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우리는 전대미문의 국면을 맞고 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차 세계대전 후 정립한 세계질서가 중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현 국제 질서 체제의 쇠퇴 징후가 포착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국제 체제 이론들이 한세기 정도 지속되었고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한세기를 거슬러 올라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에 의해 사라예보에서 저격되었다. 이 사건은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 조항에 성문화된 민족 자결주의로 촉발된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윌슨의 14개조 선언은 식민 국가들이 제국주의 열강들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게 부추기며 세계 질서를 재편한 계기가 되었고 1, 2차 세계 대전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드레스덴과 도쿄에 대한 무자비한 공습은 국제 전시법의 한계를 확인하는 사례가 되었으며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의 도입으로 핵전쟁 시대의 막을 열었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2014년 3월 19일, 러시아는 전후 세계질서의 상징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인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2년 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보통 사람’(common man)의 물결이 세계질서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앞서 언급한 두 결정적 사건을 조금 더 깊게 파헤쳐보자.

국제연맹의 창설로 세계에는 국가간 적대행위에 대한 집단 통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싹텄다. 비록 베르사유 체제는 실패하였지만, 로카르노 조약의 집단안보 정신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다원적 세계주의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집단 안보에 대한 희망을 지속시켰다. 세계화가 초기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독일이 라인란트를 재무장하면서 뮌헨협정 당시 “우리 시대의 평화”의 환상은 흔들리게 된다. 그나마 남아 있던 집단 안보 체제에 대한 환상은 카틴숲 학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점으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형성된다. 얄타 회담이 국제 협력의 상징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세계경제의 기준으로 공표되었고 파리 조약은 1951년 4월18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유럽연합의 창시자들은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 장 모네 (Jean Monnet), 폴 헨리 스팍 (Paul-Henri Spaak), 콘라드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세계 전쟁으로 확대된 유럽 지역 갈등 발발에 결정적 책임이 있는 프랑스와 독일이 주축이 되었다.

현재의 국제 질서가 베르됭 전투의 참호 속에서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태동했을지는 몰라도 현재의 체재로 구체화 된 곳은 개성과 인천 연안이었다. 당시 검증되지 않았은 해리 트루먼은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하면서 한반도가 공산권 방어에 중요한 지점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그의 반대자들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딘 애치슨 (Dean Acheson) 의 우아한 냉철함과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의 온전한 강직함에 힘입어 트루먼은 한반도 평화를 유지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냉전의 상징이었다면, 한반도의38선과 비무장지대는 참혹한 현실이다. 한국전쟁은 북대서양조약을 북대서양조약기구로 격상시키며 유럽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두 명의 법조인, 두 명의 은행가 그리고 두 명의 외교관으로 이뤄진 여섯 명의 주창자들이 마샬 플랜으로 기획된 2차 대전 전후 세계 질서의 청사진을 그렸다. 그들은 딘 애치슨 (Dean Acheson), 찰스 볼렌 (Charles E. Bohlen), 에버렐 헤리먼 (W. Averwell Harriman), 조지 케넌 (George F. Kennan), 로버트 로벳 (Robert A. Lovett), 존 맥클로이 (John McCloy) 였다. 자부심과 재능을 겸비한 이 두뇌집단에 맥조지 번디 (McGeorge Bundy), 유진 로스토(Eugene Rostow), 월트 로스토 (Walt Rostow), 엘런 덜레스(Allen Dulles), 존 포스터 덜레스 (John Foster Dulles)가 가세했다. 이 앵글로색슨 백인 남성들이 미국 중심 세계 질서의 정수(精髓)를 창조했다.

커티스 르메이 (Curtis Lemay) 의 철저하게 계산된 불합리성과 치명적인 미 공군 전략 사령부의 전략 폭격에 의해 냉전은 열전(hot war)화 되지 않았다.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 제 68호의 해석, 게임이론의 발전, 허먼 칸(Herman Kahn), 버나드 브로디(Bernard Brodie), 토마스 쉘딩(Thomas Schelling) 그리고 프레드 이클레(Fred Ikle) 의 선구적 업적으로 핵 억지 이론이 발전했다.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베트남 전쟁의 라 드랑(la Drang) 전투와 닥토(Dak To) 전투에서 그리고 반둥회의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MIRV(다목적 유도 복수 탄두미사일), 투사중량, SLBM(잠수함 발사 탄두미사일)은 핵 전쟁의 알고리듬을 명료한 공포로 바꾸어 놓았고, 그로 인해 지정학적 안정이 지탱될 수 있었다.

20세기가 저물기 1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는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새로운 핵 억지 셈법이 담긴 1995년 미 전략사령부의 “탈냉전시기 전쟁 억지의 핵심(Essentials of Post-Cold War Deterrence)”은 국가 재건이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 종말에 대한 공허는 물질주의가 채웠다. 사람들은 물질주의에 빠져들었다. 유례없는 물질적 부를 축적하며 빈곤을 탈출했고 생활 및 보건 수준의 향상, 평균수명 연장 등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말라리아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질병이 되었다.

이런 세계화의 진보에는 오만함도 따라왔다. 개인 컴퓨터, 휴대전화와 관련된 파생 상품들은 과잉 소비를 부추겼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촉발된 엘리트와 보통 사람들 사이의 폴트라인(Fault Line, 단층선)은 더욱 깊어졌다. 1991에서 2008년 사이, 메인스트리트(Main Street) 중산층은 세계화로 입은 수혜를 빼앗겼다. 월스트리트(Wall Street) 엘리트들은 문화 사회적 우월한 지위를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다.

제한된 정부는 이제 구시대적 개념이라며 조롱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작은정부’가 옛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 와 ‘연방주의자 논집’(Federalists Papers) 저변에 깔린 국가는 국민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국가와 종교의 수립에 앞서는 선험적 자유의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다. 이 선험적 자유는 스파르타쿠스가 노예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그 시대부터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원동력이 되었다. 비대해진 국가 권력으로 인해 현재 치르고 있는 대가들을 생각해 보라.

변화는 갑작스럽게 닥쳤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다 포퓰리즘 폭풍의 전조를 감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2014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이 현재의 국제 질서를 위협하는 포문을 열게 될 것이란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 2016년 11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12월의 알레포의 폭격은 그러한 위협을 확정 짓는 최후의 일격이 되었다.

트럼프는 무시당한 대중들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파고들었다. 에릭 호퍼(Eric Hoffer)는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에서 이러한 대중의 욕구에 부합하는 대중운동이 시사하는 바에 대해 저술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는 “대중의 반란(Revolt of the Masses)”에서 포퓰리즘 부상의 징후를 확인했다. 미국은 패권국가로서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더 이상 질서 유지를 위한 세계의 경찰 역할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러시아와 중국은 군사적 현대화를 이루며 1920년대 해군 군비 증강 시대를 상기시키고 있다. 미국의 제3차 상쇄전략은 겉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와의 재래식 군비 경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정보 확산으로 촉진된 사회적, 문화적 변혁에 순응하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국제 현안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보다 심도 있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세계 정상들에게 민족주의와 영토분쟁 문제는 만성적인 문제가 되었고 즉각적인 정보의 속성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중동의 화약고’로 만든 밸푸어 선언과 1차 대전 종전 후 불거진 쉴레스비히-홀슈타인 귀속에 관한 영토 분쟁은 서로 맞닿아 있다. ‘특수노정’(Sonderweg, 존더베크)는 이제 더 이상 독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추동되었던 유럽인이라는 공동 정체성의 형성도 약화 되었다. 이탈리아 ‘북부동맹당’(Lega Nord)의 부상, 프랑스판 나치즘인 불랑기즘(Boulangisme)의 회귀, 그리고 ‘독일을위한대안당’(Alternative for Germany)의 출현은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갔던 토착 민족주의의 악취를 내뿜고 있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었다.

우리는 유례없는 불확실성의 영역에 서 있다. 1683년 9월 12일 비엔나 전투에서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슬람 오스만제국이 비엔나 점령을 포기하게 만들었을 때와 유사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그로부터 318년 뒤인 2001년 9월 11일, 19명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항공기 두 대를 납치해 그때의 상실에 대해 앙갚음하고 역사의 진로를 바꿨다. “역사의 종말”은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역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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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김진우

전략분석실

김진우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전략분석실장이자 수석연구위원이다. 미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에서 선임분석관으로 정책, 군사, 정보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미 전략사령부 (STRATCOM)와 NATO의 핵 억지력 및 타격작전에 대해 자문역할을 수행 하였고, 미 국무부 검증∙준수∙이행국 총괄 선임고문으로 재직했다. 미 국무부에 합류하기 이전, 미 국방부 산하 총괄평가국 국장이었던 Andrew Marshall의 특별 보좌관을 역임했다. 김진우 박사는 미 조지타운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