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규모 세계 10위권의 민주주의 선진국, 세계에서 환영받는 K-문화, K-원전, K-방산, 세계 10위 공적개발원조 제공국…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던 한국이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정치적 기초 위에 서있었는지 그 실상이 천하에 드러났다. 독선적인 대통령의 치명적 잘못으로 국민 모두 벌거벗은 임금님 꼴이 되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면서 가장 ‘비민주적’으로 국민의 ‘자유’를 훼손했으니, 그는 탄핵 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냉정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위기의 반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옳고 그름, 흑과 백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검사의 세계관을 뛰어넘지 못했다. 협소한 인맥 중심의 인사에, 수시로 격노해서 참모들이 바른말을 못하게 만들었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국민과 야권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아우르는 정치적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아니 검사적 세계관 때문에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여당은 여러 선거에서 연속적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그는 민심 이반의 징후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여기에 국민들은 더욱 분노했고, 이것이 올봄 총선에서 여당의 참패를 초래했다. 그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국정 스타일을 확 바꿔야 했다. 국민들을 향해 더욱 다가가 소통하고, 정책을 수시로 설명하며, 스캔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하면서 주권자인 국민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전 국민을 적으로 돌려버렸다.
문제는 우리의 정치제도가 왜 그런 인물을 걸러내거나 견제하지 못했느냐이다. 한마디로 1987년 체제가 수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간 4명의 대통령이 감옥에 가고, 1명은 극단적 선택을 하고, 이제 탄핵된 대통령이 2명이 되게 생겼다. 이런 정치판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우리 정치제도는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된 5년 단임의 제왕적 대통령제다. 법에 의하면 총리가 상당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책임총리제는 말로만 존재하고 제대로 실행된 적이 없다. 게다가 국회도 거대 양당이 담합해서 의석을 독점한다. 2020년 총선에서 양대 정당을 찍은 사람들이 3분의 2인데 의석은 90% 이상을 차지했다. 국민 3분의 1의 정치적 의사가 깡그리 무시당하는 대표성이 약한 제도인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1%포인트만 (윤 대통령의 경우 0.73%포인트) 이겨도 정치권력과 자원을 독점하는 승자독식의 제도다.
이러한 정치 구조에서 다양한 폐해가 드러났다. 무엇보다 여야가 나라를 위해 협력할 동기가 사라지고 여야 간에 죽기 살기로 싸우는 극한 대립이 일상화되었다. 한번 권력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 승자독식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국가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는 안중에 없다. 합리적인 정책을 정부·여당이 내놓아도 야당은 무조건 비판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 정책으로 여당이 표를 더 얻으면, 야당 자신의 집권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치달았다. 예를 들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했던 ‘지방균형발전’ 정책은 이명박 정부에서 이어받고 그 후에도 계속 이어져야 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마자 폐기 처분되었고 우리는 지금 그 후과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정책도 마찬가지다. 같은 여당 출신 후임 대통령 박근혜 정부에서 이어받고 지속 보완 발전시켰다면 지금쯤 한국은 환경 분야의 세계 선두 주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대북 정책, 외교정책도 정권만 바뀌면 뒤집어져, 일관성도 없고 국제적 신뢰도 추락한 지 오래다. 경제는 1%대 성장으로 내려앉아 일본형 장기침체의 초입에 들어서고 출생률 0.72로 나라 자체가 소멸되어가는데, 막무가내의 힘자랑과 고함지르기만 난무한다.
이제 권력구조를 바꿔서 제대로 된 정치인을 선출하고 견제할 장치를 마련해야 할 때다. 지금의 5년 단임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 대통령 개인의 잘못이 나라 전체를 뒤집어놓는 이 제도가 실패한 제도라는 것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궁극적으로 내각제를 염두에 두되, 우선적으로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외치를 담당하고, 국회가 선출한 총리가 내치를 담당하는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정당의 설립 제도 요건이나 선거 운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서 정치 신인들의 국회 진입장벽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면서 점차 다당제로 나아가면서 대표성을 높이고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뒤처진 정치권 간의 간격을 좁혀야 한다. 비례대표 의석 비중도 대폭 확대하고 의원정수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0만 명당 1인 수준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윤 대통령의 탄핵만으로 이번의 위기가 끝나는 게 아니다. 정치판의 근본 개혁이 없으면 차기, 그리고 차차기에 반복될 것이다. 정치권은 눈앞의 유불리 계산에 매몰되어 정치개혁을 향한 국민적 염원을 저버리지 말기 바란다. 영하권의 추운 날씨에 길거리로 나선 시민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모든 국민들도 함께 뜻을 모아 정치개혁을 성공시켜야 한다.
* 본 글은 12월 14일자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