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5일, 정의용 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한 대북특사단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면담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2월 9일 김여정 특사 방한의 답방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번 방문은 북한으로부터 비핵화에 대한 언급과 간접적인 핵/미사일 발사 모라토리엄을 이끌어내었으며, 4월말 우리지역(판문점 평화의 집)에서의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하는 등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조성에 있어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특사단 방북은 남북한 간 인식의 간극이 만만치 않으며, 북한 비핵화를 향한 여정이 앞으로도 결코 쉽지 않음을 다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외형적 진전 속에 산제한 난제(難堤)들
정의용 특사단장은 3월 6일 서울 귀환 후 김정은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측과의 협의 결과를 아래와 같이 브리핑했다.1
(1) 남과 북은 4월말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구체적 실무협의를 진행해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군사적 긴장완화와 긴밀한 협의를 위해 정상간 Hot Line을 설치하기로 하였으며, 제3차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첫 통화를 실시키로 하였다.
(3)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였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4) 북측은 비핵화 문제 협의 및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용의를 표명하였다.
(5)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북측은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전략도발을 재개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이와 함께 북측은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확약하였다.
(6) 북측은 평창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가기 위해 남측 태권도시범단과 예술단의 평양 방문을 초청하였다.
‘정상회담’, ‘비핵화 의지’, ‘미ㆍ북 대화’ 등 외형적 측면에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의 입장에서도 환영할 수밖에 없는 키워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브리핑 내용에 공식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김정은은 4월로 예정된 한ㆍ미 연합훈련이 예년수준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해 ‘이해’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이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전언이었고2, 이 역시 특사단 방북시 표명된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이 그동안 한ㆍ미 연합훈련을 ‘북침연습’이라고 주장하면서 한반도 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의 하나라고 주장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 중요한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각론을 들여다보면 만만치 않은 논리적 함정이 발견되기도 한다. 일단 비핵화와 관련된 논거이다. 브리핑후 기자단과의 일문일답 내용을 보면 김정은은 특사단과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는 점에 변함이 없다”고 언급했다고 한다.3 이 ‘선대(先代)의 유훈’은 바로 김일성이 천명했던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의미하는데, 북한은 이 유훈 하에서도 20여년간 핵/미사일을 개발했다. 북한이 ‘유훈’에도 불구하고 핵을 개발한 가장 큰 명분은 바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었다. 즉 미국과 그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체제안전을 훼손하려하기 때문에 ‘자위적 핵 억제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북한 핵 보유의 핵심적 논리였다. 이 점은 남북 대화 복원과 북한 대표단의 평창올림픽 참가의 계기를 제공한 2018년의 김정은 신년사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4
차라리 김정은의 ‘선대의 유훈’만이 브리핑에서 소개되었다면 이는 탄력적 해석의 여지가 존재했다. 여기에는 비핵화라는 목표만이 들어가 있지 핵 보유의 ‘핑계’에 해당하는 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사적 위협이나 체제안전 등이 강조되면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ㆍ보유논리가 동어반복된 격이 되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병진정책’과 ‘핵 강국’만을 강조하던 김정은의 입에서 어떠한 의미로든 ‘비핵화’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진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 속에서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중단 및 핵능력 해제를 의미하지만, 북한의 ‘조선반도 비핵화’는 전혀 다른 개념의 논리이다.
이는 북한이 2016년 7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대변인 성명’을 통해 발표한 데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① 남한 내 미국의 핵무기 모두 공개, ②남한 내 모든 핵무기 및 기지 철폐와 검증, ③ 미국의 핵 타격수단을 한반도에 전개하지 않는다는 보장, ④ 북한에 대한 핵 위협이나 핵 불사용 확약, ⑤ 핵 사용권을 가진 주한미군 철수 선포 등이었다.5 즉, 1990년대에 이미 철수한 전술핵이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논리적 억지를 기반으로 한ㆍ미 동맹의 군사적 대응태세를 포기하라는 것이 북한의 논리이다. 역으로 이러한 조치가 없으면 자신들의 핵보유는 지극히 정당하며, 비핵화의 경우에도 기존에 주장해 온 ‘미ㆍ북 핵군축회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한ㆍ미 연합훈련, 한ㆍ미 동맹, 대북 제재 등을 앞으로도 얼마든지 ‘대북 적대시 정책’의 상징으로 주장할 수 있다.6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핵/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것 역시 전체 맥락상 평양에 의한 악용의 소지가 있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이 일단 핵/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아야 대화의 좋은 출발점(good starting point)될 것이라는 점을 2017년 8월 17일(현지시각) 헤더 노트(Heather Nauert) 미 국무부 대변인의 성명 이후 거듭 천명해 왔다. 일단 미ㆍ북 대화 분위기가 성숙하려면 북한이 선제적으로 도발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평양은 이번 특사단 방문을 통해 공개 모라토리엄 선언 대신 한국이 이를 ‘지불보증’하는 방식을 택했다. 더욱이, 핵/미사일 실험의 중단이 선행된 것이 아니라 “미ㆍ북 대화가 진행되어야” 이를 유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서울과 워싱턴에 던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의 사실상의 모라토리엄을 유지하려면 미국이 조기에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압박과 강청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국에 대해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 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호의와 선의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한 꺼풀을 뒤집어 보면 북한의 핵/미사일은 대미용이지 대남용은 아니라는 기존 선전/선동의 연장선상이다.7 북한의 발언이 한반도 평화와 2017년 중 주기적으로 부각되던 ‘한반도 위기론’에 비추어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내용이 브리핑 내용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 북한은 2017년 8월의 ‘괌 포위사격’ 발언과 2018년 김정은 신년사에서의 ‘핵단추’ 발언을 통해 미국 본토까지를 위협할 핵능력을 지향하고 있음을 천명했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이 동맹국을 위협하는 핵전력을 건설하지만, 한국의 안전은 보장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간은 아니더라도 한ㆍ미 국민들 간 심각한 정서상 이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향후 만에 하나 미국이 전격적인 대북 군사행동을 시도할 경우, 한국의 안전을 우려해야 하는 심리적 부담을 덜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한다. 더 나아가 북한의 핵 개발이 “저쪽”의 문제인데, 이로 인해 “이쪽”의 평화가 위협받는다는 왜곡된 정서를 우리 국내에 양산할 수 있다(이것이 북한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다).
4월말 정상회담은 향후 진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함축성을 지닐 수 있다. 만약 미ㆍ북간의 대화가 급물살을 타게 될 경우, 정상회담은 남북한 간 신뢰구축과 교류ㆍ협력을 넘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반면, 워싱턴이 생각 외로 우리와의 견해차가 클 경우, 시한을 정한 정상회담은 오히려 우리의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으며, 미ㆍ북 관계와는 별개로 남북한 간의 대화만이 진전되는 모양새를 보일 경우 이는 한ㆍ미간 공조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더욱 중요해진 미국과의 공감대 및 공조
물론, 특사단 방북 결과를 우려 일변도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특사단이 브리핑한 내용은 다분히 양날의 검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대북 적대시 정책의 포기’를 비핵화 전제조건으로 거듭 강조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오히려 대북 적대시 정책이 북한 스스로가 만든 악몽(惡夢)에 불과하다는 논거를 펼 수 있다. 김정은이 금년도 한ㆍ미 연합훈련(예년 수준의)을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인 것은 평양의 시각에서는 대북 군사위협 철회를 강조한 만큼 언제라도 중단을 요구할 여건을 만들었다는 계산에서였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향후 북한이 이를 문제 삼을 경우 2018년 특사단 방문에서 보인 북한의 태도는 결국 평양 자신도 연합훈련을 실제로는 ‘군사적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동안 2차례 열린 남북 정상회담이 모두 북한의 심장부인 ‘평양’에서 열렸고 김정일이 공언한 ‘답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정은을 일단 판문점까지 불러들인 것 역시 우리 대북정책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제 특사단 방문의 성과와 과제에 대한 한ㆍ미간 이해의 폭을 확대해 나가는 일이다. 한국의 특사단 방문 결과가 브리핑되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긍정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seemed to be acting positively)고 평가하면서 “향후 북한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 보겠다”(We’ll see what happens with North Korea)라고 언급했다.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군사옵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명확히 했다.8 즉, 특사단의 방북 결과에 대해서는 신중한 긍정론을 견지하면서도 앞으로 북한이 보일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나타낸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과 관련, 헤더 노트(Heather Nauert)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일단 이러한 상황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a step in the right direction)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 구체적 평가와 조치들에 대해서는 한국과 논의해 결정할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다.9
미국의 이러한 반응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외형상 북한의 태도에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이것을 중대한 여건의 변동으로 볼 수 있는가란 시각이 작용한 탓일 것이다. 국내의 일부 평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북접근은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일례로, 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출범 이후 한 번도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을 전면 부인한 적이 없다. 다만 그 대화가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전제로 하며,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위해서라도 일단은 국제사회의 일치된 압력과 제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이것이 “최대의 압박과 개입”(Maximum Pressure & Engagement) 전략의 핵심이다. 실제로, 평창동계올림픽 국면에서도 미국의 이 입장은 변동되지 않았다. 평창동계올림픽의 북한 대표단 참가와 남북대화와 관련하여 미국은 이를 공식적으로는 환영했다. 우리 측의 남북 고위급회담 제의(1월 4일)에 대해 초반 신중한 반응을 보이던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100% 지지”(I’m behind that 100%) 발언 이후 남북한 간 대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트럼프 자신이 한국의 남북 고위급 회담 제의와 관련하여 “항상 대화의 가치를 믿는다”(I’m always believe in talking)면서 미ㆍ북 대화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나타낸 바 있다.
다만, 대화와 대북 압박의 사이에서 해당시기 북한의 태도에 따라 어느 한 쪽에 보다 강조점을 두는 수사(修辭)들을 구사해 왔다. 이러한 점에서 그동안 미국의 입장이 변화되거나 혼란된 신호를 주고 있다는 것은 우리 국내 언론이나 일부 분석가들의 착시(錯視)이다. “최고의 압박과 개입” 기조는 북한의 6차 핵실험(2017.9.3.) 이후 더욱 강화되었으며, 대화 가능성을 부각할 경우에는 틸러슨 국무장관이 이를 언급하고 백악관이 수위를 조절하며, 제재나 군사조치를 강조할 경우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고 맥매스터 안보보좌관이나 매티스 국방장관이 표현을 순화하는 추세를 보였다. 2018년에 들어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대신 펜스 부통령이 이 역할을 잠시 대신했던 것뿐이며, 강ㆍ온의 어떤 표현이든 간에 북한의 선제적 변화를 전제하고 있다. 대북 대화론자의 대표격으로 이야기되는 틸러슨 장관의 “조건 없는 대화” 역시 북한의 변화 분위기를 조성하는 차원에서의 대화이며 ‘협상’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더욱이 틸러슨 장관은 이러한 입장이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된 것”(As we’ve said for some time)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갑작스러운 정책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의 신중론은 한ㆍ미간 중요한 시각차나 정책적 이견이 발생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려는 고려에서도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보인 펜스 부통령의 행보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펜스 부통령은 당시 김영남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과는 어떠한 접촉도 가지지 않았으며, 방한 전 아베 일본총리와 가진 회담에서는 “최대의 압박과 제재”를 유지할 뜻을 표명하였다. 반면, 그는 남북 대화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2월 11일 방한을 마치고 귀환 하는길에는 “(원한다면)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if you want to talk, we’ll talk)고 밝혔다. 더욱이 펜스 부통령은 2월 10일 김영남 및 김여정 일행과의 만남을 준비했으나 회담 2시간도 되기 전 북한의 거부로 무산되었다는 사실을 미국으로의 귀환 후 밝혔다. 이는 평창올림픽 이후의 남북 협력 분위기가 자칫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성의를 보이는 북한, 이를 거부하고 훼방 놓는 미국”이라는 왜곡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미국도 경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에 대해 한ㆍ미가 공통의 조정된 해석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북한의 ‘비핵화’ 언급과 관련된 미국의 입장은 한ㆍ미간 긴밀한 대화를 거친 이후에 정립될 수 있다는 헤더 노트 대변인의 3월 6일(현지시각)자 언론브리핑 역시 이러한 고려에서 나온 언급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서울 귀환 이틀만인 3월 8일 특사단장이었던 정의용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미국을 방문, 방북 결과에 대해 논의하고 북한의 메시지를 전해주기로 한 것은 발 빠르고도 타당한 조치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3월 7일 여야대표 회동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대북제재를 완화할 계획이 없다”란 점을 밝힌 것 역시 매우 적절한 수순이었다고 평가된다. 이 발언은 특사단 방북이후 북한의 태도에 대한 긍정 일변도 해석의 난무, 미국의 결단을 촉구하는 은근한 분위기의 강조, 그리고 더 나아가 북한의 ‘민족공조’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거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핵폐기와 핵동결, 미사일 문제, 비핵화 문제는 남북간 문제만이 아니라 북ㆍ미간, 국제적 문제”라는 언급 역시 한국 역시 중요한 북한 비핵화 논의의 당사자라는 점을 재강조한 효과가 있다.10
정의용 실장과 서훈 원장의 미국 방문을 통해 북한이 미ㆍ북 대화를 위해 제안했던 카드들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 나타난 대로 장거리 탄도미사일(IRBM 혹은 ICBM)의 개발 중단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석방 문제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전 행정부와의 차별성, 특히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무기로 삼아왔던 트럼프 행정부가 핵과 미사일 동결이라는 카드에 대해 쉽게 마음을 열 것이냐의 여부이다. 단계적 비핵화는 중ㆍ장기적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의 신뢰성을 담보할 검증 문제 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공화당 내 강경파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국내의 기대와는 달리 워싱턴 내에서 대북대화론을 설파할 만한 네트워크는 다수이지도 않고 그리 풍부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워싱턴 내에서 북한을 다룰 전문가 그룹의 한계이며, 이것이 관료사회에서는 더욱 뚜렷하다는 점이다. 대표적 한국통으로 불리던 빅터 차 박사(Victor Cha)는 낙마하였고, 조셉 윤(Josheph Y Yun) 특별대표도 은퇴하였다. 이들의 부재는 결국 더 강경한 대북정책을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 측근 인사로 이 자리가 메워지는 결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더욱이, 워싱턴 내 기존 한국통들의 잇단 퇴진은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보내는 우회적 불만의 메시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만은 없다. 이러한 여건에서는 한국이 자신들의 성과에 급급해 무리한 수를 동맹국에 강청(强請)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며, 비핵화 문제에 관해 한국과 미국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점이 재확인되어야 한다.
미국과의 공조는 미ㆍ북 대화뿐만 아니라 미국의 직접적 대북 군사옵션과 이로 인한 한반도 위기를 예방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국의 정책결정에 있어 한국과의 공조에 대한 신뢰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최고의 관심사는 동맹의 안전과 서울의 정보판단이 될 것이다. 명분과 최고지도자의 생존을 그 무엇보다 높은 우선순위에 놓는 북한의 속성상 직접적 군사조치는 경고나 교훈을 주기보다는 김정은의 생존집착을 자극할 것이고, 이는 북한의 극단적 반발 그리고 한반도 전체의 불행과 연결된다는 논리를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이 역시 한ㆍ미가 약간의 속도나 시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가능하다.
어떤 행보를 취해야 하는가?
이러한 점에서, 대북 특사단의 방미를 기점으로 한국이 다시 한 번 가다듬어야 하는 것은 전반적인 호흡과 시각의 균형성이다. 사실, 특사단의 브리핑 내용에는 남북한 간에 합의된 사항과 협의된 내용, 그리고 북한의 주장이 혼재되어 있다. 최고지도자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최고의 사명으로 하는 특사단의 역할 상 북한의 논리가 일부 뒤섞여 들어갔다는 것이 중대한 결함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미국과의 협의에 있어서도 어법(語法)과 수사의 균형을 맞추어야 하며, 이는 미ㆍ북간 대화를 ‘중재’한다는 입장에서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접근이 반드시 특사단의 방북 결과에서 브리핑된 북한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한ㆍ미가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는 직ㆍ간접적으로 평양에 지속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첫째, 4월말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미국의 지지와 환영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정상회담이 남북한 간의 교류ㆍ협력과 신뢰조성을 넘어 북한 비핵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한ㆍ미 공통의 기대와 열망을 표현해 나가야 한다. 남과 북간 우발적 충돌방지와 위기관리 채널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남북 정상간 핫라인(Hot Line)의 설치 역시 한ㆍ미가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항이다.
둘째,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는 이를 적극 환영하면서도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한반도와 동북아,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점이 다시 부각될 필요가 있다. 즉, 북한의 행위가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체제보장을 위한 정당한 수단이 아니라 국제규범과 레짐을 위반한 평화저해 행위라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재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의 태도 변화는 분명 긍정적인 것이지만, 비핵화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서는 더욱 진전된 말과 행동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정립되어야 한다.
셋째, 비핵화 문제 협의 및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북한의 용의 표명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다만, 북한이 추가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우선 중단하는 것이 대화의 좋은 출발점이라는 미국의 기존 입장에 변동이 없을 경우, 한국 역시 이를 존중한다는 태도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 미ㆍ북 대화에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단 남북대화가 지속되는 상황 자체가 긍정적 여건이므로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는 계속 중단되어야 한다는 논리 역시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북한이 한국에 대해 핵/미사일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이 향후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핵/미사일로 미국을 비롯한 여타 특정 국가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 해결의 길임을 한ㆍ미가 분명히 공감하고 있다는 의사표현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결국 ‘공통의 위협인식’이라는 동맹의 핵심요건을 보다 튼튼히 함으로써 양국간 신뢰의 약화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 북한의 ‘군사적 위협’ 주장과 관련하여, 4월의 한ㆍ미 연합훈련 재개를 전후하여 이 연습은 북한의 만일의 선제공격에 대한 철저한 방어적 목적의 훈련이며, 대북 위협이 아니라는 점이 한ㆍ미 공통의 메시지로 전달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 기존에 북한에 제의해 왔던 한ㆍ미 연합훈련에 대한 참관단 초청 역시 제의하는 것을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여섯째, 북한의 보다 진전된 태도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ㆍ미간에 계속 긴밀한 협의가 지속될 것이라는 원칙, 북한의 명시적 태도 변화가 있을 때까지는 기존의 대북제재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한ㆍ미가 의견을 같이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이 이 원칙을 천명한 만큼, 이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재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수순이 선행되어야 향후 북한이 미ㆍ북 대화 개시 초기부터 제재 해제를 전제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으며, 북한의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수준의 남북대화와 교류ㆍ협력, 그리고 이산가족 등 인도주의적 문제해결에 대한 미국의 더욱 명시적인 지지ㆍ지원도 요청해야 한다. 이는 우리 정부 대북정책의 동력을 강화함으로써 대북협상시의 카드를 확장하는 효과가 있다. 북한이 전반적으로 써내려가려고 하는 스토리가 “협력을 강화하는 남북한, 이를 은근히 방해하는 미국”이라면 우리는 “한ㆍ미간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 평화와 북한 비핵화”가 되어야 한다. 이 스토리가 완성되어야 운전석론도 대화중재론도 실효성을 지니게 된다.
본 문건의 내용은 필자들의 견해로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1. 『중앙일보』, 인터넷판, 2018년 3월 6일자.
- 2. 『연합뉴스』, 2018년 3월 6일자.
- 3. 『한겨레 신문』, 2018년 3월 6일자.
- 4. 김정은은 이에 더하여,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핵 무장력을 유지한 것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를 신년사에서 강조한 바 있다.
- 5. 이에 대해서는 『중앙일보』, 2018년 2월 22일자 참조.
- 6. 실제로, 『노동신문』은 특사단 발표 바로 다음 날 “조선의 핵보유는 정당하며 시비거리로 될 수 없다” 제하의 사설을 통해 이 논리를 반복한 바 있다.
- 7. 미ㆍ북간 갈등이 고조되고 한국이 한ㆍ미 공조에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일 때 평양이 ‘불바다’를 강조해왔다는 점에서 이는 평양의 자체적 논리 모순이기도 하다.
- 8. 군사행동 가능성 언급은 미국을 방문한 스웨덴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나온 것임. 이에 대해서는 https://www.usatoday.com/story/news/politics/2018/03/06/trump-well-see-what-happens-possible-north-korea-talks/399617002/ 참조.
- 9. https://www.state.gov/r/pa/prs/dpb/2018/03/279076.htm.
- 10.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에 대해서는 『연합뉴스』, 2018년 3월 7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