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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중단으로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실질적인 제재를 모두 해제해 달라는 북한의 주장을 듣고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이니 완전한 비핵화 운운하더니 결국 그들이 내놓을 것은 영변뿐이었다. 아마도 다음 번에는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 내놓을 테니 한미동맹 해체하라고 했을 것이다. 북한은 말로는 비핵화 협상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핵보유 협상을 하려 했다.

영변 핵시설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간 공개하지 않았던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이다. 이것을 일부라도 숨길 수 있느냐에 따라 완전한 비핵화가 가능한가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은 미측이 구체적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데도 끝내 협상을 거부했다. 리용호 외무상은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발언을 반박하는 자리에서도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을 ‘다른 곳’으로 지칭했다. 혹시라도 미공개 농축우라늄 시설을 시인하는 뉘앙스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를 말하면서 모든 것을 다 인정하지 않았다. 진실은 숨기는 자의 편이 아니다.

북한은 자신들에 대한 11개의 제재 중 일부를, 그것도 민생과 관련된 제재만을 해제해 달하고 했음을 강조하며 마치 미국이 부당한 협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했다. 하지만 이는 교묘한 말장난이다. 북한이 주장한 2016년 이후 대북제재 5개는 현재 북한을 아프게 하는 대북제재의 전부다. 북한의 끊임 없는 핵개발로 인해 2016년부터는 북한 경제를 전방위로 압박함으로써 핵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제재를 만들었다. 그 이전의 제재는 북한과의 무기거래를 차단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북한이 제재를 해제받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내려놓으면 된다. 그런데도 마치 피해자인 양 그간의 북한 행보 치고는 드물게 ‘민생’을 강조했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이야기한 대북제재 완화 필요성은 기가 찰 정도다. 자신들이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해서 만든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인 만큼, 이제는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고 있으니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돈을 빌려간 채무자가 이제부터 더 돈을 빌려가지 않을 테니 이제 나보고 돈 갚으란 소리를 하지 말라는 논리다. 꼼꼼히 따져보면 북한은 말로만 비핵화 대화를 한다고 했을 뿐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번 하노이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협상 전술의 민낯을 드러냈고 이를 간파한 미국으로부터 제대로 되치기를 당했다. 소위 새로운 협상 방식이라는 탑다운(top down) 방식의 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을 공략하기 위한 북한의 협상 전술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례 없던 영변 핵시설을 내주었으니 외교적 성과로 홍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재완화를 얻어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을 잘 모른다 해도 이성마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동산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협상가답게 ‘무거래'(no deal)을 선언하며 상황을 반전시켜 버렸다. 김정은 위원장을 끝까지 추켜 세워주는 우아한 모습도 잃지 않았다. 반면 북한은 모든 것을 잃었다. 대북제재로 인해 경제적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약점을 노출시켰고, 영변 이후부터는 협상이 더 까다로워질 것임을 주지시켰다. 그들이 유리하다고 착각했던 탑다운 방식의 협상도 결국 초조한 모습을 노출한 김정은 위원장의 실수로 더 이상 활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젠 북한이 진정한 비핵화 의지를 가지고 그에 합당한 로드맵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도 더 이상 속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하노이 정상회담은 성과 없이 종료되었지만 빈손 협상은 아니다. 오히려 북핵협상의 진실이 밝혀진 의미 있는 계기였고 핵을 머리위에 이고 살 위기에 빠질 뻔 했던 한국을 구해준 순간이었다. 동시에 앞으로도 똑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협상이었다.

우리 정부는 다시 중재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미국에 대해 제재완화를 요구하는 쪽이라면 곤란하다. 나타난 진실을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반쪽 외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북핵 협상은 이미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임기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상황을 잘 관리하며 한미동맹을 튼튼히 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개해야 한다. ‘우리가 잘 해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희망적 상상은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 본 글은 3월 4일자 디지털타임스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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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안보통일센터

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