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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우리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 중 하나가 가치에 몰입해 실용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시각을 내세우는 이들은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유사입장국(like-mined country)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자유, 인권, 규칙 기반 세계질서 등을 강조하는 것이 결국은 남북 관계의 경색과 한·중 및 한·러 관계에 이상징후를 불러왔으므로 ‘실용’적이고 ‘균형’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치는 곧 우리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고, 모든 국가는 정체성에 따라 국제관계와 현상을 이해하고 판단한다.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국제관계관과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한 접근이 어떻게 다른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정책에 그대로 드러난다. 정체성은 우리가 걸어온 역사적 과정과 정치·경제·사회적 체제의 특성을 반영하고, 해방 이후 6·25전쟁과 산업화·민주화를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와 체제가 체화된 우리에게 다수결, 비밀투표, 다양성의 존중 등은 이론을 넘어 실제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들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길을 걸어온 것인지에 대한 자각 없는 국가나 체제가 이익 위주의 실용을 제대로 추구할 수 있을까. 한 국가의 평판이나 국제적 위상은 물질적 이익 이상으로 중요한 국가 이익이고, 그것이 곧 그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결정하며, 그에 따라 기업들의 대외 이익도 확장된다.

실용을 외치는 이들은 가치를 중시하다 보면 특정 국가를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제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외교적으로 능숙한 국가라면 특정 체제나 이념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태나 정책이 초래하는 국제관계상의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또한 실용의 관점에서 보면 체제나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이익의 공통분모는 존재하고, 이로 인해 상대 국가 역시 나와의 관계를 관리하려 한다. 한·미동맹에 대한 강조가, 인권에 대한 옹호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정책이 특정 국가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한다면 가치를 탓하기보다 해당 국가를 움직일 이익이나 압력 수단의 레버리지가 부족하지 않은지 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실용의 자세다. 남북 관계 관리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편하게 생각하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고 긴장이 관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은 소대가리” 운운의 국격 모독이 되돌아왔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돌아보아야 할 것은 과연 저런 식의 실용이나 균형이 상대 국가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가이다. ‘안보는 ○○, 경제는 XX’ 등의 접근방식은 상대 국가 입장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국제관계에서 이득만 얻어내려 한다는 인상이 각인되면 그 국가는 모든 국가로부터 내쳐지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나의 가치와 노선을 분명히 표방하는 전략적 명확성은 단기적으로는 관계 악화를 불러올 수 있지만 중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투명성으로 인한 상호 신뢰를 가져다주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거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

우리는 다양성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이고, 실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입장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데 가치보다 자기 식의 실용이 우선해야 한다면 그것을 국내적인 지식의 시장, 그리고 유권자에게도 당당하게 제시하는 것이 바른 자세다. 실용을 외치면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이나 자유, 인권의 가치를 적당히 섞어 포장하는 것은 스스로 논리가 궁색하다고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제관계에서든 국내적이든 간에 적당한 모호성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 정체성과 이익 모두의 면에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

 
* 본 글은 1월 6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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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현
차두현

외교안보센터

차두현 박사는 북한 문제 전문가로서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 정치·군사, 한·미 동맹관계, 국가위기관리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실적을 쌓아왔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팀장(2005~2006), 대통령실 위기정보상황팀장(2008), 한국국방연구원 북한연구실장(2009)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의 교류·협력 이사를 지냈으며(2011~2014) 경기도 외교정책자문관(2015~2018),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2015~2017),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2017~2019)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 겸 수석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객원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국제관계분야의 다양한 부문에 대한 연구보고서 및 저서 100여건이 있으며, 정부 여러 부처에 자문을 제공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