 수준으로 어물쩍 넘어가선 안 된다. 북한이 시료채취와 같은 제대로 된 검증을 수용한다면 그 상응조치로서 연락사무소 개설과 인도적 지원, 주한미군이나 유엔군사령부의 존속과 관련 없다는 양해하의 ‘종전선언’, 그리고 유엔 대북제재하에 있는 원유공급량 제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미공개 우라늄 농축시설 폐기는 그다음 단계다. 비핵화 개념이 통일되고 로드맵이 만들어져 협상이 제 궤도에 오르면 구체적인 이행은 단계적으로 해도 좋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시설을 철저한 검증을 통해 폐기할 경우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대북 합작사업을 허용할 경우 중국도 관련 활동을 재개할 것이기에 가장 중요한 대북제재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높은 수준의 비핵화 조치와 연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북한이 핵물질과 핵무기를 모두 폐기하면 모든 대북제재를 풀고, 평화협정에 서명하며, 북·미수교를 할 수 있다. 한국 일본 등 주변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B)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경제지원도 가능하다. 다만 북한이 끝내 핵물질과 핵무기의 폐기에 응하지 않을 경우 대북제재가 다시 복원되는 회복조항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 같은 제안은 매우 이상적이며, 이렇게 협상이 진행될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우리의 이익이 반영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려면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운명의 주인이 된다.
* 본 글은 2월 12일자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