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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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 한국학연구센터는 11월 18일(수), 제5회 <아산서평모임>을 개최했다. 주제 도서는 이종찬 교수(아주대학교)의 『난학의 세계사: 중화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알마, 2014)였다. 정수복 작가가 사회를 보고 저자인 이종찬 교수가 발제 했으며, 보데왼 왈라번 교수(성균관대학교), 원재연 교수(전주대학교)가 지정 토론을 맡았다. 아산정책연구원 2층 회의실에서 진행된 이날 모임에는 송상용(한림대학교), 신복룡(건국대학교), 신문수(서울대학교) 교수 등 25명이 참석했다.
 

◈ 이종찬 교수=“난학, 일찍이 열대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본의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위한 서곡”

이종찬 교수는 “열대 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지배했던 사회와 그렇지 못했던 사회의 차이가 제국과 식민의 길을 갈라놓았다”며 서구와 일본은 전자, 조선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난학’은 일본이 에도시대에 네덜란드로부터 받아들인 서양학문을 일컫는다. 이 교수는 “17세기 일본인들에게 난학은 단순한 유럽 문화 수용이 아니라, 동남아시아라는 열대 공간에서 이루어진 일본과 유럽의 문화적 접속이며 일본의 탈아입구를 위한 서곡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네덜란드와 일본은 각각 동인도회사 무역과 주인선(朱印船, 에도시대 당시 일본의 대외무역선) 무역을 통해 열대 동남아시아에서 접촉했다”고 설명하며 “16~18세기 서구를 통해 일찍이 열대 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일본 난학자들은 같은 시기 소중화(小中華)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조선 사대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공간적 세계를 지향했다”고 설명했다. 또 이 교수는 “난학은 근대 일본의 이념적 구성물이자 이후 만주를 비롯하여 열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인도양으로까지 진출하고자 했던 일본의 ‘지리적 상상력’의 뿌리”라고 말했다.

덧붙여 이 교수는 “오늘날 급박하게 요동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한국이 앞으로도 열대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수 세기 전에 그랬듯 일본과 중국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면서 “따라서 근세 일본이 열대 무역과 박물학을 통해 유럽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중화적(中華的) 세계를 넘기 위해 난학을 만들어간 과정을 새롭게 인식하고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보데왼 왈라번 교수=”서구 제국주의의 부정적인 측면 간과한 난학 논의는 반쪽 짜리”

보데왼 왈라번 교수는 “일본이 서구 문명 수용 과정에서 국가 주도적으로 난학을 키웠던 배경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 교수가 난학의 긍적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자국의 독자적인 학문(난학)을 탄생시킨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들이 서구 제국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수용해 조선 및 주변 국가 침략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기반을 닦았던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왈라번 교수는 또 “일본을 포함해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주민들에게 희생이 따르는 무역 거래를 강제하고, 폭력을 행사해 부당한 이익을 취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왈라번 교수는 일본이 유럽의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창조한 일본식 한자와 번역어들을 난학의 성과로 꼽았다. 모임에 참석한 대다수 교수들 역시 “현재 한국 학술 용어의 99.9%가 일본이 만든 번역어”라며 공감했다. 이에 이종찬 교수는 ‘translation as transcultura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일본의 독창적인 문화 중 하나가 바로 문화융합으로서의 번역”이라고 역설했다.
 

◈ 원재연 교수=”저자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 시도에 대해서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원재연 교수는 “저자는 일본 난학의 선진화를 강조하기 위해 조선 실학자들의 무능함, 폐쇄적 대외정책 등을 부각시키고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 시도들에 대해 침묵했다”고 지적하며 “조선과 유구는 일본이 유구를 실제로 장악하기 직전까지 약 200년 이상 활발한 해상 무역을 했던 경험이 있고, 17~18세기 중반 조선왕조는 자율적으로 개방의 문을 열고 서구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이려 했다”고 주장했다.

원 교수는 “조선에서는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실학자들에 의해 통상개국론, 서양선비 초빙론, 경세치용론, 이용후생론이 제기되었고, 대원군 집권기부터 쇄국이 아닌 개국을 모색하는 등 세계사의 조류에 부지런히 대응해 가고 있었다”며 “이러한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의 흐름은 일제에 의해 좌절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이 은과 구리를 가져가려면 조선과 거래하지 말고 일본과 독점 무역을 해야한다고 네덜란드에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원 교수는 “일본은 조선의 무지를 악랄하게 이용해 무관세로 원시적 자본 축적 과정을 거쳤고, 미면교환체제(米綿交換體制, 일본이 서양에서 수입한 면직물을 조선에서 쌀과 교환했던 무역방식)로 조선의 자원을 수탈했으며,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식민화했다”며 “저자가 일제의 침략과 압제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 시도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제5회 <아산서평모임> 세부일정표, 발제자료 및 토론문 (첨부파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