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북클럽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전 세계 주요 영화 시상식의 단골 손님이다. 아카데미협회는 2월 26일 미국 LA에서 개최될 제89회 시상식을 앞두고 <핵소 고지>, <히든 피겨스>, <재키>, <러빙> 등 다수의 실화 영화를 후보로 올렸다. 이들 영화에는 각각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 나사(NASA) 최초 우주궤도 비행프로젝트에 투입됐으나 흑인이라 차별 받던 여성 전문가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인 재클린 케네디, 타인종 간 혼인을 이유로 1958년 버지니아에서 추방된 백인 남편-흑인 아내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얼핏 보아도 이야깃거리가 많은 인생들이다.

이 달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이 추천하는 두 권의 책, 조지 패커의 <The Unwinding: An Inner History of the New America>(국내 번역서: 미국, 파티는 끝났다)와 J.D 반스의 <Hillbilly Elegy> 역시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아산북클럽] 2월_Pic

<The Unwinding>은 지난 30~40년동안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온 미국인 16명의 생존기를 개별적으로 교차 서술한 전기(傳記)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전 공화당 하원의장 뉴트 깅리치 등 유명인사의 이야기를 담은 챕터도 있지만, 중심이 되는 인물은 남부 시골에서 담배 농사를 포기하고 바이오디젤의 전도사가 되는 딘 프라이스, 월가의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워싱턴 정계의 막후 공작에 매진하다 좌절하는 제프 코너턴, 오하이오의 퇴락한 철강도시의 공장노동자에서 조직운동가로 변모해 생존을 도모하는 태미 토머스 세 명이다.

<Hillbilly Elegy>는 러스트벨트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실리콘밸리의 사업가가 된 반스 본인과 그 가족, 친구들의 이야기다. 반스는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성공했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힐빌리(두메산골 촌뜨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공하거나 좌절하고, 도전하거나 포기하는 등장인물들의 희로애락은 여러 편의 실화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쉬이 ‘영화 같다’거나 ‘재밌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들이 특별한 인물의 독특한 개인 경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 다수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비극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끝나지 않는 비극, 그리고 민심이반

태미 토머스는 영스타운 동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The Unwinding>에 따르면 그녀가 기억하는 영스타운은 현관 베란다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면 하늘로 치솟은 굴뚝이 보이고, 바람결에 유황 냄새가 나는 곳이다. 마호닝 강을 따라 북서부에서 남서부까지 40여 킬로미터 길이로 제철공장이 줄지어 있고 용광로가 24시간 가동되던, ‘제철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였다.

그러나 영스타운은 ‘마치 암이 몸 전체로 서서히 퍼지듯 몰락하기 시작’했다. 지역부재자소유의 제철소는 공장에 재투자하지 않았다. 대신 기계와 부품을 해체해 다른 공장으로 옮겼다. 철강노조는 계약 분쟁에 초점을 맞추었고 회사의 전반적인 생존 여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동자는 나태해졌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밸리에 있는 소규모 공장들이 줄줄이 폐업했다. 그리고 1977년, 마호닝 밸리 최대 공장인 시트앤튜브(Sheet and Tube) 캠벨공장이 폐쇄된다. 연쇄작용으로 영스타운 내 수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범죄는 급증했다.

이후 태미는 제너럴 모터스의 부속품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지만, 이 회사 역시 결국 폐쇄된다. 당시 회사는 전 세계적으로 15만 명의 노동력을 충원했지만, 미국에서 고용된 인력은 2만 명이 채 안 되었다.

<Hillbilly Elegy>의 J.D 반스는 열일곱 살 때 식료품점에서 계산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게에 있다 보면 누가 어떤 물건을 주로 사가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기 마련이다. 어느 날 반스는 정부가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제공하는 ‘푸드 스탬프(Food Stamp)’를 악용하는 무리를 발견한다. 그들은 푸드 스탬프를 사용하여 무료로 가지고 간 식품을 돈을 받고 팔아 넘겨서 이익을 남겼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기 위해 정직하게 근무해온 반스는, 내 월급에서 나가는 연방세금과 주세금이 저렇게 악용되고 있다는 데에 부당함을 느낀다. 그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와인, 담배를 사고 핸드폰을 들고 다녔다. 이야기를 들은 집안 어른들은 ‘그게 지금 민주당이 하고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함재봉 원장은 “현장을 모르는 사회과학자들은 가난한 노동 계층이 당연히 복지 정책을 펴는 진보 정권을 지지하리라고 추측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런 이론과 도식이 전혀 성립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한다.

“민주당은 중산층과 노동 계층을 위한 정책을 펴왔다. 재분배, 복지 정책에 힘썼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최초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의료보험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저소득층, 특히 백인 남성 저소득층은 민주당이 여성, 소수민족, 이민자들을 옹호하는 정책에 더 집중한다고 생각했다. 형편이 나아지길 기대하면서 항상 줄을 서 있었던 이들에게는 4대째 특혜가 오지 않는데, 소수민족, 난민들이 새치기를 한다는 기분을 느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이런 배경 속에서 저소득층의 반감을 노골적으로 건드리고 자극하는 트럼프식 포퓰리즘이 등장한다. 트럼프는 인종주의∙소수민족 혐오주의적 발언을 일삼으며 “다시 미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들은 트럼프의 말과 행동, 사고방식에 열광했다. 민주당은 제45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전통적 표밭인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위스콘신, 오하이오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다수가 거주하는 이들 지역 역시 트럼프의 포퓰리즘 구호에 사로잡혀 부동산 거부인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함 원장은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의 정치 자체가 와해되고 있다”며 “어떤 정당도 지지층이 원하는 정책을 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당선된 후, 뉴욕타임즈는 뒤늦게 <The Unwinding>과 <Hillbilly Elegy>를 포함한 여섯 권의 책을 소개했다. ‘이 책을 미리 읽었더라면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미국의 지식인층이 왜 미국 정치의 향방을 우려하고 있는지, 민주당을 비롯한 각 당들은 왜 당의 미래와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는지, 앞으로 미국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지를 두 권의 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아산북클럽] 2월_Pic2

 

About Experts

권은율
권은율

홍보실

권은율 전문원은 아산정책연구원 홍보실에 재직 중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 광고홍보학을 전공했다. 연구원 이슈브리프 '중국 탄도미사일이 한반도에 던지는 함의', '한반도 사드 배치와 중국' 작성에 참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