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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가치 포기 않고 이뤄진
한국 발전모델 중동서 열풍
왕정 UAE와 사우디 필두로
국가주도 인력양성 모색 중
단 `무능한 국가권력`은 문제
 
우리나라는 많은 개도국에 국가역량 키우기의 롤모델로 여겨진다. 한국은 원조 수여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매우 드문 성공 사례다. 우리는 빠른 경제 발전과 민주화 안착에 이어 국제사회 기여 역시 확대했다. 2010년대 초반 이래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인도적 지원, 평화유지군 활동, 대테러 임무를 적극 수행해오고 있다. 현재 레바논의 동명부대, 남수단의 한빛부대, 아덴만의 청해부대가 세계 평화를 위해 활약하고 있으며 2021년 한국은 유엔 평화유지활동 분담금 규모 10위를 기록했다.

최근 중동 무슬림 세계에서도 한국의 발전 모델을 배우자는 열풍이 뜨겁다. 이곳 나라 대부분은 종교와 전통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나 서구식 자유주의 모델 모두를 불편해하고 의심한다. 사회주의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며 이슬람 세력을 탄압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여러 나라를 직간접적으로 식민 지배했고 이후 미국은 4차례의 중동 전쟁, 레바논 내전, 이란-이라크전, 걸프전, 이라크전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통제와 시장이라는 좌우 이념에 휘둘린 이들 중동 나라에 한국 모델이란 아시아의 전통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도 국가와 사회가 혼연일체되어 시장경제 발전을 빠르게 이뤄낸 주변국의 쾌거다. 국가가 수출 주도 성장이라는 시장 친화적 발전 목표를 제시하고 정부의 당근과 채찍에 반응한 대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고 결국 노동집약적 수출 산업이 부지런한 시민의 삶을 제법 균등하게 개선했다. 중동의 나라들은 한국의 국가, 대기업, 노동자가 오기와 끈기로 의기투합한 모습을 분명히 목격했다. 1970~1980년대 중동의 모래사막에서 밤낮없이 고속도로, 항만, 댐을 만들던 우리 부모 세대의 미담은 오늘날까지 사우디아라비아, UAE, 쿠웨이트의 젊은 세대에도 전해져 회자되고 있다.

특히 중동 리더들은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혁명 이후 한국 모델을 다시금 살펴보고 있다. 당시 독재정권이 급작스레 줄지어 무너졌지만 혁명의 근원지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화에 실패했다. 이집트는 군부독재로 회귀했고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는 장기내전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적 롤러코스터를 지켜보고 경험한 중동의 위정자들은 정권 생존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청년 일자리 창출에 몰두하며 심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과연 1970년대 한국 발전 모델이 현재 중동에 적용 가능할까? 중동의 많은 나라에서 사회·경제 문제의 근본 원인은 바로 부패하고 무능한 국가 권력이다. 문제의 해결자 노릇을 해야 할 주체가 바로 문제의 원인 제공자인 셈이다. 이기적 통치 세력과 기회주의적 관료가 국가를 포획했고 이를 견제할 시민 세력은 매우 약하거나 지나치게 급진적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 모델처럼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레시피는 문제를 악화할 소지가 다분하다. ‘워싱턴 합의’를 강조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등은 개도국 발전의 가장 큰 방해물이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의 축소’를 해결책이라고 본다. 하지만 국가를 장악한 중동의 기득권 세력은 스스로 후퇴하지 않는다.

한국 모델을 향한 동경심을 표현했던 UAE와 사우디의 왕세자가 최근 석유 의존 구조와 보수 이슬람 체제의 개혁을 직접 이끌고 있다. 자원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전 경로를 새롭게 탐험 중이다. 정치적 미래가 보장된 군주는 일반 정치인에 비해 단기적이고 국지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다. 이 점은 한국 모델을 적용하고 실행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다. 현재 두 나라는 개혁 현장에 투입할 핵심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청년과 여성의 교육 분야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이들 왕정의 국가 주도형 인력 양성이 중동 발전의 방아쇠를 힘차게 당길지 주목해 볼 만하다.

 
* 본 글은 3월 2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About Experts

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센터 선임연구위원이자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와 법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저서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