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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모델 대신 트럼프 모델이 북한의 비핵화 해법으로 뜨고 있다. 북한이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을 독재자 카다피의 죽음과 연결시키며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리비아 모델 수용 절대 불가를 내세운 북한과 북한의 적대감에 불쾌감을 느꼈다던 미국 사이의 힘 겨루기가 롤러코스터를 탔다. 미국이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한 지 48시간도 안돼 북한의 재고 촉구와 양국 실무협의 착수의 반전이 거듭됐다.

이후 트럼프 모델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어 북·미정상회담의 개최도 확정됐다. 6월 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들고 백악관을 찾은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을 만난 직후였다. 면담 자리에는 리비아 모델을 적극 지지하던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배제됐다. 트럼프 모델의 핵심은 북한의 비핵화에 따른 경제 지원은 물론 체제 보장의 약속이다. 그 첫 단계로 종전선언이 거론되고 있다. 비핵화 방식도 북한의 입장을 많이 생각했다. 지금껏 전문가들이 논의해온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의 빠른 실행`에 대한 강조가 줄었다. 북한이 일방적인 핵 포기 강요라며 반발했기 때문이다. 대신 트럼프 모델은 폐기와 보상의 교환이 천천히 단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며 두루뭉술하게 제안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선 12일 정상회담에서 얘기를 시작해보자고 했다. 뒤에서 움직이는 북·미 실무협상팀은 구체적 의제 내용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회담 날만 기다리고 있을 듯하다.

트럼프 모델은 리비아 모델을 강하게 거부하는 북한을 달래려고 태어났다. 리비아의 독재자가 핵을 포기한 후 최후를 맞았다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2006년 완료된 리비아의 비핵화를 2011년 카다피 죽음의 원인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미국은 2003년 갑작스레 핵 포기를 선언한 카다피 정권과 2006년 국교 정상화를 이뤘다. 리비아의 비핵화에 상응한 미국의 체제 보장이었다. 2년여간의 핵 폐기와 검증 과정에서 제재 해제와 경제 보상, 투자 유치도 단계적으로 실시됐다.

카다피 정권은 2011년 `아랍의 봄` 반독재 혁명으로 무너졌다. 미국과 수교하고 5년이 지난 후였다. 2010년 12월 튀니지의 소도시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아랍 전역으로 퍼졌다. 튀니지, 이집트, 예멘, 리비아, 시리아의 장기 독재 정권이 눈 깜짝할 사이 붕괴 위기에 몰렸다. 결국 시리아를 제외한 네 나라의 정권이 연쇄적으로 몰락했다. 벤 알리, 무바라크, 살레 정권과 마찬가지로 카다피 정권은 민주화 시위대와 체제 수호에서 이탈한 측근 엘리트 때문에 무너졌다. 카다피는 오랜 여론 통제로 인해 자신의 취약한 지지 기반을 제대로 몰랐고 시민들의 분노 폭발에 허둥댔다. 민심을 달래려고 강경책을 철회하니 반독재 여론은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냉혹한 독재자가 흔들리는 걸 지켜본 엘리트는 정권의 미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아랍의 민주화 시위대를 지지했다. 리비아, 예멘, 시리아 사례처럼 독재 정권의 강경 유혈 진압 때문에 내전으로 확대된 경우 반군을 지원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민간인 보호를 결의했다. 결국 나토군의 공습 지원으로 반군이 전세를 이끌었고 카다피는 최후를 맞았다.

북한의 핵 물질·시설·능력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리비아 모델의 2년여 폐기 과정 적용이 어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북한의 체제 안전을 위해 리비아 모델을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리비아를 비롯해 대부분의 독재 체제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진 민주화 시위로 무너졌다.

장기 독재 체제하에서 억눌려온 불만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극적으로 폭발해 정권의 불안한 균형을 무너뜨린다. 혁명 발발과 독재 몰락의 불가측성 때문이다. 이때 독재 정권의 앞날은 외부의 체제 안전보장이 아닌 내부의 장악력과 통제력 정도에 달려 있다. 트럼프 모델이 어떻게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본 글은 06월 11일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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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향
장지향

지역연구센터

장지향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중동센터 선임연구위원이자 센터장이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2012-2018)을 지냈고 현재 산업부와 법무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학사, 정치학 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연구 분야는 중동 정치경제, 정치 이슬람, 비교 민주화, 극단주의 테러와 안보, 국제개발협력 등이다. 저서로 «최소한의 중동 수업» (시공사 2023), 클레멘트 헨리(Clement Henry)와 공편한 The Arab Spring: Will It Lead to Democratic Transitions?(Palgrave Macmillan 2013), 주요 논문으로 『중동 독재 정권의 말로와 북한의 미래』 (아산리포트 2018), “Disaggregated ISIS and the New Normal of Terrorism” (Asan Issue Brief 2016), “Islamic Fundamentalism”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와즈 게르게스(Fawaz Gerges)의 «지하디스트의 여정» (아산정책연구원 201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