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브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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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코로나19 발생 이후인 지난 2년 여간, 더 길게는 중견국으로서 한국의 역할 강화를 표방했던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의 높아진 위상과 한국의 대외정책 사이에는 일종의 모순과 긴장이 존재해왔다. 코로나19 발생 초기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의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한 빠른 코로나19 초기 대응은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 등 전통적 선진국의 부러움을 샀다.1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문화적 힘도 크게 확산되었다. ‘기생충’, ‘미나리’, BTS와 ‘오징어게임’ 등이 글로벌 대중문화 플랫폼을 석권하면서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2021년에는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도 초청되었다. 개도국 꼬리표를 떼면서 이명박 정부가 중견국임을 선언한 이후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각은 크게 달라졌다. 세계 10위권 경제력으로 보나, 세계 6위권 군사력으로 보나, 거버넌스의 수준이나 민주주의의 질적 차원으로 보나 어느 면에서도 한국은 이제 앞서 나가는 국가다.2

반면 한국의 대외정책, 특히 지역 정책이 이런 앞서 나가는 한국의 외형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다. 한국의 외교정책에는 다른 국가와는 차이가 나는 도전 과제가 많다. 한국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분단과 북한이라는 생존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다. 동북아 지역은 글로벌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지역이다. 우리 주변의 4강 즉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글로벌 차원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몇몇 국가에 포함된다. 그 사이에 한국이 끼어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의 대외정책, 지역정책은 국력과 대외 이미지에 상응하는 한국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거의 선진국에 근접한 한국이지만 지역정책에서는 꽤나 소극적이다. 미중 전략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미중 어느 편을 들지 않는 정책 자체는 탓할 수 없다. 이런 정책이 우리만의 뚜렷한 전략적 목표와 지향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임시변통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곤란하다. 한국을 포함한 지역의 중요한 안보 사안, 지역 질서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의 목소리와 대안이 필요하다. 더 이상 한국은 다른 강대국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무임승차해 이익을 얻는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국가다.

외형적으로는 훌쩍 커버린, 그러나 지역정책에서는 아직 우리 목소리와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지 못한 한국이 이런 식으로 몇 년 더 지나가면 한국은 커진 덩치에도 불구하고 덩치 값을 하지 못하는 국가로 인식될까 우려된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은 어떤 지역정책과 비전을 대외적으로 표방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지금까지 몇몇 역대 정부의 지역 정책을 간단히 살펴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한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한국만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제시하려 한다.

 

역대 한국 행정부의 지역 인식과 전략

 
김대중 정부는 역대 한국 행정부 중에서 처음으로 동북아를 넘어서는 지역적 관점을 가지고 정책을 펼친 행정부로 규정될 수 있다. 물론 김대중 행정부 이전에도 동북아라는 지역적 관점을 벗어나는 몇몇 시도는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있고,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라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한국/동북아를 포괄하는 보다 넓은 지역에 대한 한국의 전략과 관점을 세웠다기 보다는 냉전이 종식된 특수한 상황에서 한국의 국가 이익을 고려해 과거 공산권 국가와 관계 개선 및 기회를 모색한 좁은 범위의 전략이었다. 반면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는 세계에 대한 한국의 관점과 전략이라기 보다는 대외적으로 넓어진 한국의 활동 반경에 어울리는 국내적 개혁, 국민들의 인식 개선, 지식 인프라 확장 등 국내 정책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3

아시아 경제위기와 함께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제1 과제는 경제위기 극복이었다. 이 과제를 경제위기를 함께 맞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지역 국가들과의 공동 대응 및 협력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4 1997년 경제위기 직전 아세안 국가들은 동북아의 한국, 중국, 일본에 정상회의를 제안했고 같은 해 첫 ‘아세안+3(한, 중, 일)’ 비공식 정상회의가 열렸다. 1998년 경제위기를 맞은 지역 국가들은 경제 공동 극복을 위해 아세안+3 정상회의를 정례화 했고 이로써 동아시아 지역 다자협력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한국은 이 ‘아세안+3’이라는 동아시아 지역 다자협력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첫 공식 정상회의 이후 한국은 동아시아비전그룹(East Asia Vision Group, EAVG), 이듬해 동아시아연구그룹(East Asia Study Group, EASG)을 제안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끌고 나갔다. EAVG는 동아시아 지역 다자협력이 지향하는 목표를, EASG는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협력사업들을 제안했다.5 뿐만 아니라 한국은 동남아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동아시아 다자협력의 유일한 산관학 포럼인 동아시아포럼(East Asia Forum, EAF)을 설치하고 주도했다. 김대중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과제에서 출발해 동남아와 동북아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지역을 상정하고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다자협력을 통한 평화와 안정, 공동의 이익 창출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동아시아 지역 협력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후 한국 행정부들의 지역 인식은 대체로 축소지향적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의 힘과 자원은 확대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대외정책 공간과 비전은 동아시아에서 동북아/한반도로 축소되는 모순을 보였다. 김대중 정부를 이은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을 승계하는 동시에 남북한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한반도 문제로 한국의 전략적 시각을 좁혔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동북아 문제의 관리를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담았다. 그 결과가 ‘동북아 허브국가’라는 비전으로 도출되었다.6 물론 여기에는 한국의 성장한 힘에 대한 인식도 담겨 있다. 한국이 과거와 달리 중국과 일본 등 보다 큰 국가들이 포진한 동북아에서 허브 국가가 되겠다는 비전에는 일종의 자신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 확대되었던 한국의 지역 인식이 다시 동북아로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의 뒤를 이은 이명박 정부는 한국의 중견국 선포의 원년이 되었다. 한국이 공적원조 수원국 지위를 벗고 ‘주는 나라’로 변신한 이후 원조 기부자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 DAC)에 가입한 것도 이명박 정부에서이다.7 이명박 정부는 ‘글로벌 코리아’라는 외교 비전과 지역 정책으로 ‘신아시아 외교 구상(New Asia Initiative)’을 제시했다. 갑작스럽게 동북아에서 글로벌 차원으로 대외정책 영역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글로벌 코리아라는 구호에 맞는 글로벌 차원의 역량을 보여주기에 한국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글로벌 코리아라는 구호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핵안보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 세계개발원조총회 유치 등 글로벌 차원의 대규모 정상회의 유치에서 그쳤다.8 신아시아 외교 구상은 동북아에서 동남아, 서남아, 중앙아, 중동까지를 포괄할 정도로 넓은 범위에 걸쳐 있던 외교 정책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지역적 비전이나 전략이 명확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국이 아시아에서 얼마나 많은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는가에 보다 큰 관심을 둔 중상주의적 전략에 가까웠다.9

그 뒤 박근혜 정부의 지역 정책은 다시 축소지향적 모습을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 역시 한반도 문제와 동북아 문제를 중심에 두는 대외정책의 방향으로 나갔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가 동북아평화협력구상(Northeast Asia Peace and Cooperation Initiative, NAPCI)이다. NAPCI는 경제적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국가들 사이 정치적 반목이 심하며 이런 정치적 문제가 경제적 상호의존을 해치고 위기를 가져온다는 ‘아시아 패러독스’(Asia Paradox) 담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동북아 국가들 사이 정치, 안보 등 경성 이슈는 미뤄두고 기후, 환경, 원자력 등 연성 협력으로 시작해 협력의 습관을 기르고 종국에는 정치, 안보 문제의 해결과 협력으로 연결하려는 구상이었다.10 NAPCI의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 박근혜 정부의 대외정책도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한국의 자원, 성장하는 한국의 국력이라는 흐름과 상관없이 지역적 관점에서는 축소지향을 띄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과 지역 인식

 
박근혜 정부의 뒤를 이은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은 의미 있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문재인 정부는 다른 정부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문제, 북한의 위협 관리를 위한 대외정책, 안보정책을 중요 과제로 선정했다. 2017년 북미 사이 극한 대립에 이어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남북대화, 북미대화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입했다. 이와 함께 신남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을 통해 한국 대외정책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시도를 병행했다. 그 중 ‘신남방정책’은 김대중 정부 이후 축소되었던 아세안 지역에 대한 관심과 정책을 다시 부활시켜 한국 대외정책의 범위를 넓혔다. 물론 김대중 정부 이후 정부에서 아세안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별도의 정책 타이틀을 달고 대통령의 정치적 의지를 담은 체계적인 정책 추진은 부재했다.

아세안과 인도를 대상으로 한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다음의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먼저 미국과 중국 사이 점증하는 전략 경쟁 속에서 미, 중이라는 강대국에 함몰된 한국의 외교정책에 변화가 필요했다. 한국은 강대국에 대한 한국의 자율적 공간과 협상력을 확대하기 위해 제3의 연대 세력을 필요로 했다. 이런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는 외교 다변화라는 구호로 나타났고, 외교 다변화에서 신남방정책은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11

또한 2017년 한국의 사드(THAAD)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적 보복, 더 길게는 중국의 경제 성장에 따른 경제정책 변화에 따라 중국과의 무역, 투자에 크게 의존했던 한국 경제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포스트 차이나(post China)의 대안을 동남아와 인도 방면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12 여기에 한국의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지역에 대한 기여라는 부분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명박 정부 이래 중견국임을 자임해 온 한국이 지역 공공재 공급, 특히 지역 개도국의 경제성장 등에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다.13 한국의 지역적 공공재의 공급, 지역적 기여는 가장 가까운 동남아 지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했고 이런 인식은 신남방정책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이런 대외정책 인식을 바탕으로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3P 즉 사람(people), 번영(prosperity), 그리고 평화(peace)라는 원칙 아래 아세안 및 인도와 거리를 좁히는 협력에 많은 자원을 투입했다.14 ‘번영’이라는 원칙은 과거 한국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했던 경제협력 관행에서 벗어나 한국의 아세안 지원이 아세안의 경제 성장으로, 아세안의 경제 성장이 다시 한국의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인식 아래 장기적 선순환 구조를 모색했다. ‘평화’ 협력은 과거 한국의 대동남아 접근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 지지를 일방적으로 요구했던 식이라면 평화 협력을 통해 한국과 아세안이 강대국 경쟁은 물론 지역 전반의 평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는 것을 상정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인적 교류를 비롯한 전반적인 사회문화 관계의 강화뿐만 아니라 모든 협력의 기초에는 사람이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했다.

2019년 한-아세안 관계 수립 30주년을 기념한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신남방정책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정책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런 한국 정부의 정책 의지는 코로나19와 함께 중대한 도전을 맞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된 인적 왕래는 실질적인 협력사업의 전개를 어렵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2020년 말 보건과 방역 협력에 강조점을 둔 신남방정책플러스를 발표하고 신남방정책 추진에 대한 의지를 이어나갔다. 과거 3P 하에 조직된 협력의 내용들을 1) 포스트 코로나19 포괄적 보건의료 협력, 2) 한국형 교육모델 공유 및 인적자원 개발 지원, 3) 쌍방향 문화교류 촉진, 4) 상호 호혜적이고 지속가능한 무역, 투자 기반 구축, 5) 공동번영을 위한 미래산업 협력, 7) 안전과 평화 증진을 위한 초국가협력이라는 7개 항으로 정리, 선택과 집중의 방향으로 나갔다.15

신남방정책의 꾸준한 추진은 아세안 국가들이 한국의 정책에 가졌던 의심을 해소했다. 아세안 국가들은 과거 한국 정부가 아세안에 가졌던 관심이 유지되지 못하고 금방 사라지는 부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곤 했다.16 한국의 대아세안 정책이 일관성과 연속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적어도 이런 일관성과 연속성 문제는 해결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한반도에서 북미관계, 남북관계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코로나19로 인해 정책 추진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남방정책은 꾸준히 추진되었다. 문재인 정부의 꾸준한 신남방정책 추진은 아세안 국가로부터 적어도 일관성에 관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17 신남방정책은 국내적으로 제도의 개선, 국민 인식의 고양을 통해서 대아세안 정책을 향후에도 지속 추진할 수 있는 기반도 형성했다. 뿐만 아니라 신남방정책은 추진 과정에서 미국, 호주의 인도-태평양 정책을 만났고, 미국과 호주의 인태 전략과 신남방정책의 협력을 모색해 확장성도 갖췄다.18

이런 성과를 놓고 평가를 하면 신남방정책은 축소지향으로 가던 한국의 지역적 관점과 외교의 영역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확대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신남방정책은 동북아를 넘어서는 지역 관점을 확산시켰다. 한반도와 주변 4강 외교에 매몰되었던 한국 외교에 새로운 방향의 출구를 제공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이를 통해 한국 외교가 다변화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기반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도로 능동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인태 전략과 신남방정책의 협력을 통해 한국의 지역적 비전과 전략을 마련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나름의 평가를 받을 만하다.

 

새정부의 지역정책과 비전 필요성 – ‘한국형 인태 전략’을 향해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신남방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을 바라보는 글로벌 차원, 지역 차원의 시각은 한국이 동북아를 조금 벗어나서 동남아 국가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19 이제 인도-태평양이라는 지역 관점은 더 이상 특정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지역 전체로 통용되고 있는 관점이자 지역의 이름이다. 과거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국가였다가 1998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시작된 동아시아 지역협력 속에서는 동아시아 지역 국가였다. 지역의 범주와 이름은 전략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해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제는 인도-태평양이 한국을 포함한 지역을 지칭하는 새로운 지역의 명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Quad (Quadrilateral Security Cooperation) 국가라고 칭해지는 미국, 일본, 호주, 인도는 일찌 감치 자신들의 인태 전략을 내놓았다. 2019년 아세안 10개국도 공동으로 아세안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관점 (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 AOIP)을 제시했다.20 인도-태평양은 이 지역을 넘어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에서 비교적 빠른 시점인 2018년 인도-태평양 전략을 언급했다.21 미-중 강대국 경쟁의 파고가 높아지는 속에 2020년 영국을 필두로, 독일,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EU의 인도-태평양 가이드라인을 2021년 발표했다.22 지역 국가들 뿐만 아니라 지역을 둘러싼 주요 국가들이 나름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장착하고 있다.

이런 두 가지 변화, 즉 한국에 대해 높아진 기대와 한국을 포함하는 지역의 새로운 명칭 등장과 정착은 한국에게 새로운 방향의 대외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인도-태평양 지역을 포괄하는 한국의 지역적 관점과 전략이 이제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인도-태평양 지역을 단위로 하지 않고, 한국의 포괄적인 지역에 대한 관점과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국의 대외정책은 국내에서는 몰라도 대외적으로는 시대착오적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런 대외정책은 인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지역의 등장에도 따라가지 못하고, 한국의 성장한 국력에 따라오는 책임을 외면하는 정책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 한국도 이제 ‘한국의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점(Kor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 KOIP)’ 혹은 ‘한국형 인태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한국이 가진 역량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음의 몇 가지 원칙 하에 마련되어야 한다. 먼저 능동성, 포용성, 지역성의 원칙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미국, 호주의 인태 전략과 협력하는 형태의 신남방정책은 능동성을 결여한 측면이 있었다. 미국, 호주의 인태 전략이 신남방정책과의 협력을 먼저 요청하고 한국은 여기에 응한 형태의 협력이었다.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한국이 먼저 기존의 인태 전략과 지역 관점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또한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특정 국가나 세력을 배제하는 형태가 아닌 포용성(inclusiveness)을 특징으로 해야 한다. 어느 국가에게도 열려 있는 포용적 인태 전략은 한국에 돌아오는 전략적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다. 또한 어떤 기존의 인태 전략도 특정 국가나 세력을 배제하는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에 포용성은 당연한 원칙이다.23 마지막으로 지역성의 원칙은 인도-태평양은 한국의 전략에 관한 이름이 아니라 한국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region)의 이름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는 것이다.24 한국의 인태 관점이 전략의 성격을 띠게 되면 미국의 인태 전략에 대한 한국의 참여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고 이는 포용성 원칙에 부담이 된다. 대신 한국은 인도-태평양을 철저하게 지역의 이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한다.

다음으로는 이미 신남방정책으로 만들어 놓은 아세안 방면에 대한 성과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자칫 메시지 관리를 잘못하면 한국이 이제 신남방정책을 버리고, 인태 지역 관점으로 나간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이 아세안에서 이런 오해를 사게 되면 지난 4년간 많은 자원을 투입해 만들었던 신남방정책의 성과는 다시 무위로 돌아간다. 다시 한번 한국의 지역 정책은 일관성을 결여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듣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신남방지역을 핵심으로 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동시에 지역적으로 인태 지역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형태로 확장되는 정책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지역적 확장 외에도 협력의 주제 확장 역시 필요하다. 기존 아세안과 협력이 경제와 사회문화 부문에 치중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평가절하된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25 지역 차원에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긴급한 사안들은 상당히 많다. 한국의 협력 범위가 이런 사안들을 포괄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되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아직은 제한된 한국의 능력과 전문성으로 강대국처럼 모든 사안을 다룰 수는 없다. 한국은 지역의 긴급한 사안과 이슈 중에서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공공재를 공급할 수 있는지 잘 검토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한국의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점은 먼저 지역적 확장을 꾀한다. 기존 아세안에 대한 신남방정책은 그대로 추진하면서 인태 지역을 포괄할 수 있도록 오세아니아 방면에 대한 전략과 서남아 방면에 대한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호주, 뉴질랜드, 남태평양 도서국을 포함하는 오세아니아는 신남방정책이 포괄하려 했던 대상이었으나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에서는 이를 포괄하지 못했다.26 따라서 확장된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에서는 이 지역을 포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에 대한 전략과 남태평양 도서국에 대한 전략을 이원화 해서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국가군은 서로 한국과 협력에서 원하는 부분이 크게 다르다.

다른 한편 신남방정책에 포함되어 있던 인도는 분리해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에서 서남아 방면에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남방정책에서 인도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았다.27 아세안과 한국의 기존 협력 관계에 비해서 기존 인도와의 협력은 더 낮은 수준이었고 따라서 자원과 관심이 아세안에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운 정책에서는 인도를 분리해 서남아로 넣고 서남아 안에서도 인도와 여타 서남아 국가들을 별도의 접근법으로 분리해야 한다. 인도 및 여타 서남아 국가와 한국의 협력이 동일한 내용과 수위에서 진행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인태 지역에 대한 관점은 남방 전략(Southern Initiative)으로 세 가지 서로 다른 지역에 대한 전략을 가지게 된다.

한편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과 동북아 평화번영 플랫폼은 한국의 인태 지역에 대한 관점에서 북방 전략(Northern Initiative)으로 묶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인태 지역에 대한 관점이라는 지역 전략은 남방정책과 북방정책으로 대별되며 남방정책 안에는 신남방정책을 핵심으로 오세아니아, 남아시아 방면 전략이 추가되고, 북방에는 동북아와 신북방정책을 계승하는 정책이 자리 잡게 된다. 이로써 지역적으로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인태 지역이 포괄하는 지역 단위를 모두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그림 1. 한국형 인태전략의 개념도>
그림1

 

원칙과 지역적 범위에 이어 마지막으로는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이 가진 비전에 대해서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대외정책이나 지역정책은 많은 경우 명확한 한국의 목소리를 담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한반도 문제, 강대국 동학 등 한국이 고려해야 할 대외적 변수에 압도되어 왔던 탓이다.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이런 과거의 모습에서 진일보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각론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협력 사업들을 제안하는 것 못지 않게 큰 그림에서도 한국의 외형과 능력에 걸맞은 명확한 방향성을 구체화 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이란 큰 비전이 나가야 할 방향을 단언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고 많은 전략적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일반적인 제안은 가능하다. 첫째로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규칙기반 질서(Rule-based Order)가 실현되는 지역이라는 관점에 입각해야 한다.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누구나 준수해야 하는 규칙에 입각한 질서는 힘을 앞세우는 강대국에 대한 중소국가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여기에 다자주의적 관점을 덧붙여 규칙에 의해 운영되는 다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지역 질서라는 미래상은 오히려 강대국의 일방적인 행동을 통제하고 중소국가의 이익을 보호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둘째로 한국의 인태 지역 관점은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누구나 이야기하는 지역의 안정과 평화는 너무 모호하기 때문에 좀 더 구체화가 필요하다.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된 상태에서 출발해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냈으며, 이제 뛰어난 기술과 문화의 힘을 바탕으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 하는 국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경험을 지역에 필요한 형태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경제성장과 사회안정, 민주주의 추구의 방법은 국가 별로, 사회 별로,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인간 안보, 비전통 안보 문제에 대한 해결, 개개인의 안전과 평화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 내지 못한다면 사회적 안정과 평화, 번영은 불가능하며, 이는 곧 국가의 안정과 평화, 번영, 나아가 지역 전체의 안정과 평화, 번영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한국이 지향하는 인태 지역 관점은 개인의 안전과 평화를 바탕으로 사회, 국가, 그리고 지역의 안정과 평화가 공고화 될 수 있다는 비전에 기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큰 그림을 그리는 지역 비전은 어려운 과제이고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 외교부나 어느 특정 부처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범정부차원에서 한국의 인태 지역에 대한 관점을 지휘하고 조율하는 컨트롤 타워가 반드시 필요하다. 신남방정책을 추진했던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는 많은 성과를 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과제도 많이 남겼다. 직접 이니셔티브를 취하고 사업을 운영할 예산이 없다는 점은 큰 문제다. 각 부처의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각 부처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조율하고 조정할 수 있는 권한과 독자적 예산을 가진 컨트롤 타워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정책을 실제로 담당하고 전략을 마련하는 외교부 역시 제도적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실제 경제 협력이나 다른 부분의 협력을 외교부가 모두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부는 해당 부문의 협력을 원활하게 하고 조정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이를 실제로 다리를 놓고 연결할 수 있는 외교부의 역할이 없으면 정책의 집행이나 협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실행하는데 필요한 도구는 정책의 목표와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인태 지역은 기존 외교부의 편제로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넓은 지역을 포괄한다. 따라서 외교부의 지역국을 넘나들며 정책을 조율하고 조정할 수 있는 국 차원 이상의 조직이 외교부 내에 설치되어 정책의 전반을 지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 내 컨트롤 타워처럼 외교부 내 컨트롤 타워도 필요하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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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이재현

지역연구센터 ; 출판홍보실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외교통상부 산하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며, 비전통 안보와 인간 안보, 오세아니아와 서남아 지역에 대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Transnational Natural Disasters and Environmental Issues in East Asia: Current Situation and the Way Forwards in the perspective of Regional Cooperation" (2011), “전환기 아세안의 생존전략: 현실주의와 제도주의의 중층적 적용과 그 한계“ (2012), 『동아시아공동체: 동향과 전망』(공저, 아산정책연구원, 2014), “미-중-동남아의 남중국해 삼국지”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