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빈, 동료, 신사 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정몽준입니다. 저는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학대학원(SAIS) 졸업생입니다.
오늘 이 아름다운SAIS 캠퍼스에서 저를 환영해 주신 제임스 스타인버그 학장님, SAIS 교수진과 학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과 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왜 존스 홉킨스SAIS에 정몽준 안보학 석좌교수직 설립을 위한 기부를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오늘 저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오랜 역사 속 한국은 일본, 중국,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한 역사책에 따르면 한국은 역사상 900번 이상 침략을 받았습니다.
일본 통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과 1597년에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5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40만 명이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에 맞서 싸움을 이끌었으며,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어 한국 근대 조선업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중국은 청나라 시대, 1627년과 1636년에 한국을 침략했습니다. 이 침략으로 약 1만 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고 50만 명이 노예로 중국에 끌려갔습니다. 이러한 침략 이후 조선 왕조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쇄국 정책을 선택했고, 이는 조선을 ‘은둔의 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19세기 말 외세에 의해 아시아가 분할되며 이러한 고립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미국 대통령들은 아직 글로벌 리더십의 책임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테디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와 같은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한국은 새롭게 떠오르던 일본 제국의 첫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905년 미국은 가쓰라-태프트(Taft-Katsura Agreement) 밀약이라는 실책을 통해 일본의 한국 병합에 동의했습니다. 그 대가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했습니다.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인은 일본의 잔인한 식민 지배를 견뎌야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지만, 미국은 1919년부터 국제 무대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과 독일의 군사 팽창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미국의 승리로 일본의 한국 지배는 끝이 났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되었습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한반도 전역에서 “1948년 3월 31일 이내에 선거를 시행하라”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북한은 이 유엔 결의를 거부했고, 미국은 남한에서만 총선을 실시하는 결의안을 제안했습니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합법적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한국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은 남한을 침략했습니다. 침공 한 달 만에 북한은 남부 항구 도시 부산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저는 6.25전쟁이 계속되던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이끄는 유엔사령부의 깃발 아래,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16개국이 전투 병력을, 6개국이 의료 부대를 보냈습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은 반격에 나서며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성공적인 인천 상륙작전 덕분에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과의 국경을 향해 북진을 계속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중공군100만 명이 개입하였고, 유엔과 한국은 현재의 군사분계선에서 이들을 막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100만 명의 대한민국 민간인, 14만 명의 대한민국 군인, 50만명의 북한군, 15만 명의 중공군, 그리고 36,574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3년간의 전쟁 끝에, 195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유를 위해 지불한 대가였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기념비문에는 “미국은 그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조국의 부름에 응한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전쟁직후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이 나라가 재건되는데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951년 한국 전쟁 중에 영국 신문인 더 타임즈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는 냉소적인 사설을 게재했습니다.
하지만 두 예측 모두 틀렸습니다.
195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76달러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36,000달러인 세계 20대 경제 대국 중 하나입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사회주의 경제는 무너졌고, 이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에게 자유롭고 번영하는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정치적 위협입니다. 북한은 정권의 생존을 위해 공산주의의 깃발 아래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중국 등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규모를 보면 그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자유민주주의로 존재하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저는 서울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ROTC 중위로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밟기 위해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미국에 다시 찾아온 아침’(It’s morning again in America)이라는 1984년 대선 캠페인 구호를 가지고 국가 재건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부상으로 냉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덩샤오핑(Deng Xiaoping)의 중국도 개방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저는 강대국들이 한국과 같은 국가의 운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 알고 싶었습니다. 저는 1985년에 SAIS에 왔습니다. 당시 SAIS의 학장은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와 함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을 수립한 일본 연구의 권위자인 조지 패커드(George Packard)였습니다.
5일간의 종합시험을 치른 후, 저는 이사야 프랭크(Isaiah Frank) 교수님, 에드워드 J. 링컨(Edward J. Lincoln) 교수님, 찰스 피어슨(Charles Pearson) 교수님, 제임스 C. 리델(James C. Riedel) 교수님, 그리고 나다니엘 B. 테이어(Nathaniel B. Thayer) 교수님의 지도 아래 박사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희 부모님은 검소한 환경에서 자라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시골 마을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더 나은 삶을 찾아 서울로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불굴의 노력과 의지로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 중 하나인 현대 그룹을 세우셨습니다.
아버지는 필명으로 당신이 자란 작은 마을인 ‘아산'(峨山)을 선택하셨습니다. 국가의 사회 복지에 기여하기 위해 아버지는 후일 한국의 주요 자선 단체가 된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병원과 대학을 세우고, 장학금을 제공했습니다.
제임스 스타인버그 학장님이 처음에 소개해준 것처럼 저는 평생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행운을 가졌습니다. 저는 세계 최대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에서 일했습니다. 또한, 국회의원으로 7선을 역임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냈고 2002년 FIFA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 약 50개의 동맹국을 가지고 있으면, 한국은 그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협정, 애치슨 라인, 카터(Jimmy Carter)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를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한미 동맹은 거의 반세기 동안 철통같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미국은 냉전 시대에 군대와 전술 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하여 이를 실현했습니다.
1991년, 러시아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유럽에서 1만 개의 전술핵무기를 철수했으며, 조지 H W 부시(George H.W. Bush)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있던 100여 개를 포함해 태평양 지역에서1,200여 개의 전술핵무기를 철수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에 100여개의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유럽에는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안보상황이 더 심각한 한반도에는 배치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무기 중 일부를 한국 내 기지로 재배치 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이는 미국의 헌신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한 미국 국민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미 동맹은 한국과 미국 국민 모두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정치권에서 초당적 합의가 존재하는 몇 안되는 사안입니다.
동료, 신사 숙녀 여러분,
어느 날, 멕시코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멕시코는 신과 너무 멀고 미국과 너무 가까워서 큰 문제다.” 나중에 이스라엘 총리가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과 매우 가깝지만 미국과 너무 멀어서 큰 문제다.”
한국은 어떤가요? 한국은 기독교인이 많은 매우 종교적인 나라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신과 가깝기는 하지만 중국과 너무 가깝고, 러시아와도 너무 가까운 반면 미국과는 너무 멀어 큰 문제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중국은 일본, 필리핀, 호주, 캐나다에 대해 경제적, 외교적 강압을 행사했습니다. 한국 역시 2016년,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에 대응하기 위해 미사일 방어 체계를 배치했다는 이유만으로 위기를 겪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전문가들과 지도자들이 아시아의 집단 안보 체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과 그 동맹국 및 파트너들도 북한, 중국, 러시아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아시아판 나토가 필요합니다. 이를 인도-태평양 조약 기구(IPTO)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심축과 바큇살(hub-and-spokes) 동맹체제 내에서, 미국과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등 동맹국은 바큇살 간 협력(spoke-to-spoke)을 더 강화해야 합니다. 또한 인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트남과 같은 중요한 파트너들과의 협력도 확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권 국가의 봉쇄나 정권 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이는 우리가 강압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인도-태평양 지역의 모든 국가들의 주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공존하고, 경제 관계를 유지하며, 전면전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의 조선업 협력에 관심을 표명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는 미 해군 함대를 더 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은 이 공동의 노력에 많이 기여할 수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는 이러한 이유때문에 SAIS에 정몽준 안보 석좌교수직을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이 한반도의 얼어붙은 전장에서 뿌린 선의의 씨앗은 지금도 계속해서 좋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본 글은 정몽준 명예이사장이 2월 17일 (월, 현지시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국제학대학원(SAIS, School of Advanced International Studies, Johns Hopkins University)을 방문하여 “MJ Chung 안보 석좌교수직”(MJ Chung Distinguished Chair in Security Studies) 기금 기탁식에서 연설한 내용의 국문 번역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