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에서 놀라운 지각 변동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80년간의 규범에 기반한 질서가 무너지고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0분 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했다. 통화 후 기자들 앞에서 우크라이나 국경을 2014년 러시아의 크리미아 침공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나, 안보 보장을 위한 나토 가입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애초에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오타가 아니다. 러시아가 아니고 우크라이나다.
같은 날,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우크라이나방위연락그룹 미팅에서 “종전 후 평화유지군이 만들어진다면 미국은 참여하지 않을 것이고, 그 활동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별개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의 나토 회원국 군대가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다 공격당해도 미국은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 대해 푸틴 대통령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국가안보실 고위관리를 지냈던 코리 샤키 박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세력권 형성을 위한 러시아의 침략 행위를 합법화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을 불신하고 푸틴 대통령을 높이 평가해 왔다. 이제 그는 불법 침략의 희생국인 우크라이나와 나토 동맹국들에 등을 돌리고 있다. 이들과 어떤 사전 협의도 없이 푸틴 대통령과 통화하고 러시아와 전면적 관계 개선을 선언했다.
이는 미국이 국제 규범은 상관하지 않고 강대국들이 힘으로 세력권을 형성하는 권력 정치를 추구한다는 의심을 낳고 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도 지난 1월 30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여러 강대국들이 각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다극의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극’은 미국 주도의 규범 기반 세계 질서를 바꾸려고 중국과 러시아가 추구해 온 전략인데 그것을 수용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 캐나다, 파나마 운하의 확보 의지를 밝힌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이는 유럽 국가들이 미주 대륙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즉 미주 대륙이 미국의 세력권임을 인정하라는 1823년 먼로 독트린을 연상케 한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지난 1월 30일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미국이 중남미권에 외교 역량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지역들은 다른 강대국들이 알아서 하고 미국은 미주 대륙 중심의 세력권을 확실히 다지면서 미국을 위협하는 중국 억제에 올인하겠다는 것이다.
힘의 논리가 좌우하는 권력 정치의 세상을 살다가 세계 대전을 두 번씩이나 치렀으니 힘의 논리가 아니라 영토 주권, 자결권 등 국제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자며 규범 기반 질서를 만들고 주도해 온 것이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미국이 아닌 것이다. 세계가 2차 대전 이전의 정글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정글의 세상에서 한반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 미국이 동맹에 등을 돌리고 우크라이나를 희생양 삼으며 푸틴과 손잡는 모습, 그 결과 푸틴이 불법 침략으로 원하는 것을 다 얻어내는 것을 지켜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무슨 생각을 할까? 동맹국 러시아의 승리를 지켜본 김정은은 이제 더욱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도 호감을 표시해 왔다. 어느 날 갑자기 한국과는 사전협의 없이 김정은과 통화하며 중요한 한반도 현안을 논의하고 관계 개선을 발표한다면? 그 과정에서 트럼프 1기 때 실제로 하려고 했던, 김정은이 원하는 주한미군 철수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핵무기는 동결 상태로 두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폐기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해제하기로 했다고, 발표해 버린다면? 이런 일이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주한미군 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역할 변경 가능성에는 대비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유럽 일은 유럽이 알아서 하라면서, 대중국 억제에 모든 힘을 쏟으려 하고 있다. 그런 접근법이라면, 엘브리지 콜비 국방차관이 작년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주한미군은 중국 억제용으로 바꾸고 대북 억제는 한국이 알아서 하라고 요구하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독재자고 지지율이 4%밖에 안 된다며 대통령 선거를 촉구했다. (실제 지지도는 57% 정도라고 한다) 그처럼 그는 상대방 국가의 내정도 꼼꼼히 들여다본다. 새로 뽑힌 한국의 대통령이 아무리 자신에게 잘하려 해도, 국내 정치가 정확하게 둘로 쪼개져 지지도가 약하다는 것을 그가 알면, 과연 얼마나 한국을 존중하며 우리 요청에 귀를 기울일까?
엄혹한 권력 정치가 난무하는 광야를 온 정치권과 국민이 뭉쳐서 헤쳐나가도 될까 말까 한데 싸움질만 하고 있다면? 무한 대립과 갈등을 촉발하고 있는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하루빨리 개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집에 불이 나서 타들어 가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지저대고 있는 처마 밑의 제비, 이른바 연작처당(燕雀處堂)의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 본 글은 2월 22일자 중앙SUNDAY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