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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세미나 참석차 뉴질랜드에 다녀왔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 직전이어서 한·뉴질랜드 협력에 대한 기대가 회의장에 가득했다. 대통령의 9년 만의 뉴질랜드 방문은 좋은 선택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교 지평을 넓히고 실질협력을 확대할 때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뉴질랜드에서도 북한 문제를 우선시한 것이다. 뉴질랜드는 잠재력이 큰 나라다. 인구는 우리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국토 면적은 2.5배, 해양영역은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포함할 경우 수십배에 달한다. ‘반지의 제왕’으로 잘 알려진 영화산업은 미국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영화계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한류와 잘 접목된다면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 방문에서도 북한 문제가 블랙홀처럼 다른 이슈를 삼켜버렸다.

최근 우리 외교는 북한만 보인다. 하지만 정작 대다수 국가는 북한에 관심이 없다. 문제아였던 북한이 핵을 내려놓고 인권을 존중하는 정상적인 체제로 바뀌기를 희망하는 수준이다. 이들에게 북한은 협력 파트너인 한국이 원하는 수준의 외교적 호응을 해주는 정도다. 게다가 대부분이 미국과도 긴밀한 협력을 하고 있어 한국 정부의 의견이 미국 정부와 다를 경우에는 미국의 입장을 따른다. 지난 10월의 유럽 방문이나 이번 뉴질랜드 방문에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나 ‘제재 유지’ 목소리가 반복된 근본적인 이유다.

많은 국가가 한국의 대북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북한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북한은 보다 유리한 핵협상을 위해 미국과 팽팽한 줄다리기 중이다. 한국 정부의 입장도 안중에 없는 모습이다. 먼 국가의 여론에 흔들릴 북한이 아니다. 우리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이 한가해 보이는 이유다.

반면 세상은 빨리 돌아가고 있다. 뉴질랜드 방문 직전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심상치 않은 정상회담을 가졌다. 정면충돌 대신 90일간의 휴전을 갖고 무역전쟁 해법을 논의하기로 했지만 미·중경쟁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한국에는 더 높은 무역장벽이 다가오고 있고, 미·중의 사이에서 ‘인도·태평양’과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참여를 동시에 요구받는 샌드위치가 돼가고 있다.

이런 위기의식이 있었다면 이번 뉴질랜드 방문에서는 북한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중국을 제일의 무역 파트너로, 미국을 동맹 파트너로 하는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뉴질랜드와 보다 포괄적인 협력의 기반을 조성해야 했다. 아세안 국가들을 한 축으로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태평양 도서국을 다른 한 축으로 신남방정책을 정교하게 다듬고 어떻게 실질협력을 확대할 것인지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남겼어야 했다. 다가올 미·중경쟁의 파도를 완충시키는 배후지를 조성해야 했다. 물론 정부도 이런 고민을 했겠지만 정작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문제에 가려져 버렸다.

북한 비핵화 협상은 교착 중이다. 11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방문 취소 이후 미국은 상황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답방에 미련을 두고 있는 우리 정부와 다른 모습이다. 서울에 와서 구체적인 비핵화 약속을 하면 좋겠지만 아직은 희망일 뿐이다. 협상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구체적인 신고와 검증을 거부하는 북한을 볼 수 있다. 그 행보가 과거와 똑같은데 아직도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운운하고 있다.

뉴질랜드에는 키위새가 산다. 그런데 키위는 새임에도 날지 못한다. 자신을 잡아먹는 포유류 짐승이 없었던 뉴질랜드에서 키위는 땅 위에서 쉽게 먹이를 구하며 편히 살아왔고, 그 결과 하늘을 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됐다. 위기의식이 없으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외교도 마찬가지다. 뉴질랜드에는 키위가 날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이 있지만, 한반도가 위치한 동북아는 다르다.

 

* 본 글은 12월 06일자 세계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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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안보통일센터

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