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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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아산서원 알럼나이(졸업생)7명은 지난 8월 15일을 전후해 통일독일을 둘러봤다. 통일 20여년이 지난 지금 독일연방의 모습은 어떠한가. 출신을 둘러싼 갈등은 어느 정도 진정됐을까. 과거사는 어떻게 해결됐을까. 그런 물음들은 한반도 통일에 시사점을 제공할 포인트들이었다. 모두 합해 약 열흘간의 취재. 그 결과를 총 9개의 기사 형식의 글로 종합했다.

 

<한-독 청년통일마당 취재 기사 시리즈 4>

통일독일, 동서독 갈등을 넘어 화합의 시대로

20년에 해소한 40년 갈등
‘오씨’’ 베씨’ 갈등 사라져
젊은이들 동서독 차별 없어

서원 졸업생 이정현, 편집실 RA 권은율

 

“‘오씨(ossi)’, ‘베씨(wessi)’요? 알죠. 그렇지만 제가 써본 적은 없어요. 쓸 일이 없거든요.” “차별이나 갈등 같은 건 이제 없어요.”

베를린에서 만난 2030들은 단호했다. 오씨ㆍ베씨라는 말은 바로 알아들었지만 더 이상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단언하는 듯 했다. 오씨ㆍ베씨의 본래 뜻은 동쪽사람ㆍ서쪽사람이라는 것이었지만 오랜 시간 비하의 의미로 사용됐다.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나라에서 주는 일을 받는 데만 익숙해 게으르고 가난하다며 ‘오씨’를 ‘동독놈’이란 뜻으로 사용했다. 동독에서도 서독인들을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서독 놈’이란 의미로 맞받아치면서 ‘베씨’라고 불렀다.

이런 반응은 독일에서 청년35명에게 “여전히 오씨ㆍ베씨 차별이 있느냐”고 물은데 대한 답이었다. 알럼나이들은 지난 8월10일부터 14일 닷새 간 베를린에서 직접 30명을 만났고 귀국 후 한국에서 대면 또는 인터넷을 통해 5명과 대화했다. 모두 한결같이 차별이 “없다”고 답했다. “정말 하나도 없느냐”고 몇 번씩 되묻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나는 그런 걸 경험한 적이 없다. 없는 걸 없다고 하지 뭐라고 하냐”고 오히려 답답해 한다. 오히려 묻는 사람이 당황할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독일의 내적 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동서독 갈등이 심하다는 내용의 책이나 논문이 2010년 전후까지도 발간됐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대답은 ‘5년 사이에 차별이 사라졌다’는 건데 그게 사실일까. 뮌헨대학교 재학생 괴켄 아이도간은 “아직도 동독 주민이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부당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뉴스에 드물게 나오기는 한다”면서 “그러나 우리 세대 일은 아니다. 실생활에서 그런 차별을 직접 느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적어도 ‘통일 2세대’ 사이에는 동서독 출신지에서 비롯되는 개인적인 차별 감정은 없다는 것이다.

지난 8월14일, 베를린의 관광 중심지인 박물관섬에 위치한 ‘동독 박물관’에는 관광객들이 10m도 넘게 줄 서 있었다. ‘동독에서의 삶을 체험한다’는 모토로 설립된 동독 박물관은 2006년 7월 개관 후 1년 반 만에 ‘2008년을 빛낸 유럽 박물관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사립 박물관은 입장료와 부설 ‘동독 식당’의 수입만으로 운영되는데, 전 세계 관광정보 웹사이트인 트립 어드바이저에서도 1300여 건의 리뷰를 받으며 주목을 받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리뷰가 1200여 건이니 지명도가 대단하다. 베를린 동독 박물관의 2013년 8월 자료에 따르면 2006년 개관 후 2012년 말까지 동독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은 총 24만2000명. 그 중 43%가 구 서독 출신이었다. 동독 출신은 23%로 그 절반 수준이다. 직장인 박윤주(25, 대구 달서구)씨는 “통일된 한국의 명동 한복판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물관’이 개관했는데, 그 박물관에 10년 가까이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면 상상이 되나”라며 놀라워했다.

 

4회 메인 사진 1

베를린 동독 박물관의 관람객들

 

동독 박물관 홍보담당자 멜라니는 “통일 후 사람들이 동독에 대해 주목한 것은 슈타지, 독재 정권 등 정치 영역의 문제였다”면서 “동독에는 분명 나쁜 점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 외에 평범한 일상도 있었다. 동독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동독 박물관은 동서독의 갈등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며 꾸준히 동독 박물관을 찾아오는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통일 독일은 진정으로 성공적 화합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통일을 바라보는 동서독의 시각차

2000대 중반 한국 학계는 통일 독일에 출연한 ‘오스텔지어’라는 신조어를 주목했다. 동독을 뜻하는 ‘Ost’와 ‘노스텔지어’가 결합된 이 용어는 구 동독의 삶에 대한 향수가 커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독일 통일은 절반의 실패’임을 뜻하는 것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텔지어 바람은 강했다. 불을 지핀 건 2003년 봄에 개봉한 영화 <굿바이 레닌>이었다. 통일 이후 한 동독 가정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자국에서 700만 관람객을 모아 당시 독일 영화 역대 흥행 2위에 올랐다. 그 해 여름, 독일에서는 ‘Ostalgia show(방송사 ZDF)’, ‘DDR(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c,동독)-show(동독방송사 RTL)’, ‘Ein Kessel DDR(‘들끓는 동독 주전자’,방송사 MDR)’ 등 소위 ‘동독 쇼’들이 다발적으로 방송됐다. 이들은 동독에서 유행했던 패션, 춤, 노래, TV프로그램, 자동차 등을 소개했다. 동독 출신 가수, 스포츠 선수 등이 출연해 재능을 과시했다.

국내 언론에도 ‘DDR-show’의 내용이 일부 소개됐다. ‘(동독에선)디스코 테크에서 춤을 추다가도 어떤 시간이 되면 입장객들끼리 토론 시간을 가져야 했다.’ ‘(동독)운동 선수들은 경기에서 이기고 나면 정부로부터 표창장과 이념서적을 받았다.’ ‘(동독에서)학생시절 교실에 걸린 스탈린 사진에 립스틱으로 장난했다가 14년간 수감소에 갇혔다.’

방송은 첫 회부터 시청률이 22.3%나 됐고 주요 시청 연령층인 14~49세의 시청률은 30.3%에 달했다. 동독상품 전문점 주인은 그 해 9월4일 BBC 인터넷판과의 인터뷰에서 “방송 직후 동ㆍ서독 출신 고객의 주문과 문의전화가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다른 방송사의 동독 쇼들도 20%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인기는 폭발이었으나 동독 비화 논란이 일었다. 동독인들은 ‘한편에선 반갑지만 지나친 상업화로 동독 문화를 웃음거리로 만든다’는 항의를 하기도 했다. 통독 내외에서는 ‘오스텔지어붐이 서독인들이 동독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오스텔지어가 동독의 독재를 미화한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오스텔지어 현상 자체가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 겪은 정치사회적 고립이 가져온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공통 분석은 ‘동독인들이 통일 이전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오스텔지어붐은 나라는 통일됐지만 통일 1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통일 이후 동서독인 사이에는 갈등이 들끓었다. 동독인 입장에서 보면 그럴 이유가 충분했다. 익숙했던 시스템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그 자리에 서독 체계가 들어앉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를 ‘흡수통일’로 부른 것도 그럴만했다.

동독인들은 통일이 되면 당연히 서독인이 누리는 자유를 만끽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거꾸로 삶의 전부였던 사회주의 시스템을 버리고 뒤늦게 서독 체계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독 박물관 홍보담당자 멜라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무도 동독의 삶이나 동독에 살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어요. 사회주의는 버려졌고 서독인들은 서독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건 동독 사람들에게 수치스러운 경험이었어요. 동독인들이 일생 동안 중요하다고 배운 것이 새 사회 시스템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거나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됐으니까요.”

서독이 주축이 된 연방체제에 자발적으로 가입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동독인들은 절망을 선택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멜라니씨는 “나는 그때 어린이여서 적응이 어렵지는 않았다. 동독 청년들도 대개는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나이 든 이들이 변화에 아주 힘들어 했다”며 “그들의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렸다”고 설명했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박사과정의 리차드 게오르그도 “서독인들은 동독 사람들을 내려봤어요”라며 “할아버지는 동독에서 생물학을 가르쳤는데 동ㆍ서독의 학문 기준이 달라 그런지 할아버지가 일생 동안 연구한 성과들이 서독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라고 말했다. 같은 대학의 미욘 슐타카는 “그런 현상은 비단 학문 분야만 벌어진 일이 아니고 동독에서 나름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라면서 “통일이 되는 순간 다수의 동독인들이 지위를 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리차드도 “사회지도급인 동독 인사들은 모두 해고됐고 자기들의 수준에 맞는 직장을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국가에게 통일은 선(善)이었지만 동독인 개개인에게 통일은 반드시 능사가 아니었다. 적어도 여전히 가난하고 통제 당한다고 느꼈던 동독인들에겐 그랬다.

그렇다고 서독인들은 편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통일이 너무 느닷없이 닥친 데다 정신 없는 가운데 통일자금도 대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 국립시민교육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서독과 동독이 통일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느냐’는 질문에 ‘체험할 수 없거나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답한 서독인이 1966년 72%, 1976년 87%, 1986년 93%에 달했다. ‘통일은 요원한 일’이란 게 서독 사람들의 내심이었다.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대변화가 일어나고 통일비용을 부담하게 된 것이다.

멜라니는 “서독인들은 통일이 동독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박탈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사회주의 독재를 벗어난 동독인들은 훨씬 행복하리라 여겼고 동독인들에게 불평을 멈추고 스스로 일어나라고 요구했어요. 너무 긴 시간 동안 다른 사회에 살았기 때문에 동서독인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 거죠”. 동독인은 1971년부터 서독 방송과 라디오를 보고 들었다. 그 때는 쉬쉬 하며 들었지만 1980년부터는 공식적으로 허용됐다. 그래서 동독인들은 서독 문화에 익숙했다. 서독인들은 통일비용을 대면서도 막상 동독을 잘 몰랐다. 갈등은 끊임없이 생겨났다. 1993년 3월4일자 ‘시사저널’에 따르면 1993년 2월2일 첫 방송된 연속극 ‘모츠키’에는 사사건건 동독인을 야유하고 빈정대면서 ‘원숭이 똥구멍’, ‘개새끼’라고 욕하는 장면도 나왔다.

네덜란드의 네이메헌 라드바우드 대학에 재학 중인 독일인 에드윈 쉔켈은 동ㆍ서독인이 갈등을 벌일 수밖에 없던 몇 가지 상황들을 제시한다. 첫째 국가의 재원낭비 문제다. 그는 “연방은 통일 후 동독지역과 동독 출신 사람들이 서독에 잘 적응할 수 있게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고 역사적 도시나 기념물을 재건하기 위해 엄청난 지원을 했다. 그러나 재원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낭비됐다”고 주장했다. 새 항구를 만들면서 항구와 바다를 연결하는데 드는 설비는 고려하지 못해, 항구만 덜렁 지어놓고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구 동독지역에는 사용할 수 없는 항구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주거 문제다. 분단 이전 동독지역에 땅이나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서독인들이 통일 이후 재산반환 소송을 냈고 대부분이 승소했다. 에드윈은 “많은 서독인들이 동독에 남아있던 재산을 싼 값에 돌려받았지만, 그 건물에 살고 있던 동독인들은 살 곳을 잃고 길거리로 나와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갈등들이 오스텔지어붐의 동독에 대한 향수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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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 슈타지 문서보관청 표지판 뒤로 보이는 베를린 장벽 관람안내간판이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학생들은 “동독 쇼는 기억나지 않지만 오스텔지어는 안다”면서 “그러나 ‘오스텔지어’도 우리는 거의 쓰지 않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독일에서 태어나 베를린 자유대학교에 재학 중인 교포 2세 송이씨는 “이젠 동독에서 왔는지 서독에서 왔는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며 “다른 여느 나라들처럼 출신지가 아닌 그 사람의 성격과 인성을 중요시한다”고 말했다. 베를린 자전거 행사에서 만난 파독 간호사 윤 모씨도 “동서독 갈등이 있기는 했지만 정부와 사회가 신속한 봉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면에서 독일은 무서운 민족”이라고 말했다. 갈등의 강도가 연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독을 향한 역귀향(逆歸鄕) 현상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통일 후 서독지역으로 와서 10년간 살았던 토비아스(52)는 최근 다시 동독 지역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서독지역의 비싼 물가 때문이다. 그는 “서독 지역은 대부분 동독 지역보다 물가가 비싸다. 서독 지역에 살면 돈은 좀 더 벌어도 지출이 더 많아지니 남는 것도 없다”고 말한다. 동서독 출신에 따른 차별이 미미해지면서 원하는 곳을 선택해 정착하기도 한층 용이해졌다.

하지만 경제적 격차는 여전

그러나 완벽한 통합에 가로놓인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경제적 격차 해소다. 취업을 앞두고 여느 한국 젊은이들처럼 고민이 많은 독일의 대학생들이 ‘동독의 직장’에 대해 보이는 차별적 반응은 그 단면을 보여준다. 괴켄은 “당연 서독의 일자리가 더 인기가 있다”고 했다. “동독보다 서독에 더 일자리가 많기 때문에 동독 지역 젊은이들이 서독으로 이동하고 그래서 동독의 시골에선 인력부족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했다. 에드윈은 “동서의 차이가 점점 좁혀지는 중”이라면서 “집중 투자로 동독지역의 기업과 학교는 수준이 높아졌다. 도시도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역사적 건물과 예술도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동독의 방값이 서독보다 싸서 좋다”고 덧붙인다.

베를린 소재 훔볼트 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서독 출신 마티아스는 동독지역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그는 “동독 사람들은 좀 따뜻하게 느껴진다. 동독 지역에서 직장을 찾는 것은 이사를 해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뒤에는 독일 젊은이들이 한국 청년들이 대기업으로 몰리듯 서독 기업을 우선시하지 않는 현상도 자리 잡고 있다.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베를린 공과대학에 재학중인 토비아스 자이델은 “동독에는 좋은 기업이 없고 근로 환경도 정말 나쁘다. 절대 안 갈 거다”라고 했고 뮌헨 비즈니스 스쿨의 다니엘 마이델씨도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다. 임금도 낮은데 뭐 하러 가나. 동독 지역의 임금이 낮은 것은 다 안다”며 펄쩍 뛰었다. 독일 훔볼트대학교 커리어 센터는 “우리 대학에는 구 동독지역 출신 재학생이 더 많은데, 동독 또는 서독으로 취직하려는 학생들이 반반”이라고 말했다.

그 배경에는 독일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동서독 일자리에 대한 평가가 있다. 통일 직후 차이가 컸던 동서독지역 임금 수준은 비슷해졌다. 독일에선 산별노조가 힘이 세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제법 잘 지켜지기 때문이다. 뒤셀도르프에 있는 한스뵈클러 재단의 경제사회연구소(WSI)에 따르면 동독 단체협약 기초임금 수준은 2010년 말 서독의 96%까지 격차가 좁혀졌다. 1991년엔 60% 수준이었다. 비약적 발전이다.

그러나 근로 시간, 휴가 일수 같은 근로환경을 비교하면 동독 지역은 아직 서독에 못 미친다. 이 연구소의 단체교섭 분석책임자 라인하르트 비스핑크 박사의 2011년 연구에 따르면 주당 노동시간이 지역별로 보면 옛 동독 38.3시간, 옛 서독이 37.5시간이며 기본 휴가는 동독이 연간 26.6일, 서독은 28.1일이다. 휴가의 상한선은 동독이 29.5일, 서독이 30.1일이다. 휴가 보너스는 서독 수준에 제법 근접했지만 몇몇 지역에서 낮다. 연말특별보너스도 규모가 큰 금속, 화학, 도소매, 공공서비스 등의 업종에서 차이가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독일, 동서독 임금격차 17% 상황―동독의 낮은 단체교섭 적용률이 문제’)

이에 대해 베르너 스몬리, 마티아스 키르바흐 같은 연구자들은 ‘그런 차이는 옛 동독에 사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문제’라는 입장이다. 단체협상이 동독 지역에서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고 서독지역 노조가 동독지역의 노동자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노동시장 정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갈등소지, 동독 지역의 우경화

경기 침체는 보수화, 민족주의로의 회귀에 주요인으로 작용한다. 사회 불만 세력들이 극우 정당을 대안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동독의 경우 경제 발전에 소외되었다는 상대적 박탈감과 상처받은 자존심이 극우주의적 정치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1991년, 독일에 이주민 노숙자들이 급증하면서 숙소부족현상이 일어났다. 공원과 거리에도 씻지도 않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배회하는 부랑자 무리들이 늘었다. 시는 미적거렸다. 분노한 일부 시민들의 감정은 이민자들에 대한 폭행으로 번졌다. 전 동독 사민당 총무 리하르트 슈뢰더는 “90년대 초 그런 일이 독일 곳곳에서 벌어졌다. 통일 뒤 석방된 신나치주의자들이 가세하면서 규모가 확대됐다”고 말했다. 1990년 255건이었던 신나치주의 범죄는 1991년 1567건 6배나 늘었고 92년엔 2000건을 넘었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대 들어서도 신나치주의 범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 11월, 독일 연방검찰은 12년 동안 10건의 살인과 2건의 폭격, 15건의 무장 강도 범죄를 저질러온 신나치주의 극우테러단체 NSU(National Socialist Underground)의 소속원들을 색출해 기소했다. 한편으로 극우정당에 대한 지지 특히 구 동독지역의 지지는 점점 높아져 독일의 전문가들은 ‘이미 위험 수준’이라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독일 공화국 초대 대통령) 재단은 2012년, 통일독일국민의 극우정당 지지율이 2010년 8.2%에서 9%로 올랐으며, 전 국민의 25.1%가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를 갖고 있다는 설문조사결과를 발표했다. 2012년 서독 지역의 극우주의 지지는 7.6%에서 7.3%로 소폭 감소했으나, 동독은 10.5%에서 15.8%로 뛰어 2006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14~30세 젊은 층이 강력히 지지했다.

토비아스 자이델은 “EU에 대한 반발심”을 극우주의 지지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EU는 통화통합과 외국인 유입을 주도했는데, 유럽 통합으로 우리도 먹고 살기가 힘든 와중에 우리 돈이 그리스 등으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동독처럼 경제가 안 좋은 곳에서는 EU를 더 싫어할 수밖에 없고, 뜻을 같이 하는 극우정당 지지율도 올라간다”고 말하며 “현재 독일보다 경제상황이 더 좋지 않은 프랑스에서는 독일보다 극우정당 지지율이 더 높다”고 설명했다. 결국 동서독의 경제격차가 새로운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갈등의 화살을 외국인에게 돌리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슈뢰더는 “실업자라고 극우파는 아니고 다만 자기 방향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따라가는 것일 뿐”이라며 “청소년들이 그런 집단 정체성을 갖기 쉽다”고 덧붙였다.

통일 2세대,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한 국민이다)!

1989년 10월7일,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에서 시작된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는 한 달 후 베를린 시위에서 “우리는 한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로 발전했다. 동서독인들이 베를린 장벽 앞에서 외쳤던 구호처럼 사회ㆍ경제ㆍ정치적으로 완전한 ‘한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리 세대는 괜찮다”던 독일의 2030 청년들을 보면 화합의 길이 그리 어둡지는 않아 보인다.

남아있는 정치경제적 격차 해소는 내적통합을 이뤄가고 있는 통일 2세대에게 주어진 과제다. 에드윈은 “우리는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분단시절 독일인들, 특히 동독인들의 삶이 얼마나 불행했으며, 통일이 얼마나 많은 혜택을 주었고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고 운이 좋은지에 대해 반복해서 배웠다”며 “학교교육이 그 점을 강조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이제는 그 동안 무시돼왔던 통일의 양면을 모두 다룰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4회 메인 사진 3

베를린 거리에 설치된 조각상 베를리 굿나잇의 ‘장벽이 붕괴된 날’

오늘날 베를린 거리 곳곳엔 각종 통일의 상징물이 설치돼있다. 도심 곳곳에 베를린 장벽이 가로놓였던 흔적이나 장벽조각들이 있고 ‘베를린’이 다채로운 색으로 경쾌하게 쓰인 동독 자동차 트라비 모형도 있다. 도심 외곽 길 옆 잔디밭에는 미국의 예술가 베를리 굿나잇이 조각한 ‘장벽이 붕괴된 날(The Day The Wall Came Down)’이 커다랗게 서 있다. 베를린 장벽을 넘는 말들의 모습이 용맹하다.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독일 통일은 흡수가 아니다. 언제나 쌍방의 합의가 있었고, 모든 건 함께 결정했다” 통일 조약 협상에 참여했던 당시 서독측 실무책임자 크라우스-디터 쉬납아우프 전 내무부 국장은 “지금 생각하면 다시 만들고 싶은 조항은 무엇이며 통일 후 예상치 못한 상황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예상치 못한 건 없었다. 아예 아무것도 예상하지 않았었다”고 답했다. 그래서일까. 리차드는 “통일의 여파를 과소평가해 경제ㆍ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면서도 “통일 이후 통합되는 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관련 기사 1 : 리하르트 슈뢰더 전 동독 사민당 원내총무(현 한독통일자문위원회 위원) 인터뷰

◆관련 기사 2 : 독일 통일조약작성에 직접 참여한 쉬납아우프 박사(현 한독통일자문위원회 위원)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