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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 아태 지역 외교가는 아세안안보포럼 (ASEAN Regional Forum, ARF)라는 태풍을 피해갈 수 없다. 2016년의 ARF 태풍은 그 어느때 보다 큰 A급 태풍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ARF 직전에 있었던 국제중재재판의 남중국해 관련 판결이 있은 지 2주도 안된 시점에서 열린 이번 ARF는 미국, 중국, 그리고 아세안의 외교적 각축장이 되었고, 엄청난 양의 뉴스와 해석들이 쏟아졌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이번 ARF에서 각국의 성적표를 보면 중국은 “소탐대실”, 아세안은 “실리추구”, 한국은 “어부지리”로 평가할 수 있다.

 
소탐대실한 중국

이번 ARF에 임한 중국의 최대 과제는 아세안 국가들이 남중국해 국제중재재판 결과에 대한 단일 입장을 만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캄보디아를 앞세운 중국의 시도는 일견 성공한 듯 하다. 캄보디아는 아세안 외교장관들의 회동과 합의 도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남중국해 문제에 관한 언급, 특히 국제중재재판 결과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하도록 비토권을 행사했다. 결국 ARF 직전 열린 제 49차 아세안외교장관회의 (ASEAN Ministerial Meeting, AMM)의 공동 성명에는 국제중재재판 결과에 관한 언급이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과 캄보디아의 성공은 여기까지 였다.

중국이 스스로 천명한 것 처럼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고자 한다면 현재의 국제관계의 질서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중국이 원한다면 기존 질서의 수정과 재편은 현 질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국제중재재판의 결과를 완전히 무시하고 다른 주권국가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막기 위해 캄보디아를 내세우는 모습은 책임 있는 대국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국제중재재판 결과가 중국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고 불편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그럼에도 아세안의 내적 분열을 조장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아세안의 공동입장을 막으려 한 것은 역으로 중국의 부정적 이미지만 더욱 부각시켰다.캄보디아 역시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친중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1]

국제중재재판에 관한 직접 언급을 뺀 아세안외교장관 성명이 발표된 후 왕이 외교부장은 뒤늦게 아세안과 협력, 평화적 문제해결을 거듭 강조했으나 공허한 외침이 되었다. 이번에 중국이 보여준 모습을 놓고 아세안 국가들 중에서 남중국해 문제를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중국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세안 국가들은 없을 것이다. 중국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만한 행위자라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이번 ARF를 지켜본 국제사회는 중국이 주창하는 아시아 신안보관, 일대일로, 신형대국관계 등 비전에 이제 더욱 큰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실리추구의 아세안

아세안은 결국 중국에 굴복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2012년 아세안 외교장관회의와 같은 분열상 없이 외교장관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세안의 협의와 합의 원칙을 감안하면 내부에 캄보디아와 같은 방해꾼 (spoiler)이 있을 경우 공동성명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는데, 이를 극복했다. 캄보디아 배후의 중국은 아세안이 상대하기에 중과부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세안외교장관들의 합의는 나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의장 성명 합의에는 필리핀의 양보가 큰 역할을 했다. 중재재판에 관한 언급을 캄보디아가 반대했을 때 이를 필리핀이 수용했다. 필리핀의 통 큰 양보가 아세안의 단결 (ASEAN Unity)을 지킨 것이다. 향후 아세안 내 필리핀 입지와 목소리 강화가 예상된다.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AMM의 공동성명에서 국제중재재판 결과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지 않았을 뿐, 중국에 대한 비판과 아세안의 기존 주장은 사실상 모두 담아 냈다. 남중국해 관련 예년의 표현과는 다른 부분들이 보인다. 먼저 다소 약하지만, “지역의 평화, 안보, 안정을 저해하고 긴장을 높이며, 신뢰를 약화시키는 매립과 행위들의 증가”에 대해서 분명히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우려를 표한다고 지적했다. ‘매립’은 정확하게 중국을 겨냥한 목소리다.

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아세안 외교장관들이 한 목소리로 “(남중국해의) 비군사화 (non-militarisation)와 남중국해의 상황을 악화시키고 긴장을 고조시키는 매립행위를 포함한 모든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합의했다. 다시 한번 중국에 의핸 매립행위가 언급되었다. 보다 인상적인 것은 “비군사화”라는 표현인데, “군사화”라는 말은 중국의 남중국해에서 행위를 미국이 비판할 때 지속적으로 써온 표현이고 중국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표현이다. 미국의 대 중국 비판 용어를 사용해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 아세안이 중국에 대해 가진 불만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의 어부지리

표면적으로 한국은 이번 ARF의장 성명에 나타난 한반도 문제 언급만을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 들은 듯 하다. 이번 의장성명에서도 제 8항에 한반도 문제가 명시되었다. 올해 있었던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에 대한 우려가 표명되었고 북한에게 안보리 결의를 준수하라는 촉구도 있었다. 북한 인권 문제를 지칭하는 인도적 문제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반면 우려되었던 사드 (THAAD)에 관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럼 우리 외교의 큰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어부지리 격의 성과라고 보는 것이 맞고 이는 다음의 몇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우선 최근 사드 (THAAD) 배치 문제를 놓고 한-중간 불편한 외교적 관계가 이번 의장성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애초부터 사드 문제가 의장성명에 다루어 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우선 중국이 사드를 의장성명에 넣으려는 계획이 있었다면 한국 너머 미국이라는 변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설사 사드를 언급하고 싶어도 이를 강하게 추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번째로 ARF는 아세안 주도의 안보 포럼이고 아세안 의제가 주를 이룬다. 동북아의 사드가 새롭게 의장성명에 포함되기는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 세번째로 남중국해 문제로 홍역을 치른 아세안 입장에서 중국이 원하는 사드 문제를 의장성명에 포함시켜줄 이유가 없다. 이런 점에서 사드는 애초 ARF 의장성명에서 크게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도발과 UN 안보리 결의 준수라는 부분은 과거 ARF 의장성명과 비교했을 때 크게 ARF가 북한 문제에 대해서 더 강한 입장을 표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 표현을 의장 성명에 넣기 위해서 한국은 많은 노력을 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UN 안보리 결의라는 것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받아들이고 실행하고 있는 것이고 아세안도 큰 거부감은 없다. 과거 의장성명의 예를 보면 북한에서 구체적 도발이나 군사적 움직임이 있었던 경우 이는 의장성명에 반드시 언급되고는 했다. 따라서 UN 안보리 결의와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발사에 대한 우려는 새로운 진전 보다는 늘 포함되었던 사항이다.

이번 ARF에 나타난 지역국가간 경쟁, 협력의 구도는 크게 세 묶음으로 구분된다. 동남아의 캄보디아가 강하게 친중적 태도를 취했고, 북한 역시 중국과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도 넓은 의미에서 이 중국 캠프에 넣어야 한다. 반대편에는 미국-호주-일본이 있다. 미, 호, 일은 별도의 3국외교장관회의와 성명을 발표하면서 특히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 중국을 강력하게 압박했다. 이번 일련의 외교장관 회의 중에서 남중국해 중재재판 결과를 명확히 언급한 성명은 이 3국외교장관 성명이 유일하다.

그 중간에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아세안과 한국이다. 아세안은 남중국해 문제의 당사국이지만 철저한 실리위주의 개도국 외교 행태를 보인다. 남중국해 문제로 불편한 관계이지만,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고려, 양 강대국과 적절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아세안 외교전통의 전형적 모습이고 어쨌든 이런 외교 전략이 아세안에게 지속적으로 이익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다.

남은 하나, 한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한국이 회색지대에 남아 있는 것이 장기적으로 잘 계산된 전략과 포석인가? 아니면 어쩌다 보니 우리의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표류하게 된 것인가? ARF 등 지역 외교, 안보 관련 무대에서 큰 그림을 봐야 한다. 한반도와 북한 문제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여기에 너무 매몰되어서 우리 주변에서 돌아가는 더 큰 흐름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때다.

* 본 블로그의 내용은 연구진들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1] AMM 성명이 발표된 직후 중국은 과거와 달리 드러내 놓고 캄보디아의 역할에 대해 칭찬을 마지 않았다. 왕이 외교부장은 캄보디아 등 아세안 국가들이 (AMM 공동성명을 작성함에 있어) 정의를 실현했다고 전제 한 이후 “역사가 캄보디아가 견지했던 입장을 맞다는 것을 입증”할 것이라는 말로 캄보디아를 칭찬하고 추켜세웠다.

About Experts

이재현
이재현

지역연구센터 ; 출판홍보실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외교통상부 산하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며, 비전통 안보와 인간 안보, 오세아니아와 서남아 지역에 대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Transnational Natural Disasters and Environmental Issues in East Asia: Current Situation and the Way Forwards in the perspective of Regional Cooperation" (2011), “전환기 아세안의 생존전략: 현실주의와 제도주의의 중층적 적용과 그 한계“ (2012), 『동아시아공동체: 동향과 전망』(공저, 아산정책연구원, 2014), “미-중-동남아의 남중국해 삼국지”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