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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남북관계 변화 없어… 새로운 의제보다 과거 내용 살펴야
남북기본합의서 이행했다면 평화공존의 단계에 이미 진입했을 듯

3월 16일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회가 구성·가동되기 시작하면서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달성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장인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한반도 비핵화, 항구적 평화 정착, 그리고 남북 관계의 새롭고 담대한 진전을 위한 의제에 집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남북 정상회담에서 집중했던 경제·사회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 문제가 아닌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결정하는 핵심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고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경제·사회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촉진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상황을 안정과 평화의 길로 나가게 한다는 기능주의적 접근, 혹은 쉬운 문제부터 시작하여 어려운 문제로 단계적으로 옮겨가자는 접근은 이미 수차례 실패했기 때문이다.

안보 상황이 변화했기 때문에 새로운 의제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남북 관계에서의 변화가 없기에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기보다는 과거 남북한이 합의한 것들을 살펴보고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만하다. 문재인 정부는 6·15공동선언과 10·4공동선언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남북 관계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제반 분야를 포괄하는 합의를 담고 있는 것은 1991년 12월에 남과 북이 합의하고 이듬해 2월에 발효시킨 남북기본합의서(공식 명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다. 기본합의서에는 화해, 불가침, 그리고 교류와 협력에 관한 사항들이 담겨 있다. 또한 1992년 9월에 채택된 부속합의서들도 각 분야에서 실행해야 할 구체적인 조치와 이행 방안들을 담고 있다. 또한 1991년 12월 31일 채택한 비핵화공동선언에는 남과 북이 당사자가 되어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활용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고 본다. 먼저,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합의된 사항을 확인하고 살려 나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용이한 면이 있다.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는 화해와 불가침, 교류와 협력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협의와 합의의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이행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또한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종전선언(終戰宣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 보수층은 종전선언은 자칫하면 현 안보 상황에 대한 착시현상을 불러오고 현재 유지되고 있는 정전협정 체제를 급격히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기본합의서에는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될 때까지 남과 북은 정전협정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북한은 정전협정 체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 북한이 기본합의서의 복원과 이행에 합의한다면 우리는 평화 체제로의 전환 절차를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보장 장치를 확보하게 되어 안정적 전환을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6·15나 10·4공동선언에 비해서 기본합의서에 대한 논란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에서 국민적 합의 도출이 용이할 것이다. 또한 북한에 요구하기도 수월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선대의 유훈을 강조한다면 그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 시대에 만들어진 기본합의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유훈을 거스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이용해야 한다. 비핵화공동선언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부 조항, 예를 들어 우라늄 농축이나 재처리 권리를 포기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비핵화 문제에서 당사자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화해와 협력의 단계를 넘어 평화 공존의 단계에 이미 진입했을 것이다. 제1차 북핵위기가 시작되면서 북한은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합의와는 정반대되는 행동을 취해 왔다. 만일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 두 개의 합의를 복원하고 이행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고 불완전한 합의를 이루기보다는 과거의 것을 살리는 방향에서 접근하면서 북한의 의도를 확인하고는 이행을 보장하는 것을 추구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만하다.

문제는 이행에 있다.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기에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은 사문화되었다. 이행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고 이행을 안 했을 시에 지불해야 할 비용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유지되고 있는 제재와 국제공조이다. 북한의 호응과 이행의 정도에 따라 제재와 압박을 풀고, 반대로 이행을 거부할 경우에는 그 이상의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점을 북한이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대화 시작만으로는 제재 이완도, 선물도 없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 본 글은 03월 20일자 동아광장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About Experts

최강
최강

원장

최강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이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국립외교원에서 기획부장과 외교안보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동 연구원에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교수로 재직하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는 미주연구부장을 지냈다. 또한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아태안보협력이사회 한국위원회 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한국국방연구원에서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국제군축연구실장,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국방현안팀장 및 한국국방연구 저널 편집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기획부 부장으로서 국가 안보정책 실무를 다루었으며, 4자회담 당시 한국 대표 사절단으로도 참여한 바 있다. 1959년생으로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고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구분야는 군비통제, 위기관리, 북한군사, 다자안보협력, 핵확산방지, 한미동맹 그리고 남북관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