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회담을 한 달도 채 앞두지 않은 5월 16일 북한이 회담 무산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핵 포기를 강요하며 확실한 체제 보장을 안 해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북한은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적극 미는 리비아식 비핵화 해법을 리비아 독재자의 최후와 연결시키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틀 후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달래기에 나서 카다피 제거를 의도한 리비아 모델을 북한에 적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핵 폐기 때문에 카다피가 죽었다는 북한의 레토릭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24일에도 최선희 외무성 부상을 앞세워 리비아 모델 수용의 절대 불가를 거듭 강조하며 펜스 미 부통령을 신랄히 비난했다. 결국 몇 시간 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북한은 미국의 취소 발표 후 7시간 만에 재고를 촉구했다.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재추진을 시사했고 남북 정상이 한 달 만에 다시 만났다. 이어 북미간 실무협의가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진행됐다. 김정은 위원장을 두 번째 만나고 온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제대로 된 체제 보장을 원한다고 전했다. 반전을 거듭한 북미간 힘 겨루기에서 화두는 리비아 모델이었다. 북한이 이처럼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리비아 모델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이며 2006년 완료된 리비아의 비핵화와 2011년 독재자 카다피의 죽음 사이에 유의미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1.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 핵 포기 이후 단계적 보상 방식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은 핵 물질과 핵 개발에 필요한 장비∙자료를 미국에 넘겨주고 비핵화 검증을 거친 후 경제 지원과 국교 정상화의 보상을 받은 방식이다. 2003년 12월 리비아의 카다피는 자발적으로 핵 포기를 선언했다. 이듬해 2월 수도 트리폴리에 미 국무부 이익대표부가 들어섰고 3월 IAEA의 핵 사찰이 시작했다. 6월엔 이익대표부가 연락사무소로 격상됐고 9월 미국의 제재가 해제됐다. 그 과정에서 리비아의 핵 물질∙시설∙능력은 미국의 테네시주 오크리주 연구소로 꾸준히 옮겨졌다.
2005년 10월 미국은 리비아의 핵 폐기 완료를 발표했다. 이어 2006년 5월 트리폴리의 연락사무소가 대사관으로 승격되면서 양국간 국교 정상화가 이뤄졌다. 한달 후 미국은 25년 만에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 이로써 2년여에 걸친 미국과 리비아간 ‘선 폐기, 후 보상’ 과정이 마무리됐다.
반미 강경노선을 고수해 온 카다피 정권이 갑작스레 핵 포기를 선언한 후 미국은 단계적인 제재 해제와 경제 보상의 약속을 지켰다. 2004년 리비아에 미 이익대표부가 개설되자 서구 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졌다. 기업들은 개혁∙개방의 구호 하에 사회 인프라 구축 사업을 추진하던 카다피에게 큰 규모의 지원과 투자를 약속했다. 미국은 2006년 국교 회복으로 마지막 보상을 제공했다. 여기까지가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이다. 핵 포기 이후 정권 교체가 아닌 단계적 보상 방식이다. 리비아식 해법을 두고 핵 폐기와 검증, 보상 과정이 미국의 강경 매파에게만 유리하게 일방적으로 진행됐다고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미국과 리비아 사이에 이뤄진 비핵화의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보상은 양국 관계가 심각한 대결구도에 기반하지 않아서 가능했다는 평이 있다. 북미관계는 미국-리비아 관계보다 훨씬 더 대립적이기에 리비아식 비핵화의 연착륙이 북한에 적용되기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2003년 카다피가 극적인 비핵화 선언을 하기 전까지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매우 나빴다.
1979년 트리폴리에서 2천여 명의 시위대가 반미 구호를 외치며 미국 대사관을 방화하자 미국은 바로 리비아와 단교했다. 1981년엔 리비아 인근 해역에서 미국과 리비아 간의 공중전이 발생해 리비아 공군기 2대가 격추됐다. 카다피 정권은 미국에 복수를 선언했다. 1986년 독일 주둔 미군을 공격한 폭탄 테러의 배후가 리비아로 밝혀지자 미국은 카다피의 숙소와 주요시설을 폭격했다. 응징의 악순환은 이어졌다. 1988년 미국의 팬암 민간항공기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파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리비아 정보기관이 배후로 드러났다.
미국은 1985년 리비아산 석유화학 제품 수입 금지, 1986년 미국 내 리비아 자산 동결, 미국인의 리비아 체재 금지, 리비아와의 교역 금지의 경제 제재를 시작했다. 1992년엔 리비아로 항공기 운행을 금지하는 제재도 추가했다. 같은 해 유엔 역시 리비아의 항공기 운항 금지와 무기 금수 제재를 시작했고 이듬해 해외 자산 동결과 원유 관련장비 금수의 추가 제재를 결의했다. 1999년 카다피가 팬암기 폭파 혐의범 2명을 인도한 후 유엔 제재는 유예됐다. 2001년 유엔 주재 리비아 대사는 폭파범과 리비아 정부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미국과의 관계개선 의사를 밝혔다. 2003년 카다피는 희생자 유가족에게 보상을 약속했고 몇 달 뒤 핵 포기를 선언했다. 2004년 부시 대통령은 1985년부터 발효된 대리비아 제재 관련 4개 대통령 명령을 철회했다.
2. 카다피 정권의 몰락: 혁명 발발과 독재 체제 붕괴의 불가측성
2003년 핵 포기를 선언한 카다피 정권은 2006년 미국과 국교 정상화를 이뤘고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의 발발로 붕괴했다. 리비아 독재자의 몰락은 당시 아랍의 장기 독재 정권을 연쇄적으로 무너뜨린 혁명의 여파였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물론 국제사회는 민주화 시위대를 지지했다. 리비아와 시리아, 예멘처럼 독재 정권의 유혈 진압으로 시위가 내전으로 악화된 경우 반군을 지원했다. 국제사회가 지원한 반군이 정부군과 교전 중 독재자를 사살했다고 해서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이 카다피 제거 목적을 갖고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리비아 모델의 최종 목표는 2006년 미국-리비아 국교 정상화였다. 미국의 리비아 체제 보장이라 볼 수 있다. 카다피 정권의 몰락은 핵 폐기가 아닌 독재 체제의 내부 문제 때문이었다.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는 후세인의 이라크, 아사드의 시리아, 살레의 예멘, 부테플리카의 알제리와 함께 중동의 대표적인 폐쇄적 독재국가였다. 알제리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소수 부족이나 종파가 권력을 독점했다. 1969년 쿠데타로 왕정을 몰아낸 카다피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을 혼합한 인민대중(Jamahiriya) 체제를 표방했으나 국가 운영을 위한 체계적인 제도와 틀을 제대로 발전시켜 본 적은 없었다. 리비아는 정치 자유화의 경험이 부재한 공포국가였다. 시민사회는 지속적인 탄압으로 인해 협상의 경험이 없었고 국가만큼이나 역량이 부족했다.
2010년 12월 튀니지의 시디부지드에서 야채 노점상을 하던 청년 실업자 부아지지가 부패한 단속 공무원에 항의해 분신을 기도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번진 반정부 시위는 주변 국가들로 빠르게 확산됐다. 2011년 아랍 민주화 혁명의 시작이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예멘의 장기 독재 정권이 순식간에 붕괴 직전으로 몰렸고 시리아를 제외한 네 나라의 독재자가 물러났다.
아랍 독재 정권의 몰락은 극적으로 일어났다. 체제의 특성 때문이었다. 독재는 억압과 감시로 유지되기 때문에 정권에 대한 정확한 여론 형성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독재자의 측근 엘리트는 거짓 충성 경쟁을 벌였고 시민들은 비밀경찰의 공포정치 하에서 폭발 직전의 불만을 숨겼다. 독재자와 엘리트는 표면적인 체제 안정을 과신했기에 혁명의 전조를 눈치 챌 수 없었다. 독재 체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폭압정치, 부정부패, 빈부격차, 빈곤의 문제가 정권 몰락으로 바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체제 붕괴의 위기는 정권이 우발적인 계기로 여론 통제력을 잃는 순간 시작된다. 장기간의 탄압과 통제로 인해 독재자는 자신의 취약한 기반을 제대로 몰랐고 거센 분노에 당황하게 된다.
카다피도 마찬가지였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의 여파가 리비아에도 몰아치자 카다피는 허둥댔다. 강경책을 철회했으나 성난 여론은 더욱 확산됐다. 독재자가 갑작스레 유화 카드를 꺼내 들자 엘리트는 카다피의 정권 수호 의지를 의심했고 기다렸다는 듯 이탈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냉혹한 독재자를 혁명으로 몰아낼 수도 있겠다는 계산에 들어갔다. 카다피가 다시 강경 입장으로 돌아섰을 때는 이미 반카다피 시위대와 정부군의 충돌이 정부군-반군-이슬람 세력간의 내전으로 변한 후였다. 유엔안보리는 비행금지 구역을 선포하고 민간인 보호에 나섰다. 결국 NATO 군이 공습을 시작한 후 독재자는 반군에게 생포되면서 최후를 맞았다.
3. 김정은 정권의 생존과 체제 보장 문제
리비아와 북한은 독재 체제, 핵무기 개발,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리비아의 권위주의 정권과 달리 유일지도 체제 하의 북한 정권은 전체주의 시스템을 통해 사회 구성원을 통제하고 있다. 또한 북한 체제는 리비아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어서 외부 충격에 더 독립적이다. 하지만 정권의 운명이 3대 세습 독재자 한 개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기 때문에 독재자의 사소한 태도 변화가 걷잡을 수 없는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통제와 감시가 심한 체제일수록 불만의 분출은 예기치 않은 기회에 폭발적으로 일어나 세습 정권의 불안한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만일 북한에서 급변 사태가 일어날 경우 리비아처럼 내전으로 확대 될 가능성은 낮다. 리비아와 달리 북한에서는 국가 강권기구를 제외하고는 무기 소지가 일상화되어 있지 않아 저항 세력이 빠른 시간에 무장하기 어렵다. 또한 이웃 나라에서 같은 종교, 같은 민족의 무장 세력이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폭력을 확산시킬 수도 없다.
2011년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로버트 킹 전 미국 북한인권특사에게 카다피의 최후를 언급하며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에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다. 7년 후에도 여전히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며 미국의 강력한 체제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체제 보장을 거듭 약속했으나 북한은 카다피 정권과 달리 빠르고 완전한 핵 폐기를 계획하는 것 같지는 않다. 노동신문에서는 핵 합의와 별개로 탄도 미사일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이란에 대해 적극 지지하고 있다.
독재는 내부 문제로 무너진다. 자국 시민의 민주화 시위와 정권 수호를 포기한 측근 엘리트 때문에 몰락한다. 카다피 정권도 그랬다. 북한 정권의 가장 큰 위협은 독재자와 엘리트가 지지 기반의 취약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올 것이다. 독재자에 대한 엘리트의 충성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고 침묵하던 시민들은 새로운 여론이 분출하는 순간 집단적으로 태도를 바꾸게 된다. 미국의 체제 보장 약속은 핵 보유만큼이나 정권 생존을 위한 보험이 되지 못한다. 외부의 강력한 체제 보장 기제가 있다 한들 순식간에 일어나 급박하게 진행되는 혁명 과정에서 작동할 수도 없다. 독재 정권의 생존은 외부의 약속이 아닌 내부의 국가 장악력 정도에 달려있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