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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虎視牛行). 가려던 길은 호랑이의 눈으로 지켜보고 그 길을 가기 위한 행보는 황소걸음처럼 묵묵히 나아가라는 말이다. 상황을 잘못 봐서도 안 되고 급한 마음에 서둘러서도 안 된다는 의미다. 전남 순천 송광사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승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부도(浮圖)에 적혀있는 말이다.

한국 조계종의 시조인 지눌 스님은 삶 자체가 호시우행이었다. 아버지는 당대의 유학자였지만 몸이 허약한 아들을 위해 불교를 받아들였고, 스님은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불가에 입문한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혼란을 겪는 시기였고 불교는 권력과 밀착하여 추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불교 교단을 개혁하고 조계종의 뿌리를 만든 지눌 스님이었으니 그 노고는 말로 설명이 어려울 것이다.

한눈을 팔면 개혁의 동력을 잃을 수 있고 조금만 게을러도 뜻을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서두른다면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자칫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기의 환대 속에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에 관한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북한은 늘 그랬듯이 자신들의 입장을 앞세울 것이다. 지난 4월 판문점 정상회담의 성공적 이벤트를 고려할 때, 또한 그로 인해 높아진 국민적 기대를 감안할 때 우리 정부는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위원장이 어떠한 보상을 요구할지도 의문이다.

이럴 때 일수록 사안을 냉철히 바라봐야 한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안전을 위해 함부로 협상에 임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보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전략적 포석을 깔고 있다. 북한의 모든 제안을 항상 호랑이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그러하니 북한도 선의로 우리를 대할 것이라는 낭만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남북관계의 속도는 비핵화 진전의 속도와 발맞추면 된다. 서두르다가 한미공조가 훼손되면 상황이 돌변할 때 도와줄 친구를 잃는다. 소처럼 묵묵히 우리의 원칙, 즉 남북관계와 비핵화의 동시 발전의 길을 걸으면 된다.

김정은 위원장이 핵 리스트 신고를 거부한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북한은 자신들이 원하는 비핵화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고 이러한 비핵화 방식의 최종 상태는 주한미군 철수나 껍데기만 남는 한미동맹이다. 이를 우리가 수용할 수 없다. 차분히 돌아와 새로운 해법을 구상하면 된다.

서해 평화지대 설치와 관련해서 북측의 해상경계선도 인정해 달라고 이야기 한다면, 지금까지 그러한 관행이 없었음을 들어 완곡히 거절하면 된다.

그간 우리는 북측의 어떠한 경계선도 인정한 적 없고 북방한계선(NLL)을 우리 군의 피로써 지켜왔다. 만일 ‘상호주의’의 명분을 들어 북측 경계선을 인정한다면 NLL 수호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우리가 인정(recognition)함으로써 북측의 경계선도 북방한계선과 등등한 법적 성격을 지니게 되며 그 결과 훗날 해상경계선 설정 논의 시에 NLL을 지키기 어렵게 된다.

혹여 정부가 ‘이번에 북측과 무언가 중요한 합의를 하지 못하고 돌아오면 국내정치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면 이는 정말 잘못된 인식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또한 남북대화에 매번 성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성급한 마음에 우리의 안보이익을 훼손할 수 있는 잘못된 합의를 한다면 그 때 국민들이 비로소 걱정하고 분노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의 발표 과정을 보면 주요 사항은 미리 합의되었고 정상회담은 그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아마도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합의문은 상당부분 조율되었을 것이다. 핵문제가 진전되어 우리의 안보우려를 걷어내는 좋은 합의를 기대한다. 북한과의 이견으로 원하는 합의가 불가능하다면 합의문이 없는 싱거운 정상회담도 나쁘지 않다.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은 핵문제에는 진전이 없으면서 남북교류만 확대하는 잘못된 합의다. 선 신뢰구축도 중요하지만 자칫 국제사회의 비핵화 공조를 우리 스스로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호시우행의 자세가 중요한 이유다.

 

* 본 글은 9월 18일자 디지털타임스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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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신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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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철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중이다. 1995년 국방연구원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한 이래 국방연구원 국방정책연구실장(2008), 국방현안연구팀장(2009), 북한군사연구실장(2011-2013.6) 등을 역임하였다. 신 박사는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2009-10)과 외교부 정책기획관(2013.7-2016.9)을 역임하며 외교안보현안을 다루었고, 2018년 3월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로서 우수한 외교관 양성에 힘썼다. 그 밖에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실, 국회 외통위,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북한군 시크릿 리포트(2013)” 및 “International Law and the Use of Force(2008)” 등의 저술에 참여하였고, 한미동맹,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다양한 글을 학술지와 정책지에 기고하고 있다. 신 박사는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으며,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군사력 사용(use of force)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