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브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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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아세안에게 어떤 협력 대상인가, 어떤 협력의 장점을 내세울 것인가는 한국과 아세안 관계 발전, 더 좁게 보면 신남방정책 추진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아세안에 접근하는 미국, 중국, 일본, 호주 등 주변국가들이 한국에 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많기 때문에 한국은 늘 한국만의 장점, 매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고민한다. 더욱이 미국의 인도-퍼시픽 전략 (Indo-Pacific Strategy)과 중국의 일대일로 (Belt and Road Initiative, BRI)가 충돌하는 현 시점에서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하다. 한국은 전략적, 경제적,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협력 대상인 아세안과 협력 강화를 위해 강대국 경쟁의 틈바구니를 파고 들어야 하며 한국 만의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 이 답을 찾기 위해 미, 중 강대국 경쟁에 대해 아세안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파고 들어갈 틈을 만들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아세안 입장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 사안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다. 중국이 2000년대 말 부터 남중국해에서 공세적인 모습을 보이고 미국은 이에 대해서 피봇 (pivot) 혹은 재균형정책 (rebalancing)으로 대응했다. 이로부터 10여 년간 이어져 온 강대국 경쟁이 현재 시점에서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도-퍼시픽 전략으로 구체화되어 격화되고 있다. 강대국 경쟁이 강화될수록 강대국 경쟁에 끼인 아세안 국가들의 전략적 고민은 깊어 간다. 최근 미중 무역 전쟁이 단순한 무역 문제를 넘어 지역 및 글로벌 패권과 관련된 보다 근본적인 경쟁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아세안의 근심은 더욱 커지고 있으며 공개적으로 미중 사이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1

미-중 경쟁 속 아세안의 인식과 대응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강대국 경쟁이 가져오는 전략적, 경제적 불안정성에 따른 강대국에 대한 불신 증가와 최대한 이를 상쇄하려는 아세안의 대안 모색이다. 일대일로로 요약되는 중국의 대 아세안 접근은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동남아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가졌던 의심을 다시 강화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Trump) 행정부의 대 동남아 정책 부재는 트럼프의 다자주의에 대한 무시와 겹쳐 동남아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실망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지난 오바마 (Obama) 행정부의 피봇 정책과 트럼프 행정부의 동남아 정책 부재가 극단적으로 대비되면서 미국에 대한 실망감은 그 어느때 보다 크다.

이런 아세안의 전략적 고민은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는 한국에게 큰 시사점이 있다. 한국이 신남방정책을 통해서 거대한 지역적 구상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아세안과 양자 관계 강화라는 소박한 목적 만을 추구한다 해도 아세안과 한국을 똑같이 둘러싼 미-중 경쟁과 갈등이라는 변수는 중요하다. 아세안이 중국과 미국, 그리고 이 두 강대국의 전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신남방정책의 입장에서 반드시 고려해야할 사안이다. 한국의 대 동남아 접근, 신남방정책의 전략적 협력 분야는 그 대상인 아세안 국가들의 고민을 반영해야 한다. 지역 중소국가간 강대국 경쟁 관리를 위한 평화협력이 신남방정책이 나갈 방향이며, 그 방법론은 다자협력과 대화의 강화다.

 

중국과 일대일로에 대한 아세안의 불신

시기와 사안에 따라 미국과 중국에 대한 동남아 국가들의 인식은 단기적으로 큰 진폭을 보인다. 그러나 미-중 경쟁이 지역에서 시작된 이후로 장기적인 방향을 보면 미국과 중국에 대한 동남아 국가들의 신뢰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올해 초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가 펴낸 State of Southeast Asia 2019 서베이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과 중국 모두 동남아에서 신뢰를 잃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 미국이 전략적 파트너로서, 또 지역의 안보 제공자로서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68%의 응답자가 부정적 반응을 나타냈고, 중국이 선의를 가진 강대국이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8.9%의 응답자만이 긍정적 답을 했다. 동남아를 둘러싼 주요 강대국 중 불신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중국 (51.5%)이었다. 그 뒤를 잇는 국가가 미국 (50.6%)이었다. 반면 두 국가에 대한 신뢰도는 미국이 27.3%였고, 중국의 경우는 19.6%에 불과했다.3

미국과 중국에 대한 신뢰도
<출처: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 ASEAN Focus. No. 26. January>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해 아세안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가 약속하는 경제적인 지원은 아세안 입장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세안은 중국 입장에서 남중국해 문제 관리 뿐 아니라 해양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일대일로의 성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BRI를 통해서 아세안에 대해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남중국해 갈등을 무마하고 아세안 국가들을 회유하려 하고 있다.4 반면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가져올 전략적인 부담 내지는 구속이라는 일대일로의 어두운 측면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의 서베이 결과를 보면 일대일로에 대한 평가를 보면 결국 일대일로가 아세안 국가들을 중국의 영향권 (China’s orbit)에 포함시킬 것이라는 견해가 1위를 차지했다 (47%).5

BRI에 대한 아세안의 인식

<출처: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 ASEAN Focus. No. 26. January>

이런 중국의 정책에 대해 아세안은 복잡한 속내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경제적 지원은 개별 국가의 경제성장 뿐만 아니라 아세안공동체 건설을 위한 아세안 연계성 (ASEAN connectivity) 증진을 위해서 필수적이다.6 중국을 제외하면 아세안 개도국의 성장이나 인프라 건설을 위한 막대한 자본을 동원해 동남아 국가를 지원해줄 수 있는 국가가 거의 없다. 경제적인 측면만 놓고 본다면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의 지원을 환영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동남아에서 가장 저개발 국가에 속하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국과 밀착해 있고, 그 반대급부로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국가 중 하나다. 한 예로 중국의 투자가 캄보디아에 급증하면서 중국의 영향력 증가, 중국인 노동자 증가 등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에 대해 캄보디아 총리 훈센 (Hun Sen)은 중국이 캄보디아를 침략(invade)한다는 소리는 미친 소리라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7 그로부터 3개월 후 중국을 방문한 훈센은 중국으로부터 6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8

반면 오래된 중국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강력하다. 냉전시기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의 공산주의 수출에 대해 우려했다. 공산주의 수출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지만, 그 근저에 깔려 있던 중국에 대한 불신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결국 중국 경제에 대한 종속, 나아가 중국에 대한 전략적 종속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대해서 우려를 가지고 있다. 특히 남중국해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국가들은 이런 인식이 강하다. 흔히 친중적이라 평가되는 국가에서도 학자, 여론주도층은 명확하게 이런 위험성을 인식하고 중국을 경계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의 서베이에 따르면 동남아 국가의 전문가 45%는 중국이 향후 현 지역질서를 바꾸는 수정주의 강대국 (revisionist power)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는데, 이런 견해는 중국의 미래에 대한 평가 중 1위를 기록했다.9

무엇보다 2018년 동남아 국가들 사이에서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인식이 그 어느 해보다 강했다.10 연초부터 일대일로 사업의 지원을 받은 국가에서 부채 문제가 불거지면서 동남아 전반에 걸쳐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다.11 말레이시아에서는 정권 교체가 일어나면서 일대일로의 지원을 받은 사업들이 재고되었고 다른 동남아 국가에서도 일대일로에 대한 재고가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중국의 투자가 국가 경제나 국민의 경제 성장과는 무관하게 중국의 경제적 영토 (enclave)를 만든다는 견해도 있다.12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대한 중국의 부동산 투자, 서비스 부문 투자가 중국인 소유의 호텔, 카지노, 식당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타운을 만들고,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관광객은 이 중국인 소유의 호텔, 카지노, 식당을 돌며 시간을 보내다 중국으로 돌아간다. 이런 중국의 투자가 지역 경제에 가져오는 효과는 거의 없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는 간단히 정리하기는 곤란하지만 경제적으로 취약한 국가는 중국의 경제 지원이 가져오는 혜택에 보다 관심을 두고 있고,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국가는 경제적 지원이 가져오는 전략적 부담을 크게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자의 예로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가 대표적이며, 후자의 경우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이 대표적이다. 또 단순 경제 상황을 넘어서 개별 국가의 국내 정치도 대 중국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어 개별 국가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매우 복잡다단하다. 개별 국가의 민주주의, 인권 문제에 대한 서방 국가의 비판으로 인해 친중국적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고(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등), 이전 정부와의 차별성을 위해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경우 (말레이시아)도 있다.

 

미국과 인도퍼시픽 전략에 대한 신뢰 저하

동남아에서 미국의 soft power는 중국에 앞서지만 지리적 거리, 불확실한 군사적 관여, 동원 가능한 경제적 자원에서 미국 역시 아세안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국가들 입장에서 중국으로부터 유래하는 안보 불안, 전략적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미국 만한 대안도 없는 것 역시 현실이다. 냉전이후 20년 이상 동남아 지역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미국은 피봇 정책 실시 불과 2~3년만에 중국이 1990년대부터 20년간 동남아에서 만들었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잠식했다.13 이는 여전히 아세안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일정한 신뢰와 중국에 대한 확신 부족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은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피봇 정책에 대해서 대체로 환영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환영의 입장은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 정도와 상관없이 일관되게 나타났었다.

문제는 현 트럼프 행정부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보이는 대 아시아 혹은 대 아세안 정책의 혼선은 미국의 대 아시아, 아세안 관여가 지속가능하고 연속성이 있으며 일관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이 크게 기대했던 환태평양경제협정 (Trans-Pacific Partnership, TPP)에서 철수한 것이 미국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는데 크게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국가들은 미국이 남중국해에서 강력한 억지력이나 그에 상응하는 군사적 관여를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했으며, 향후에도 설득력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바마 정부와 달리 동아시아정상회의 (East Asia Summit, EAS)에 참여하지 않는 등 동아시아 지역 다자협력 제도에 무관심 하다는 점이 동남아 국가로서는 큰 부담이 된다.14

미국 정부가 주장하는 인도-퍼시픽 전략이라는 개념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존재한다. 사실상 4자안보협력 (Quadrilateral Security Cooperation, Quad: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추동하는 인도-퍼시픽 전략 혹은 지역 개념에 대해서 아세안 국가들은 큰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 없이 관망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15 이런 관망하는 자세는 다시 말하면 아직 아세안이 인도-퍼시픽 전략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의문들은 정확하게 인도-퍼시픽 전략이라는 생각이 무엇을 말하는지, 인도-퍼시픽 구도 안에서 아세안의 위치에 관한 질문, 즉 아세안이 인도-퍼시픽 전략의 일원인가? 핵심적 세력인가? 개별국가들은 어디에 위치하나? 그리고 인도-퍼시픽 전략이 궁극적으로 중국과 대결적인 방향으로 가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과 관련이 있다.16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가 발표한 서베이 결과도 정확하게 이 부분을 짚어 내고 있다. 미국의 인도-퍼시픽에 대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응답자들이 (61%) 인도-퍼시픽 전략 개념이 불명확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17

인도-퍼시픽 전략에 대한 아세안의 인식

<출처: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 ASEAN Focus. No. 26. January>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인도-퍼시픽 전략에 관해서 미국 정부 차원에서 언급된 것은 2018년 7월 폼페이오 (Mike Pompeo) 미국 국무장관이 발표한 인도-퍼시픽 경제 전략이 거의 유일하다.18 이 발표도 동남아 국가들의 의구심을 떨쳐 버리고 확신을 주기에는 불충분하다. 무엇보다 동남아와 경제적 관여를 위해 미국 정부가 지출한다는 1억 3천만 달러의 액수는 터무니없이 적다. 미국 정부 입장은 이 지원이 마중물이 되어 사적 부문의 투자가 쇄도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평소 발언을 고려하면 이런 미국의 정책에 큰 기대를 걸기 어렵다. 수사 차원이라도 해외로 나간 미국 기업들의 국내 복귀를 촉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규로 동남아에 투자를 할 기업이 얼마나 있을지 미지수다. 나아가 이미 폼페이오 장관의 연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미 미국 기업들이 동남아 국가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면 더 이상 투자를 기대하기 어렵다. 반대로 미국 기업들의 동남아 투자가 충분치 않다면 이는 미국 기업 입장에서 동남아 시장이 그리 매력적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어떤 상황이든 사적 부문의 동남아 추가 진출은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2018년 한 해 동안 지속된 미-중 무역 전쟁 역시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에 대해서 동남아 국가들이 신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미-중 무역 전쟁 속에서 동남아 경제는 극심한 불확실성에 시달리게 된다. 중국의 대미 수출 둔화는 곧바로 동남아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 가치사슬로 묶어 있는 중국과 동남아 경제의 관계를 감안하면 중국의 대미 수출 둔화는 동남아로부터 중국으로 향하는 중간재, 원료 수출 감소를 의미한다.19 물론 중국에 생산기반을 둔 기업들이 미-중 무역 전쟁을 피해 동남아로 생산기지를 옮길 가능성은 있지만 생산기반을 옮기는 것은 몇 년에 걸쳐 일어나는 일인 반면 직접적 무역 타격은 곧 바로 효과를 드러낸다.

한편 중국의 대미 수출이 둔화되면서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이 중국의 빈자리를 메우며 미국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20 그러나 이런 수출 실적이 마냥 반가운 소식일 수는 없다. 미국 시장에서 중국이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무역 흑자를 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세안 10개국을 모두 합하면 중국 다음으로 많은 대미 무역 흑자를 보고 있다. 베트남은 중국, EU, 멕시코, 일본, 독일에 이어 개별국가로 제 6위의 대미 무역 흑자국으로 연간 거의 4백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미국 시장에서 보고 있다. 따라서 동남아 국가들도 미국의 무역 일방주의로부터 안전하지 않다.21 더 나아가 미-중 무역 전쟁과 그에 따른 글로벌 차원의 경제적 불안정성은 인도네시아와 같은 신흥 시장들의 환율 불안정성을 증가시킨다.22

무엇보다 미-중 무역 전쟁이 단순 경제 이슈를 둘러싼 갈등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전략과 헤게모니 다툼을 내포할 경우 동남아 국가들의 근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아세안 국가와 같은 약소국 입장에서 가장 이익이 되는 강대국 관계는 전략측면에서 강대국의 무관심 속에 자율적 공간을 최대한 확대하고, 경제적 측면에서 강대국 경쟁을 통해 가능한 많은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은 강대국의 전략적 경쟁 속에 자신들의 자율적 공간이 축소되거나 강대국 충돌로 인해 직접 피해를 입는 것이다. 미중 무역 경쟁은 단순한 무역 경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중국의 도전을 차단하려는 미국의 대중 정책이라는 견해가 점차 강해지고 있다.23 미-중 경쟁이 새로운 지정학적 냉전으로 가거나 전면 충돌로 비화한다면 동남아는 이 충돌의 격전장이 되거나 미-중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전략적 딜레마에 놓이게 될 것이다.

 

다자협력과 아세안 버전의 인도퍼시픽

격화되는 미중 경쟁 속에 아세안도 기존의 헤징 등 방법 외에 나름의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인도네시아가 제시한 아세안 차원의 인도-퍼시픽 (Indo-Pacific Outlook)이다. 물론 아세안 국가들이 저마다 다른 전략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아세안 차원으로 하나의 단일한 전략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2017년 말부터 아세안 판 인도-퍼시픽이라는 대항 담론을 꺼내 들고 미-중 경쟁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24 인도네시아 정부는 2017년 말 아세안의 인도-퍼시픽 담론을 만들어 2018년 8월 아세안외교장관회의에서 이를 회람한 바 있다. 2018년 말 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는 정상차원에서 이를 논의한 바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2019년에 이를 더욱 논의하고 정교화 하여 아세안 차원의 대항담론으로 제시하려 하고 있다.

이 아세안판 인도-퍼시픽의 주요 내용은 아직 공개적으로 밝혀진 내용이 없고 정부간 논의의 단계로 그 주요 내용은 비공개이다. 그러나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로는 인도-퍼시픽이라는 새로운 지역적 개념은 인도양과 태평양의 경계점에 있는 아세안 국가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지역 공간이라는 합의 하에 이를 어떻게 아세안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개념은 개방성, 투명성, 포용성, 규범에 기반한 질서 (rule based order)를 기본으로 하면서 아세안 중심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미국 등의 인도-퍼시픽이 보다 중국을 봉쇄하는 전략적 개념이라면 아세안의 인도-퍼시픽은 기존의 다자협력, 특히 동아시아정상회의 체제에 기반해 지역 국가들 간 실질적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지역 강대국 경쟁의 부정적 영향을 약화하려는 방향이다. 구체적인 협력의 아젠다로 해양 부문의 협력, 연계성 강화, UN 지속가능 발전 목표 (UN SDG)를 달성하는 것 등을 설정하고 있다.25

이런 아세안의 대안적 인도-퍼시픽 담론은 인도네시아 전 외교장관인 마르티 나탈레가와 (Marty Natalegawa)가 주장한 동적평형 (Dynamic Equilibrium)이라는 전략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26 이 개념은 아세안과 관계된 모든 국가들은 복잡한 지역 다자, 양자 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서 강대국이 자신의 이익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율적 공간과 여지를 축소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세안을 중심에 두고 강대국들을 끌어 들여 최대한 복잡한 헤징을 통해서 강대국의 영향력을 약화, 무력화시키는 전략이다.

아세안 차원에서 중국의 BRI와 미국의 인도-퍼시픽 전략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 속에서 제 3의 길을 모색하는 일은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경제적 의존, 안보 보장 등 다양한 차원에서 강대국에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아세안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벗어나더라도 아세안의 집합적 힘이 강대국에 대항해서 제 3의 세력으로 설만큼 강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경쟁이 아닌 협력을 강조하는 인도-퍼시픽 개념을 제안함으로써 아세안 국가들은 나름대로 미중 강대국 경쟁 속에서 아세안의 독자적인 자리를 넓히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최소한 아세안은 자신들의 인도-퍼시픽 개념을 가지고 협력을 강조해 강대국에 대한 규범적,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강대국의 전략적 담론을 중화 (neutralise)하거나 상쇄 (off-set)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일대일로와 인도퍼시픽 전략 사이 신남방정책의 방향

문재인 정부의 아세안에 대한 신남방정책은 이전의 대 아세안 정책에 비해 진일보한 정책이다. 과거 북한 문제와 중상주의적 경제 협력에 매몰되었던 대 아세안 정책과 달리 신남방정책은 일방적으로 북한 문제만을 거론하지도 않고, 아세안 시장에서 한국의 이익만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사람이 중심이 되는 상생번영과 평화협력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 성과와 구체적 실행여부는 별도로 하더라도 방향성은 옳다. 여기에 더 추가한다면 신남방정책이 이후 정부에서도 지속가능하게 추진되도록 한-아세안 협력 제도화가 좀 더 강화되어야 한다. 특정 정부에서 일회성으로 추진되는 아세안 정책은 한국의 아세안 정책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다. 뿐만 아니라 특정 아세안 국가에 경제협력이 집중된 현 상황을 넘어서 아세안 10개국에 골고루 정책적 관심을 배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신남방정책 추진에 있어서 추가적 고려 요소로 강대국 간 경쟁, 즉 미국의 인도-퍼시픽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 경쟁 사이에서 신남방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무엇을 주의해야 할 것인가를 보았다. 강대국 경쟁 속에서 아세안이 가진 전략적 이익은 아세안의 자율성을 극대화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최대한의 지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아세안이 처한 현실은 강대국 경쟁에 따른 전략적 스트레스의 지속과 아세안 저변에 깔린 강대국 전략적 의도에 대한 불신이다. 한국의 신남방정책은 아세안의 이런 전략적 고민과 현실, 그리고 우리의 전략적 고민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을 공략해야 한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일대일로와 인도-퍼시픽 전략 사이에서 신남방정책은 1) 특정 강대국 및 그 전략과 강한 동조화를 피하는 동시에 아세안 등 지역 중소국가와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2) 한-아세안 사이 안보협력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평화협력으로 전환해야 하며, 3) 지역 다자협력 강화 및 활성화에 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강대국 전략과 동조화를 경계해야

먼저 신남방정책이 채택해야 할 방향성은 중국이나 미국 등 강대국과 강력한 동조화 (syncronise)를 피하고 그 대안으로 지역 중소국가들의 이익을 위한 전략적 네트워킹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중국의 일대일로나, 미국의 인도-퍼시픽 전략 어느 한쪽과 한국의 대 아세안 정책을 동기화 하거나 일치시키는 방향은 피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아세안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 방향, 기본적인 입장, 그리고 아세안의 자율성 추구, 무엇보다 아세안이 현재 미-중 경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입장을 감안하면 한국이 미-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곤란하다.

한국이 중국이나 미국 어느 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경사되거나 특정 이니셔티브와 적극적으로 동조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면 아세안의 입장에서는 한국과 협력은 오히려 아세안 국가들을 미중 경쟁의 맥락에 더 깊숙하게 관여시키는 일이 되고 한-아세안 협력은 강대국 경쟁 속에 포함되는 결과를 낳는다. 나아가 만약 한국이 중국이나 미국 어느 쪽과 보다 긴밀하게 협력한다면 아세안 입장에서 바라보는 한국은 특정 강대국 진영의 일원이 된 국가이다. 이럴 경우 아세안은 이 특정한 진영을 이끄는 강대국과 협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한국이라는 국가와 굳이 별도의 전략적 협력을 발전시킬 이유가 크지 않다. 예를 들어 한국이 미국 주도의 인도-퍼시픽 전략의 일부가 된다면 아세안 입장에서 미국에 의해 좌우되는 한국은 별도의 협력 대상이 아니다. 더구나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점이 없는 경우 다시 말해 아세안 국가에 지원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이나 강력한 군사력 등이 다른 주변 국가에 비해 크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반면 아세안이 미-중 사이에서 겪고 있는 전략적 딜레마는 미중 관계 속에서 한국이 느끼는 전략적 딜레마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경제와 안보라는 이분법적 기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국가들이나 한국 모두 현실적으로 안보는 미국 쪽에, 경제는 중국 쪽에 더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중 경쟁이 격화할수록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한국이나 아세안 국가들 모두 선택을 강요당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이런 점을 볼 때 다른 부차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아세안 국가와 한국은 전략적으로 비슷한 딜레마를 겪고 있다. 이런 전략적 유사성을 극대화하고 강조해서 한국이 강대국 경쟁 속에서 전략적 딜레마를 겪고 있는 지역 중소국가와 보조를 맞추어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갈 때 신남방정책은 아세안 방면에서 보다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강대국에 대한 지역 중소국가의 전략적 네트워킹은 반드시 강대국에 비판적인 세력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강대국에 대한 비판, 지역 중소국가 간의 연대를 명시적으로 드러낼 필요도 없다. 아세안과 한국이 힘을 합해 지역 중소국가들의 이익이 강대국 경쟁이나 전략 경쟁 속에서 희생당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정도의 입장 공유, 협의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 이는 미중 강대국 경쟁과 그 경쟁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영향을 통제하고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적 연대로 기존 아세안 개별 국가나 아세안이 강대국에 행하던 헤징 전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전략은 보다 많은 지역 중소국가들이 공통의 보조를 취해 강대국에 대한 레버리지를 크게 하고 헤징 전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며 한국과 아세안을 넘어 다른 지역 중소국가로 확대도 가능하다.

정치안보협력이 아닌 평화협력을 강조해야

두 번째로 이런 전략적 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신남방정책의 3P 원칙, 특히 그 중에서도 평화에 관한 부분을 한-아세안간 안보 및 전략적 협력의 핵심으로 삼아 한-아세안간 협력을 보다 심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과거 한-아세안 정치안보 협력을 규정했던 안보라는 주제를 평화라는 주제로 대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과거에 쓰던 정치안보 협력이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평화협력이라는 단어로 대체해야 한다. 또한 이 평화협력이라는 새로운 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전통 안보 부문은 물론 비전통 안보 부문에서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구체적 협력을 발굴하고 빠르게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사람과 번영이라는 요소가 평화라는 원칙과 만나는 지점에 대한 협력도 확장해야 한다.

그간 한-아세안 안보협력에서 해결하지 못한 과제 중 하나는 한국과 아세안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안보위협이라는 주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세안의 가장 큰 안보 관심사는 남중국해와 비전통 안보이다. 반면 한국의 경우 가장 큰 안보 위협은 역시 북한 문제와 북한의 핵개발이었고 거의 모든 안보 역량이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한반도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안보는 적이나 위협을 상정하며 안보협력은 공통의 안보 요소 혹은 공통의 안보 위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공통의 안보 위협을 상정하지 않은 안보협력은 협력을 추진할 큰 인센티브가 없다. 남중국해 문제와 한반도 문제는 이런 공통의 위협이라는 요소가 적고 따라서 안보협력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에 따라서 안보협력이 활발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지지부진한 정치안보 협력의 이면에는 아세안이 가진 주권민감성과 한국이 아세안의 잠재력을 낮게 평가하는 문제도 있었다.

공통의 위협 부재, 주권민감성, 아세안에 대한 낮은 평가 등의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안보 협력이 방향이 평화협력이다. 현재 한반도에서 진행되는 해빙 무드, 남북대화, 북미대화 등 평화분위기, 더 나아가 중기적으로 한반도에서 평화정착은 한국이 안보담론을 벗어나 평화담론, 평화건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 있다. 이런 주변 상황을 활용해 아세안과 정치안보협력을 평화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공고히 해야 한다. 한국과 아세안 사이 안보협력을 평화협력으로 전환하고, 아세안과 한국이 공동의 노력으로 지역 안보 문제를 넘어서 어떻게 지역 평화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서 협력한다는 명분은 누구도 반대하기 어렵다. 안보 대신에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강대국도 반대하기 힘든 중소국가의 도덕적, 윤리적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한국 정부에서 추진하는 군사협력 (한-아세안 국방차관회의) 및 실무급 협력, 한-아세안간 안보협의체 등을 활성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군사협력이나 안보협의체 관련 협력에 있어서 평화협력에 어울리는 새로운 아젠다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과거와 유사한 협력의 아젠다로는 과거 안보 협력 문제에서 한국이 보였던 아세안에 대한 태도, 즉 한반도 문제에만 관심을 둔 일방적인 지지 요청에 대한 불만을 불식시키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기 어렵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도 아세안에게 비핵화나 비핵화 방향으로 근본적인 진전이 있을 경우 북한과의 경제협력, 북한을 지역 다자 외교무대로 나오게 해 정상국가를 만드는 역할 등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주문할 수 있다.27 아세안확대국방장관회의 (ASEAN Defense Ministers’ Meeting Plus, ADMM+) 등 지역 다자 군사외교 무대에도 한반도 문제를 넘어 보다 건설적 의제를 가지고 적극 참여하고 한국에 기대되는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더 나아가 신남방정책의 다른 두 부분, 즉 사람과 번영이란 문제도 평화협력과 연관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평화 없는 번영은 불가능하며, 번영 없는 평화는 무의미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평화협력은 번영을 위한 경제협력과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또한 3P 원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다고 할 때 비전통안보 문제에 관한 협력은 보통 사람들의 평화를 지켜내는 협력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2018년부터 부쩍 빈발하는 동남아 지역의 자연재해와 이에 따른 인도적 지원에 관한 협력은 비전통 안보 분야에서 아세안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협력의 아젠다 인 동시에 군의 적극적인 협조와 협력, 아세안 국가 군과 협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다자대화와 협력 강화의 비전을 제시해야

마지막으로 현존하는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의, 아세안안보포럼 (ASEAN Regional Forum, ARF) 등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활성화 및 강화 역시 신남방정책에서는 빠져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다자 지역협력의 강화는 한국이나 아세안처럼 지역의 중소 국가 입장에서 강대국 압력을 관리하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이전 정부에 비해서 진일보한 대 아세안 정책 이니셔티브라고 할 수 있지만 신남방정책에 동아시아 다자협력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나 이니셔티브는 찾아볼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신남방정책을 아우르는 보다 큰 틀인 동북아플러스책임공동체 구상에서도 한중일 3국 관계와 협력을 언급하고 있는 동북아평화플랫폼을 넘어서는 다자협력이나 지역협력에 관한 다른 중요한 이니셔티브는 찾기 어렵다.

아세안 입장에서 동아시아 지역협력은 아세안 중심성 (ASEAN Centrality)을 주장하고 실천할 수 있는 중요한 장이므로 매우 중요한 요소다. 현재 강대국인 미국, 중국의 이니셔티브인 인도-퍼시픽 전략이나 일대일로 등의 새로운 개념이 하나의 지역 개념으로 기존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대체하면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약화를 예상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동아시아 지역협력 속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아세안 중심성 (centrality)의 약화 내지는 소멸을 예견한다. 그나마 아세안이 지역 전략이나 국제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확보하는 거의 유일한 기반이었던 아세안 중심성의 약화는 전반적인 아세안의 전략적 레버리지 약화를 뜻한다. 앞서 언급한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판 인도-퍼시픽 개념 추진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아세안과 관계 강화, 평화협력 강화를 추구하는 신남방정책은 아세안의 입지, 전략적 이해와 부합하는 방향의 다자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 나아가 한국 역시 강대국에 대해서 양자적 협상을 하기 보다는 강대국을 다자협력 안으로 끌어들이고 다자협력의 규칙과 제도 속에서 강대국을 상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제도들이 활성화되고 실질적 협력의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지역협력이 활성화되고 지역 중소국가들이 이 다자협력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강대국들도 활성화된 지역협력을 외면하고 그 밖에 서 있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이익을 위해서나 아세안의 이익을 위해서, 나아가 지역 중소국가의 전략적 레버리지를 위해서도 지역협력의 활성화는 필요하다. 한국이 아세안에 대한 신남방정책을 추진할 때 기존 지역의 다자협력 제도 재활성화를 위한 노력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들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동남아 국가 지도자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 선택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미, 중 관계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미중 경쟁에 심각해지면서 차츰 이런 우려를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18년 아세안 의장국이었던 싱가포르의 리센룽 (Lee Hsien Loong) 총리가 2018년 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 한 발언인데 그는 여기서 “우리가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아세안이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 상황이 빨리 오지 않기를 바란다” (I think it’s very desirable for us not to have to take sides, but the circumstances may come when Asean may have to choose one or the other. I am hoping that it’s not coming soon)고 한 바 있다. Catherine Wong. 2018. “Singapore leader Lee Hsien Loong warns region may have to choose between China and US” South China Morning Post. 17. November.
  • 2.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 ASEAN Focus. No. 26. January (https://www.iseas.edu.sg/images/pdf/ASEANFocus%20FINAL_Jan19.pdf)
  • 3. Charles McDermid. 2019. “Southeast Asia has major doubts about US reliability in the region, but still wary of China: survey” South China Morning Post. 1 January.
  • 4. 아세안 지역에서 중국의 BRI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Vannarith Chheang. 2018. “China’s Economic Statecraft in Southeast Asia” ISEAS Perspective. 2018-45. BRI를 통한 경제적 접근 뿐만 아니라 정치 안보적 차원에서도 최근 2년여간 중국이 오랫동안 거부해왔던 남중국해에서 행동규약 (code of conduct)에 관한 논의가 급 물살을 타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은 남중국해에서 갈등 관리를 위해 2012년에 만들어진 남중국해 당사국 행동 선언 (Declaration on the Conduct of Parties in the South China Sea) 이후 보다 구속력이 강한 행동규약 (code of conduct)을 만들자는 요구를 중국에 지속적으로 해왔다.
  • 5.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 ASEAN Focus. No. 26. January (https://www.iseas.edu.sg/images/pdf/ASEANFocus%20FINAL_Jan19.pdf)
  • 6. ASEAN Connectivity에 대해서는 ASEAN. 2016. Master Plan on ASEAN Connectivity 2025. ASEAN: Jakarta를 볼 것. (https://asean.org/wp-content/uploads/2016/09/Master-Plan-on-ASEAN-Connectivity-20251.pdf)
  • 7. Asia Correspondent. 2018. “China invading Cambodia? That’s crazy argument, says Hun Sen” Asia Correspondent. 25th October. 중국의 캄보디아 진출에 대한 비판은 중국 자본, 사람, 영향력이 캄보디아에 침투한다는 경고였던 반면, 이를 훈센은 침략(invade)라는 단어를 써서 마치 군사적 침략을 연상시키고 이런 견해를 헛소리라고 일축해 버린 것이다.
  • 8. Radio Free Asia. 2019. “China Pledges Nearly $600 Million in Aid to Cambodia over Three Years: PM Hun Sen” Radio Free Asia. 22 January.
  • 9.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 ASEAN Focus. No. 26. January (https://www.iseas.edu.sg/images/pdf/ASEANFocus%20FINAL_Jan19.pdf)
  • 10. Herman Kraft. 2018. “ASEAN Centrality in Testing Times” ASEAN Focus. 6/2018.
  • 11. John Hurley, Scott Morris and Gailyn Portelance. 2018. “Examining the Debt Implications of the Belt and Road Initiative from a Policy Perspective” CGD Policy Paper 121.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중국의 일대일로와 동남아 국가들의 부채 문제를 두고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와 같다고 언급한 바도 있다. Phillip Wen. 2019. “Mahathir says China will sympathize with Malaysia’s problems” Reuters. August 20.
  • 12. Andrew Nachemson. 2018. “A Chinese colony takes shape in Cambodia” Asia Times. June 5.; Logan Connor. 2019. “They only go to Chinese Shops: Why Cambodia’s influx of mainland tourists is causing tensions” South China Morning Post. 2 January.
  • 13. 이재현. 2011. “미국의 대 동남아 재관여 정책과 동아시아 지역협력 참여: 달라진 환경과 새로운 도전” 외교안보연구. 7:1. 물론 911 이후 부시 행정부의 미국은 아세안 지역을 테러와의 전쟁에서 제 2전선 (the second front)로 선포하고 동남아 지역에 다시 주목하려 했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이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인식되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주요 국가들이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를 꺼렸다. 뿐만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이 주로 수행되던 중동 지역에 모든 자원이 투입되면서 상대적으로 동남아 쪽으로 투입할 자원은 제한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부시행정부의 동남아 복귀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14. Malcolm Cook and Ian Storey. 2018. “Hedging Harder: Southeast Asia and the US-China Rivalry” Asan Forum. 7:1. (http://www.theasanforum.org/hedging-harder-southeast-asia-and-the-us-china-rivalry/)
  • 15. Quad 국가의 인도-퍼시픽 인식에 관해서는 이재현.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이슈브리프, 아산정책연구원 2015-15; 정구연, 이재현, 백우열, 이기태. 2018. “인도태평양 규칙기반 질서 형성과 쿼드협력의 전망” 국제관계연구. 22:3을 볼 것. Quad로 통칭되는 미국, 일본, 호주, 인도는 Quad라는 형태와 인도-퍼시픽 전략에 대해서 서로 조금씩 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동남아를 포함한 아시아 전체와 관여하는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으로 인도-퍼시픽 전략을 생각하고 있고, 일본은 Quad와 인도-퍼시픽 전략을 안보 문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호주의 중국 봉쇄라는 생각은 미국 보다 약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는 폭넓은 지역 관여라는 관점에서 인도-퍼시픽 전략을 생각하고 있으며, 인도는 중국 관련된 입장이 불분명하며 경제적 관점에서 인도-퍼시픽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 16. 최근 미 의회를 통과해 행정부에서 서명하여 정식 법안이 된 ARIA (Asia Reassurance Initiative Act 2018)는 미국의 인도-퍼시픽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법안이다. 이 법안을 보면 미국의 대 아세안, 대 동남아, 그리고 동남아 몇몇 개별 국가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점차 아세안 지역과 동남아 국가에 대한 전략, 관여 방안이 구체화되어 가고 있다. 예를 들면 동맹인 필리핀과 태국과 미국 사이 동맹에 대한 언급, 미얀마, 캄보디아 민주주의 및 인권에 관한 문제, 그리고 동남아에서 미국과 안보협력을 추진할 주요 대상 국가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들고 있다. ARIA의 구체적인 내용은 미 의회 사이트 (https://www.congress.gov/115/bills/s2736/BILLS-115s2736enr.pdf) 에서 확인할 수 있다.
  • 17.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 ASEAN Focus. No. 26. January (https://www.iseas.edu.sg/images/pdf/ASEANFocus%20FINAL_Jan19.pdf)이 여론조사에서는 또 미국이 전략적 동반자로서 지역 안보 문제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는가를 물었는데, 이에 대해서 응답자들은 매우 확신 (5%), 어느 정도 확신 (26.9%), 확실치 않음 (33.5%), 확신이 없음 (25.2%), 전혀 확신이 없음 (9.4%)로 답하고 있다. 결국 미국이 지역 안보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거의 35%로 나타나 신뢰를 한다는 응답 (31%) 보다 높았다.
  • 18. Michael R. Pompeo. 2018. “America’s Indo-Pacific Economic Vision” remarks at the Indo-Pacific Business Forum, US Chamber of Commerce. July 30.
  • 19. Joergen Oerstroem Moeller. 2018. “US-China Trade War: Opportunities and Risks for Southeast Asia” ISEAS Perspective. 2018-44.
  • 20. Bennett Murray. 2019. “Vietnam Is Wining the U.S.-China Trade War” Foreign Policy. October 30.
  • 21. International Trade Administration. 2017. “Top U.S. Trade Partners, Ranked by 2017 U.S. Total Export Value for Goods” (https://www.trade.gov/mas/ian/build/groups/public/@tg_ian/documents/webcontent/tg_ian_003364.pdf)
  • 22. Sri Mulyani Indrawati. 2018. “US-China trade war threatens to derail emerging economies” Nikkei Asian Review. December 11.
  • 23. Demetri Sevastopulo. “Why Trump’s America is rethinking engagement with China” Financial Times. 15 January; Charles Hankia. 2018. “The next cold war? US-China trade war risks something worse” The Conversation. 24 September.
  • 24. Evan Laksmana. 2018. “Indonesia’s Indo-Pacific Vision is a Call for ASEAN to Stick Together instead of Picking Sides” South China Morning Post. 20 November.
  • 25. Evan Laksmana. 2018. “Indonesia’s Indo-Pacific Vision is a Call for ASEAN to Stick Together instead of Picking Sides” South China Morning Post. 20 November.
  • 26. A statement by Marty Natalegawa, Indonesian Foreign Minister at the General Assembly Debate of the 66th Session of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New York, 26 September 2011; Council of Foreign Relations. 2010. “A Conversation with Marty Natalegawa” September 20.
  • 27. 앞서 언급한 여론조사에 한반도 비핵화의 전조를 보이는 북한에 대한 아세안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설문 문항이 포함된 것이 흥미롭다. 이 질문에 대해 아세안 응답자들은 아세안이 1) 계속 관여 (engage)를 해야 한다 (60.8%); 2) 중재자 (honest broker)가 되어야 한다 (43.5%); 3) 경제적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 (28.5%); 4) 역할이 없다 (26.8%); 5) 유엔안보리 제재를 이행해야 한다 (24.9%) 등으로 대답했다 (복수응답).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 ASEAN Focus. No. 26. Jan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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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이재현

지역연구센터 ; 출판홍보실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외교통상부 산하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며, 비전통 안보와 인간 안보, 오세아니아와 서남아 지역에 대한 분야로 연구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Transnational Natural Disasters and Environmental Issues in East Asia: Current Situation and the Way Forwards in the perspective of Regional Cooperation" (2011), “전환기 아세안의 생존전략: 현실주의와 제도주의의 중층적 적용과 그 한계“ (2012), 『동아시아공동체: 동향과 전망』(공저, 아산정책연구원, 2014), “미-중-동남아의 남중국해 삼국지” (2015), “인도-퍼시픽, 새로운 전략 공간의 등장”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