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전쟁으로 시작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무역 정책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같은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의 통상정책이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 여건을 악화시키고 해외 자본의 투자를 위축시켜 통화의 가치 하락과 금융시장의 불안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인도네시아, 태국, 그리고 한국을 강타했던 아시아 금융위기는 지역 경제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당시 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환율 급등과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고,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였다. 당시 위기 대응을 위해 IMF가 개입했지만, 강력한 긴축을 요구하는 정책이 IMF 관리 체제에 돌입한 국가들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국내 경기 회복을 더디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할 경우 일본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1997년 ‘미야자와 플랜’을 바탕으로 ‘아시아통화기금(Asia Monetary Fund·AMF)’의 창설이 논의됐지만, 미국의 반대로 좌절됐다. 당시 미국이 반대한 이유는 IMF에 비해 관대한 조건을 보장하려는 AMF 구상이 미국의 정책 기조와 부합하지 않았고, 당시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꺼렸다. 1998년 1월 당시 존 매케인 미 공화당 상원의원도 정몽준 의원과의 만남에서 “왜 미국은 AMF 구상에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하면서 미국이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반대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현재는 여건이 많이 바뀌었다. AMF 제안 당시 미국은 ‘이지 머니(easy money)’로는 아시아 국가 금융위기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해소되기 어렵고 오히려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던 듯한데, 이는 지원 조건의 조정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 질서 유지에 있어 미국의 부담을 줄이고, 그 대신 동맹이나 우방국들의 기여를 확대하기를 원하고 있다. AMF의 창설은 이러한 목적을 충족하기 위해서도 유용하다. 현재 아시아 금융시장은 미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아 국제 경제 등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이고, IMF만으로는 아시아 국가들의 늘어난 수요에 대응하기 어렵다. 중국은 이러한 틈새를 파고들 것이고, 증대된 영향력을 외교적이고 전략적인 압력 수단으로 활용하려 할 것이다.
중국은 2023년 4월 열린 보아오(博鰲) 포럼에서 중국 중심의 AMF 창설을 제안하는 등 아시아 금융질서 내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높이려 노력 중이다. 한국, 일본 등이 중국과 함께 참여하는 AMF가 창설된다면 미국은 동맹국들의 기여를 통해 중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아시아 국가 간 통화 스와프 확대 및 역내 통화 사용을 촉진해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안정적인 금융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이제 우리는 AMF의 창설과 관련해 더 분명하고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AMF의 최초 제안국이었던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AMF의 구성과 역할을 보완하면서도 발전 단계와 전략이 각기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국내외적 논의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 본 글은 3월 28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