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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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 한국학연구센터는 11월 16일(수), 제11회 <아산서평모임>을 개최했다. 주제도서는 조영준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선후기 왕실재정과 서울 상업》(소명출판, 2016)이었다. 모임은 정수복 작가의 사회, 저자인 조 교수의 발제로 진행됐으며, 김문식 교수(단국대), 이헌미 선임연구원(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이 지정 토론을 맡았다. 이날 모임에는 신복룡 교수(건국대), 김기봉 교수(경기대), 이선민 기자(조선일보) 등 16명의 서평위원이 참석했다.
 

◈ 조영준 교수=“왕실 재정으로 보는 조선후기”

조영준 교수는 이번 저서에서 “재정과 상업의 총화(總和)로서의 서울 경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왕실재정, 특히 세출(歲出)에 주목”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왕실과 국가 경제 구조 사이의 관련성을 드러냈다. 조 교수에 따르면, 최근까지 조선후기 경제 지표에 대한 이해는 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라는 삼남(三南)의 정보를 토대로 이루어져 왔으며, 국가의 재정 운영 연구도 주로 부세(賦稅)에 치우쳐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조 교수는 “정량적(quantitative) 분석과 정성적(qualitative) 이해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한 정합적 분석을 위해, 조선후기 회계 장부 내역 전산화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한 계량 분석과 고문서 분석을 결합한 방법론을 택했다”고 밝혔다.

조 교수는 연구 결과 “제도화된 정부 재정의 영역에서는 시행되기 어려웠던 각종 임시적, 비공식적 지출 영역이 내탕(內帑)이라는 형태로 마련되어 있었고, 그 운영에서 연성 예산 제약(soft budget constraint)하에서의 지대 추구(rent seeking)가 만연해 있었다”고 설명했다. 1870년대부터 연간 수지의 적자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 창고의 재고가 19세기 들어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1880년대가 되면 거의 고갈되어 정부의 구조적 적자 상황이 왕실 부채의 누적적 증대로 연결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위기에 대한 왕실의 대처는 미온적”이었다고 조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왕실재정의 적자는 왕실에 납품한 상인에 대한 대금 미지급, 조달 기관에서 근무한 임직원에 대한 급료 미지급 등으로 전가되었다”며, “1894-1895년의 갑오-을미개혁 시기까지 왕실에 의해 누적된 부채가 일본인이 제실(帝室)의 재산을 정리하려던 1908년까지 청산되지 못하고 남아있었다는 점은,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왕실 또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고 주장했다.
 

◈ 이헌미 선임연구원=“궁방 회계장부를 통해 본 조선후기 국가의 역사적 이해”

이헌미 선임연구원은 조 교수가 “국가와 시민사회, 정부와 시장,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근대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재정 사료를 분석해 조선시대 왕조국가의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었다”며 저자의 사료 장악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 책을 잘못 읽으면, 중간층의 확대와 상업 자본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발달에 저해가 됐던 조선 왕조와 이를 촉진한 합리적 식민 행정부(‘식민지 근대화’론)로 거칠게 정리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 연구원은 “조선시대 정부재정과 왕실재정이 불가분했다는 저자의 지적에 매우 공감”한다면서도, “‘國’으로서의 조정과 ‘家’로서의 왕실이 분리되지 않았던 점과 법적 규율에서 제외되는 왕실의 특권이 ‘전근대’ 전제왕정의 구조적 위기를 야기한 폐해이자 ‘근대적’ 절대왕정이나 계몽 군주정과의 차이라고 입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를 제시했다.
 

◈ 김문식 교수=“조선 왕실의 재정 파탄은 피할 수 없었나?”

김문식 교수는 저자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왕실재정의 운영 실태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동시대를 평가하는 근거를 제시”했으며, “늘어나는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왕실에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음을 밝혀 고종∙순종 대의 경제 정책 평가에 중요한 근거를 제시했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조 교수의 발언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앞서 조 교수는 “대원군의 궁방전 개혁은 정부재정의 건실화에 있었으므로 왕실재정에서는 내탕의 재원 축소로 나타났다”, “일본의 영향력이 작용한 1894년 갑오개혁에서 호조나 선혜청과 같은 정부재정 영역에서 공인들에게 미하금을 지급하고 ‘근대적’ 재정개의 기초를 닦았다”, “1907년 일본인에 의한 제실 채무의 정리는 시전 상인들이 요청한 미하금의 3할을 ‘애휼금(愛恤金)’이란 명목으로 지급했다”고 설명했는데, 이에 김 교수는 대원군이나 일본의 그러한 조치가 적절했는지를 물었다. 조 교수는 “현재로서는 적절성을 판단하기 어렵지만, 대원군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공적 영역에서의 왕실 자립과 재원 절약을 위한 선택이었던 반면, 일본의 처리는 식민지 지배의 편의성을 위한 회유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 자유토론

발제 및 지정토론 후 이어진 자유토론에서 김기봉 교수는 “세계사적 보편성과 연결시켜 보면 조선후기 왕실의 재정 파탄은 ‘앙시앙 레짐’의 모순이 한국적 방식으로 나타난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 교수는 “대한제국에서 명목상 정부 재정과 왕실 재정을 분리하긴 했지만, 황실이 금광채굴권, 상업세 같은 정부 재정의 세원들을 하나씩 가져가 결국 내장원(內藏院)은 고종의 사금고화(化) 되어 버렸다”며 이는 오히려 보편적 근대와 반대로 나아간 것”이라고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신복룡 교수는 “망국(亡國)의 원인은 조선의 주자적인 문민(文民)우위 원칙, 해상 방어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이었다며, “왕실의 재정 파탄이 망국으로 이어졌다는 논리는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조 교수는 “재정 파탄을 망국의 주 원인으로 주목해선 안 된다는 점에 공감하나, 이 책은 조선 경제의 단 10~15%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 망국론에 대한 책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 제11회 <아산서평모임> 세부일정표, 발제문 및 토론문(첨부파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