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위기를 경험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상호 단절과 각자도생의 경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남중국해 분쟁 등에서 보여준 강대국 일방주의와 약육강식, 증오와 불신을 먹고 자라난 각종 지역분쟁, 국제 정치와 국내 정치 모두에서 발생하는 민주주의의 위기, 국제적 리더십의 부재 등은 정보화, 세계화, 자유화로 요약될 수 있었던 기존 국제질서를 훼손해 왔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국제질서의 대격변 속에서 우리도 가치에 충실하기보다 ‘실용적’이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랜 동맹국도 냉엄한 국가 이익의 기준을 들이밀고 있는 마당에 굳이 우리가 일부 주변국과 척지면서까지 자유민주주의, 인권, 규칙 기반 세계질서 등의 가치를 목소리 높여 주장할 필요가 있느냐는 논거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존에 꿈꾸던 세계질서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현재와 같은 혼돈과 불신에 편승하기만 하면 우리의 ‘실용’적 이익이 보장되는가. 아니 최소한 현상유지 정도는 가능한 것일까.
우리의 근현대사는 자유를 향한 열망의 과정이었고, 그 희망을 놓지 않은 우리의 의지와 국제사회의 지원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뤘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우리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 과정을 함께한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정체성을 부정하면서까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러·우 전쟁과 관련해 우크라이나 책임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로마이단(Euromaidan) 운동과 친서방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 등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만약 이러한 논거를 받아들인다면 6·25 전쟁에서의 ‘북침론’이나 우리의 원인제공론도, 중국의 항미원조 주장도 수용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한·러 관계를 고려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자제해야 한다면 1950년 당시 우리를 도운 16개 참전국과 6개 의료지원국의 행동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린란드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심에 대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누구도 이런 강대국 시각 위주의 일방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다. 독일의 반나치 운동가였던 마르틴 니묄러의 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First they came)’는 권위주의적 억압과 야만을 방관한 피해가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지적했고, 이는 국제정치에서도 다르지 않다.
가치나 체제가 다른 국가들과는 대립과 단절을 추구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천명을 통해 지금 평양이 하고 있는 행동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 중견국이고 ‘글로벌 중추국가’라는 목표를 표방한다면 최소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질서에 대한 애착과 수호 의지는 보여주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접근을 이념 위주 접근이고 진영 논리라고 평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냉전적 사고방식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위기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이미 유럽연합(EU)을 포함해 자유민주주의를 공유하는 많은 국가가 결속과 협력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다. 지금일수록 우리가 지향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능력을 키우고 유사입장국(like-minded country)과의 연대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 미국 역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위상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면에서 정책 재검토의 시기를 거칠 것이다. 그동안은 우리가 흔들리는 동맹국을 확신시키고 우리의 역할을 확대, 강화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자유주의 국제질서도, 동맹도 지켜나갈 수 있다.
* 본 글은 3월 31일자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이며, 아산정책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닙니다.