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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4년 한일관계는 사실상 잃어버린 시간
● 기-승-전-한일관계 악순환 피해자들
● 정부 갈등에 민간 교류까지 올스톱
● 과거와 현재 직시, 미래로 함께 나가자
 
3월 6일 한국 정부가 일제 징용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먼저 해법을 제시하며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2018년 10월 대법원은 일본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기업의 불법행위를 전제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불하도록 판결을 내렸다. 이후 한국과 일본은 접점을 찾지 못했고, 사태는 장기화됐다. 5년 만에 한국 정부가 제3자 변제를 통한 해법을 제시해 갈등 해결의 물꼬를 텄다.

우리 정부가 선제 조치를 취했지만 부정적인 국내 여론과 일부 당사자들의 거센 반발로 해법이 결실을 볼지 예단하기 어렵다. 아직까지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해 당사자인 미쓰비시 중공업과 일본제철 등 관련 기업들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어 향후 갈등 해결에 난항이 예상된다.

5월 7일 방한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기시다 총리는 정상회담 이후 연 기자회견에서 강제동원과 관련,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했을 뿐 배상 문제 등에 대해서는 진전된 입장 표명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 국민과 국익을 위한 한일관계 중요성을 피력하고, 반일감정을 조장하거나 한일갈등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굳건하다. 지난해 3월 대통령선거 직후 윤석열 당시 당선인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기부터 한일관계 개선을 정부 대외정책 우선순위에 올려놨다. 한국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에 왜 이토록 열심인가. 한일관계 개선은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한일관계 개선은 제1 대외정책
 
한일갈등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며 폭발적이다. 굳이 수십 년간 반복돼온 역사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까지 되짚어 보지 않아도 된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 사죄 발언에 대한 일본의 반발, 2015년 한일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문제 합의와 국내 반발, 2018년 징용 문제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와 국내 반일시위 및 불매운동, 한일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 파동 등 최근 10여 년 사이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모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현재 양국 관계는 한일관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역사와 법, 정치와 경제, 경제와 안보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되짚어 보면 한일관계의 상수로 거론되는 과거사 문제와 이로 인한 양국 갈등은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존재했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 속에 양국 갈등이 고착화되고, 위기가 일상화된 데 있다.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 일본의 외교청서·방위백서 내 독도영유권 주장 등 일련의 사안이 소위 ‘연례행사’처럼 반복되자 한일갈등은 당연시되기에 이르렀다. 국민의 관심도 점차 낮아져 위기감도 크지 않게 됐다. 이처럼 양국 관계 발전을 가로막는 갈등 요소는 항상 그 자리에서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처럼 놓여 있다. 여기에 징용 문제, 위안부 문제 등 사회적으로 주목을 많이 받는 사안이 간헐적으로 한두 번씩 더해져 온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일본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내에 자리한 일본 기업 자산의 강제 매각 절차가 이뤄지며 양국 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이 우려됐다. 이후 일본의 ‘보복성’ 수출 규제와 한국의 반일 시위, 지소미아 파동까지 일어나며 한일관계는 급격히 악화했다. 그럼에도 한일 간 협력해야 할 사안이 많았기에 우리 정부는 역사와 역사 외 문제를 분리하는 ‘투트랙 기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역사 문제에서 시작된 갈등이 경제 문제로 확산됐고, 이는 안보 문제까지 영향을 미쳐 ‘투트랙 기조’는 실현되기 어려워졌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은 상호 간의 교류와 왕래를 완전히 차단시킨 계기가 됐다. 지난 4년여간 한일관계는 사실상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국 갈등이 극도로 고조되면서 한국과 일본 사회의 부정적 기류도 확산됐다. 한국 국민은 자발적으로 일본 제품, 일본 음식을 소비하지 않는 ‘No Japan’ 운동을 벌였고, 일본 내 혐한 분위기도 확산됐다. 2020년 글로벌 대응이 불가피했던 코로나19 초기에도 한국과 일본은 마스크, 의료장비 등 필수 의료 물자조차 공유하지 않았다.

가장 피해를 본 건 아이러니하게도 양국 국민이다. 현해탄 넘어 서로를 향해 던진 돌을 먼저 맞은 건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 한국에 사는 일본 국민이었다. 이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움츠러들어야 했다.

여행, 관광 등 한일교류 최전선에 종사하던 우리 기업들은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유니클로, 아사히 등 일본 기업과 일식업 등에 종사하던 우리 국민들의 심적, 물적 피해도 적지 않았다. 국내 ‘No Japan’ 반일 시위가 한창이던 당시 일본으로 여행 간 한국인들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한국으로 여행 온 일본인들 역시 자국을 비판하는 ‘No Japan’ 현수막과 팻말, 스티커 등을 곳곳에서 마주하며 혹여나 일본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무슨 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해야 했다.

부정적 기류 속 한일교류도 급속히 감소했다. 사업 목적으로 이뤄지던 경제인 교류뿐 아니라 정례적으로 이뤄지던 지자체 간 교류, 공무원 교류, 학생 교류 등도 중단됐다. 사회 분위기가 냉각될수록 더 활발해야 할 정부의 각종 대일정책과 공공외교, 한일교류 지원 사업 등도 급격히 감소했다. 정부에 의해 지지와 지원을 받아야 할 자유로운 민간교류 활동이 정부 간 갈등으로 침해받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자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꿔야 할 정부가 오히려 소극적으로 대처한 탓에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10년 사이 달라진 한일 위상
 
한일갈등은 우리의 대외정책과 한미일 관계, 한·중·일 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북한 문제에 대한 시각과 접근이 달랐던 문재인 정부와 아베 정부는 공조하기 어려웠고, 이는 곧 한미일 협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양국 관계가 악화하면서 한·중·일 정상회담도 개최되지 않았다. 관련국들이 함께 대처해야 할 글로벌 과제에 대한 포괄협력 논의는 공허하게 들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이 추진하는 지역 구상과 대외정책에 일본의 적극적 참여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한일갈등이 고조되며 양국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것을 넘어 한미일, 한·중·일, 동북아, 동아시아 등 지역협력에 대한 구호는 이상에 불과했다. 한일갈등은 서막에 불과했고, 결국 연쇄작용으로 모든 것이 다 막힌다는 ‘기-승-전-한일관계’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세상이 변했다.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던 지난 10여 년 사이 세계는 또 한 번 격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아시아-태평양’보다는 ‘인도-태평양’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됐다. 중국의 부상과 미·중갈등, 미·중 전략경쟁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됐다. 10여 년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경제안보, 전략물자라는 표현이 새롭게 등장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현실화된 신흥 안보 위협은 국가 간 공동 대응 필요성을 높였다.

한국과 일본도 변했다. 세계 경제대국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일본은 2010년대 들어 중국에 역전당하며 3위로 밀려났고, 경제성장률도 하락했다. 반면 한국은 세계 경제 10위권에 들 정도로 성장했고, 디지털·5G 분야 등을 선도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뿐만 아니라 코로나19 시기 디지털 선진화를 통한 K-방역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K-팝, 드라마, 영화 등 K-컬쳐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머지않아 일본의 1인당 GDP가 한국에 역전당할 것이라는 예측 또한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한국과 일본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달라진 한국의 위상과 경제성장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이처럼 달라진 한국의 위상은 영원할까. 일본의 정체는 쇠퇴로 이어질까. 과거에 비해 성장 동력이 떨어진 일본의 내일을 우려하는 이들이 많지만, 일본은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높은 영향력과 발언권을 갖고 있다. 수년간 쌓아온 일본의 외교력과 단단한 네트워크, 국력은 우리가 넘어서기에는 여전히 견고하다. 우리의 내일도 낙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일상화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대만 유사 사태 등 우리를 둘러싼 정세를 볼 때 한국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한지 물음이 생긴다.

격변의 시대에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지 않으면 평화와 번영의 시대 또한 맞이할 수 없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수호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국제사회의 높아지는 파고에 동일한 가치와 생각을 공유하는 한일 양국이 협력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앞날을 대비해 나가야만 한다는 의미다.

 
한일 협력으로 열어야 할 새 시대
 
3월 6일을 기점으로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를 먼저 취하겠다는 큰 결단을 내리면서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 낙관하기 이르다.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 한국 정부가 대법원의 확정판결 3건, 피해자 15명에 대한 징용 문제에 대해서는 해법을 제시했으나 당사자들의 거부와 국내 일본 자산 압류 및 강제집행(현금화)을 막을 수는 없다. 더욱이 징용과 관련해 아직 진행 중인 나머지 소송들과 소송조차 제기하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를 고려할 때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요원하다.

한국 정부의 해법이 법적 부분의 어려움을 해소하려는 시도였지만, 일본의 역사적 책무까지 면제한 것은 아니다.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직시, 피해자 고통에 대한 위로와 공감, 일본 기업의 사죄와 반성 등 적극적이고 성의 있는 호응 조치 없이는 나아갈 수 없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와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문제도 또 다른 악재다. 특히 올해 여름으로 예상되는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의 경우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을 통한 과학적 자료 및 증빙에도 불구하고 주변국의 불신과 불안은 해소되기 어렵다. 일본은 과학적인 자료만 제시할 것이 아니라 주변국의 불안을 불식할 수 있는 성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 당사자로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모습은 주변국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심화시킬 뿐이다.

격변의 시대, 역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로서 한일협력은 불가피하다. 국가와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사안과 사안이 연계되는 복합 경쟁 시대에 같은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해 글로벌 규범을 만드는 과정은 우리의 생존과도 직결된다. 한일 양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직시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 본 글은 신동아 202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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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최은미

지역연구센터

최은미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 미시간대학교와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방문연구원, 외교부 연구원,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연구교수로 재직하였다. 주요연구분야는 일본정치외교, 한일관계, 동북아다자협력 등이다. 국가안보실, 외교부,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