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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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엔 ‘경쟁(競爭)’이 넘친다. 대학 입시와 취직 경쟁은 물론이고, TV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경쟁 일색이다. 경쟁의 공정성을 높인다며 아예 복면을 쓰고 나와 노래 실력을 겨루는 프로그램도 있다.

정당한 경쟁은 아름답다. 그런 경쟁은 진보와 발전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한국인으로 ‘경쟁’ 개념에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은 유길준이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경쟁론(競爭論)>(1883년)을 썼다.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무릇 인생의 만사가 경쟁을 의지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크게는 천하국가의 일로부터 작게는 일신일가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쟁으로 인하여 비로소 진보하는 것이다. 만일 인생이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무엇으로 그 지덕(智德)과 행복을 숭진(崇進)시킬 수 있으며, 국가가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무엇으로 그 광위(光威)와 부강(富强)을 증진시킬 수 있으리오”

영어 단어 competition을 ‘경쟁’이라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다. 당시 고위 관리들은 ‘경쟁’이란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다툴 ‘쟁(爭)’이라는 글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을 통해 진보가 이뤄진다는 생각은 그 시대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다툼 하면 그저 활쏘기 정도를 생각하던 유교사회였으니까. 젊은 유길준은 당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경쟁의 긍정적이고 밝은 측면을 특별히 더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경쟁이 만들어 낼 폐해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하다.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오늘의 현실을 미리 볼 수 있었다면 경쟁이란 단어를 고집했을까.

과연 몇 년 후에는 유길준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는 <경쟁론> 12년 후에 출판한『서유견문(西遊見聞)』(1895년)에서 ‘경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미국 유학 경험과 세계일주를 통해 현실의 무한 경쟁이 빚어낼 수 있는 냉혹한 폐해와 잔악함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당시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나 약육강식(弱肉强食) 개념이 유행하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그 가운데 처한 약하디 약한 조선을 보며 그는 여러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는 ‘경쟁’ 대신 ‘경려(競勵)’라는 독창적인 단어를 사용했다(제 4편 <人世의 競勵>). 다툴 ‘쟁(爭)’ 대신에 권장할 ‘려(勵)’를 택한 것이다. ‘겨루면서(競) 격려한다(勵)’는 정도가 되겠다. 오늘로 치면 ‘경쟁’은 제로섬 게임, ‘경려’는 윈윈 게임이라 할 만하다.

‘경려’와 관련해 그는 두 측면을 지적한다. 먼저 ‘강기(綱紀: 기강)’가 있어야 한다는 것. 지켜야 할 규칙이나 윤리가 없는, 과도한 경쟁은 강자의 적나라한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행실(行實)’의 개화도 강조했다.

성숙하지 못한 사회의 경쟁에 대해서 유길준은 이렇게 논평했다.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보물을 던지면 무리들은 갑작스레 난동을 피우면서 서로 싸우고 다투는 추태를 부릴 것이다. 불쌍하고 가증스러운 일이니 이것은 경려하는 도에 강기(綱紀)가 없기 때문인데, 이런 풍속도 한 번 바뀌면 새로운 도(道)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경려’의 관점을 취하면 현재 쟁점이 되는 사안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임금피크제 확산을 통한 청년 일자리 창출 논란이 그렇다. “아버지 봉급 깎아 저를 채용한다고요?”라는 구호는 아버지를 힘들게 해서 되겠느냐는 우려가 담긴 표현 같지만 실은 아버지와 자식을 경쟁 구도로 놓는 자극적인 슬로건 같기도 하다. 세대간 편가르기나 갈등이 은밀히 잠재된 구호다.

한국의 임금 경직성은 유달리 심한 편이다.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등 9개국의 제조업 임금 연공성(1년 차와 30년 차의 임금 수준 차이)을 비교해보면, 한국은 313이다(1년 차 직원이 월 100만 원일 경우, 30년 차 직원은 월 313만 원). 비슷한 임금체계를 가진 일본이 242, 독일은 191, 영국은 157 정도다.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크니 정년이 연장된 상황에서 임금피크제를 채택하지 않으면 신규채용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가 조금씩 양보해 젊은이들을 격려하자는 것은 아버지 봉급을 깎는다는 경쟁적 관점이 아니라 아버지가 양보해 청년들을 살리자는 ‘경려’의 관점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규직 과잉보호가 일자리 창출을 막는다는 여의도연구원 연구 결과나 정규직 고용지수가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높다는 지적은 다 눈길을 끈다. 정규직에 대한 지나친 보호를 풀고 노동 이동성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제안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경쟁’의 상대로 놓고 제 몫 챙기기에 몰두하기보다 ‘경려’의 정신으로 상생하자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대한민국을 ‘망한민국’이니 ‘헬조선’이라 부르며 경멸하고 실망하는 젊은이들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으려면 역시 경쟁보다는 경려 아닐까.

유길준이 성숙 못한 경쟁 사회의 단면으로 꼽은 ‘교육 받지 못한 무리의 난동’ 사례는 또 우리 사회에 좀 많은가. 자식 교육이란 미명 아래 자기 자식만 경쟁에서 살리겠다고 교육판을 어지럽히는 ‘돼지 엄마’라는 추잡한 단어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우리 사회 경쟁의 폐해는 통계가 입증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근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1년째 가장 높은 자살률(10만 명 당 29.1명)을 기록했다. OECD 평균 12명에 비교하면 2.4배나 높다. 그 뒤를 헝가리(19.4명), 일본(18.7명)이 잇고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등바등 한다기보다 그저 도태(淘汰)되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달려가면서 다들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성장이 제일이었던 지난 세월에서 우리는 겨루기만 열심이었던 탓인지 서로 격려하는 데는 인색하고 또 어색해 한다. 경쟁 자체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너무 심하면 서로를 할퀴는 날카로운 흉기가 되지 않는가. 100년이 훨씬 넘었지만 유길준의 ‘경려’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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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근
김석근

한국학연구센터

김석근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거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문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정치사상연구실장으로 재직했으며 2000년부터 2006년까지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BK21 연구교수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를 지냈다. 그 외에 서울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해왔으며 주요 연구분야는 한국정치사상, 동양철학사, 그리고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