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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에 촛불을 켜면 그 빛이 매우 환하게 보이지만, 같은 촛불일 지라도 대낮에는 밝게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강대국이 주도하는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확산시키려는 미국의 움직임은 크고 색다르게 느껴졌다. 그러나 미국의 주도하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세계질서로 자리잡은 지금, 미국의 움직임은 이전만큼 강력한 자극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익숙해서 무뎌지기도 했거니와, 이제는 여러 나라가 촛불을 들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촛불은 이전보다 덜 밝아 보인다. 이는 미국의 촛불이 사그라들더라도 이 밝기를 비슷하게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낳았다.

그러나 만약 미국이 들고 있던 것이 촛불이 아니라 알고 보니 강력한 모닥불이라면 어떨까? 미국이 불을 끄는 순간 빛의 양이 확 줄어들어 불을 밝히고 있는 있는 국가들과 그렇지 않은 국가들 모두가 혼란에 빠지고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로버트 케이건의 <The World America Made>(국내 번역판: 미국이 만든 세계)는, 말하자면 미국이 피운 불은 촛불이 아니라 모닥불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이전보다 덜 밝아 보일 지라도 미국이 밝힌 불은 다른 나라의 불보다는 다방면에서 절대적으로 강력하며, 이 강력한 불꽃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자발적으로 많은 연료를 투자해왔음을 역설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그러나 과연 신생 경제강대국들이 미국의 쇠퇴로 인해 생기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꺼이 나서게 될까?’

The World America Made_picture

미국의 모순: 열성적이지 않은 제국주의자

케이건은 <The World America Made>에서 크게 세 가지를 논의한다. (1) 미국은 어떻게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는가, (2) 미국이 없어도 현재의 세계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인가, (3) 미국은 정말 쇠락하고 있는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적 특징이다. 그는 이 모순을 ‘분열증’이라고 표현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미국인들의 사고에 뿌리 박힌 가장 미국적인 세계관이다. 미국인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여겼고, 이 가치를 다른 나라에도 확산시키고 싶어했다. 미국이 특출나게 선한 국가여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확산이 궁극적으로는 미국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 뒷받침됐다.

그러나 미국은 개인주의를 숭배하는 나라다. 남에게 관여하지 않고, 간섭 받지도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확산시키려는 움직임과는 당연히 상충된다. 케이건은 ‘미국의 건국 이데올로기는 보편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긴장을 내포’한다며 ‘이런 모순 탓에 미국인들은 힘과 권력 일반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힘과 권력에 대해서 모호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그는 더 나아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빠져나갈 출구부터 찾는 미국인들을 ‘스스로 내키지 않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산만하면서도 열성적이지 않은 제국주의자’라고 설명했다.

케이건 주장의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미국의 특징이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행동을 용납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을 꺼려하고, 다른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국제법이나 제도에 간섭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은 미국을 인정했고, 미국은 이전까지의 초강대국들과는 다른 양상으로 국제사회의 리더로 자리잡아 갔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이 강대국들이 경쟁을 벌이는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는 지리적 요소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절대 권력은 갈등을 감소시켰고 국제사회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의 부상은 미국의 쇠락과 함께 자주 언급되지만, 중국은 아직까지 미국만한 국제적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케이건은 중국이 초강대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중국은 자유로운 무역과 시장 유지를 위해 해양 루트를 열어두기는커녕 폐쇄하려는 목적으로 해군력을 이용하고 있고,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낮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산업분야는 개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심지어 중국자본주의는 국가자본주의에 가깝다. 국가권력과 국가지도자들의 생존기회를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미국이 중심이었던 세계와는 많은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류가 진화했고, 현재 세계질서의 장점과 필요성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는 예측은 안일하다.

마지막으로, 케이건은 미국이 과거에도 지금만큼 많은 실패를 겪었고, 지금도 과거만큼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파워는 이전에 비해 심각하게 하락하지 않았을 뿐더러, 애초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 미국에 대한 환상이 너무 과장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트럼프의 당선과 미국의 변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미국이 여느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함재봉 원장은 세계질서의 미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을 들으면서 이미 2012년에 이러한 상황에 대해 경고했던 <The World America Made>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미국이 그냥 여러 패권 국가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릴 수 있다고 했을 때 오는 당혹스러움을 전 세계인이 느끼고 있다. 미국의 변화로부터 야기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고민하고 대안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만들어놓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큰 혜택을 누렸다. 앞으로 한미 FTA를 어떻게 협상해 나갈지, 중국과의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한미동맹은 어떻게 풀어갈지를 고민하려면, 이 책을 꼭 한 번씩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 150쪽 정도의 길지 않은 책이다. 로버트 케이건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제시하면서 모든 주장마다 설득력 있는 근거를 촘촘히 쌓아 올렸다. 문장도 쉽게 쓰였다. ‘한 마리 제비가 봄을 불러오지 않는 것처럼 일회적인 경기 후퇴나 심각한 경제 위기만으로 강대국이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다’, ‘외교정책은 야구에서의 타격과 닮았다. 열 번을 쳐서 일곱 번을 실패하더라도 3할의 타율만 꾸준히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 선수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비유를 자주 사용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환기하고 독자의 이해력을 높였다. 미국이 정말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미국이 쇠락해도 세계질서가 유지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The World America Made>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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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율
권은율

홍보실

권은율 전문원은 아산정책연구원 홍보실에 재직 중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 광고홍보학을 전공했다. 연구원 이슈브리프 '중국 탄도미사일이 한반도에 던지는 함의', '한반도 사드 배치와 중국' 작성에 참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