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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4일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 주재 북한 대사인 강철을 ‘외교상 기피인물’로 지정하고 48시간 이내에 출국할 것을 통보했다. 그 배경에는 자국 내에서 벌어진 김정남 암살사건으로 인한 북한과의 갈등이 있었지만, 추방의 직접적인 이유는 달랐다. 강 대사가 기자회견을 통해 말레이 경찰당국이 발표한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이를 자국에 대한 모욕으로 보고 강 대사를 추방한 것이다.

외교상 기피인물을 일컫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는 라틴어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다. 하지만 외교관계에서는 수교국에서 파견된 외교관의 부적절한 행위를 이유로 그에 대한 외교적 특권 부여를 중단하고, 본국으로 추방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특정 외교관이 불법행위에 연계되어 있거나 또는 주재국의 명예를 훼손할 경우, 이로 인한 추가적인 외교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해당인사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강제 출국시킬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외교관의 활동을 둘러싼 접수국과 파견국의 갈등이 워낙 많았던 관계로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은 외교상 기피인물 지정을 주재국의 권리로 명시하고 있다. 동 협약 제9조에 의하면 주재국은 어느 때든 자국 결정에 대한 설명없이 파견국의 외교관을 기피인물로 지정하고 파견국 정부에 통보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지정의 이유를 설명해줄 필요가 없을 만큼 외교관 개인의 권리보다는 국가관계의 중요성을 더욱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의 냉면 발언으로 한국사회가 들썩였다. 국가를 대표해서 방문한 우리 기업인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는 식의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는 정황증거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사실관계가 불확실하다며 진화하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입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리선권은 여러 차례 우리 기자단에 대해 무례한 발언을 했고, 대화의 상대방인 조명균 장관을 무시해왔다. 그 결과 왜 북한은 항상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지 하는 실망감과, 왜 우리 정부는 매번 북한에 저자세로 일관하는가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표출되며 여론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사실 리선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의 주범으로 알려진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협상의 간판으로 내세우고 있다. 남북관계에는 전통적인 통일전선부 일꾼들이 건재하고 대미관계에는 리용호 외무상과 같은 대미 외교라인이 있음에도 굳이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을 협상의 중심에 배치했다. 한미 양국이 모두 불편해 하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심리적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건지, 그 진의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비핵화 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모습에서 진정성이 보이질 않는다. 1 년 안에 비핵화를 한다거나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내에 비핵화를 한다는 약속을 우리 정부를 통해 미국에 전달했지만, 협상이 진행된 지 수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신고와 검증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모습이다. 자신들의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는 뒤로 미루면서도 대북제재를 먼저 해제해줄 것을 요구하며 “적대세력들이 악랄한 제재 책동에만 어리석게 광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북한이 또 미뤄진 뉴욕 북미 고위급 회담이나 내년 초로 예정된 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신고·검증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협상 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협상태도의 변화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북관계든 북미관계든 모든 국제관계에서의 협상은 신의성실(good faith)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화의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느 일방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닌 양측 모두가 윈-윈하는 협상의 출발점이 바로 신의성실 원칙이다. 외교적 결례를 범한 인사를 추방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기피인물 제도 역시 신의성실 원칙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김영철과 리선권이 보여준 그간의 행적을 고려할 때 이들을 협상장에서 떠나보내야 할 시기가 점점 더 가까워져 오는 것 같다.

 

* 본 글은 11월 8일자 디지털타임스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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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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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